★아홉 살배기 다섯 번에 나의 처녀 천왕봉 등정기 (지리산)★


金剛秀而不壯 금강산은 빼어나긴 하나 장중하지 못하고

智異不而秀壯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나지 못하다


짙은 관목들이 신록을 붙들어 중산리계곡을 덮고 물소리까지 가두는 골짜기를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 구상나무가 이따금 숨통을 내고 있다. 돌로 다듬어진 길은 줄찬 오르막길이고 철 잃고 핀 함박꽃 몇 송이가 유난히 처량하다.


망바위를 지나서 로타리대피소를 향하는데 내 앞서 초등생 두 명이 구구단 문답을 하며 다정하다.

“힘 안드니?”

“아니요.” 나의 생뚱맞은 참견에 꼬마가 뒤돌아보며 대답한다.

“천왕봉 가게-. 괜찮아?”

“다섯 번이나 올랐는데요.” 난 순간 멍했다. 아니 아찔했다. 더는 의아했다. 갸름하고 하얀 얼굴에 귀티가 흐르는 꼬마가 천왕봉을 다섯 번이나 올랐다는 게 믿기지가 안했다.

“다섯 번이나 올랐단 말야?”

“예”

“어디 사는데···?”

“서울요.” 갈수록 ‘?’가 쌓인다.

“그럼 지금 어디서 와?”

“어제 밤 서울서 버스(심야)타고 왔어요.”

“너희들 둘이?”

“예”

“누구랑 다섯 번이나 올랐는데?”

“엄마하고요.”

“아빤?”

“아빤 등산 좋아하지 않으셔요.”

“나이 물어도 될까. 몇 살··?”

“아홉 살요.” 난 또 한 번 얻어맞고 멍해졌다. 소년(이젠 꼬마란 단어는 취소다)이 동행하는 큰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육학년인데요.” 허긴 내 질문이 애매모호하긴 했다.

“형제니?”

“예” 두 소년은 서울 HR초등학교엘 다니고 동생 이름은 이 건이라 했다.

“야~아! 너희들 대단하다. 솔직히 아저씨가 부럽구나.” 나의 산등정이 갑자기 초라하고 심약한 의지력이 자조감이 되어 명치를 싸하게 해온다. 난 오늘 천왕봉이 초행길인 것이다. 산행기까지 끌쩍거리는 주제에 천왕봉을 못 왔음은 순전히 나의 용기와 의지력 탓이라.

거대한 바위가 나타났다. 두 소년을 바위 앞에 세우고 디카에 담았다. 이때 두 미즈님들이 나타났다. 그녀들이 어리둥절해 한다. 내가 물었다.

“누구. 아니?”

“누나들요.”

“친 누나?‘

“아뇨. 친척누난데요.” 난 그녀들을 향해서 목례를 하곤 더 이상 하다간 불청객 딱지를 뗄 수가 없을 것 같아 손들어 작별을 해야 했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새익산회장(현직 선생님이고 오늘 나를 안내하는 흙회장도 선생이다)과 여(女)선생님과 동행하며 법계사를 향한다. 범상한 굴참나무의 위용에, 잎도 없이 가녀린 모가지에 사각마름모 열매를 달고 땅에 바짝 붙어있는 이름모를 난에 빡센 오름의 진절머리를 나누며 시간을 앗는다.

정오가 되니 법계사가 가파른 천왕봉 산자락 아래서 다소곳이 우릴 맞는다. 일찍이 산하를 유랑하다 천왕봉에서 하산하던 아기조사는 여기가 천하제일 명당이라고 법계사(544년)를 세웠다. 허나 명당은 수난의 연속 이였다.

고려 우왕 때 황산벌싸움에서 대패한 아지발도는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천왕봉에서 일본으로 이어지는 대륙의 서기가 법계사로 해서 끊겼다”며 불 질러 버렸다.

그 후 중축했던 절은 1908년 의병장 박동의가 여길 아지트 삼아 일군(日軍)에 항전했으나 패해 다시 참화를 입었다. 다시 일제는 여기를 비롯해 명산의 지맥에 쇠 못질을 한 게 몇 백 군데였던가. 그 증좌가 법계사에 남아있었다.

새익산회장, 여선생과 점심을 들곤 천왕봉을 향했다. 급경사 돌너덜길은 여간 지치게 하는 코스라. 2km 남짓을 한 시간 반을 쏟았다.


1489.4/22일, 김일손(金馹孫)은 정여창(鄭汝昌)과 같이 오늘 나와 똑 같은 코스길을 걸어서 천왕봉에 올랐다.

그 땐 다듬어진 길도 없었을 테니 그들 고행을 어찌 가늠이나 할 것인가. 그의 속두류록(續頭流錄)엔 “한 칸 정도의 돌담을 쌓았고, 담 안의 너와집엔 부인의 석상이 안치되 있는데 천왕(天王)이라 불렀다. 천왕 주위엔 신에게 바친 지전(紙錢)이 걸려 있었다.”고 당시의 천왕봉 정상의 성모사(聖母祠)를 묘사하고 있다.

허나 지금은 흔적도 없고 천왕봉을 새긴 표지석만 있다. 그 표지석도 남명(南冥; 曺植)선생이 세웠던 <萬吉天王峰天鳴孺不鳴;하늘은 울어도 천자봉은 울지 않는다.>이란 입석이 있었다는데사라지고지금은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란 글귀가 천왕봉이라 새긴 입석 뒷면에 음각되 있다.

천왕봉은 바위산정이길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오늘처럼 수많은 인파가 매일 북새통을 이룰 텐데 바위 아닌 게 남아나겠는가. 오늘따라 사·팔방의 시계가 가없다. 행운이라!

사파세상은 어디다 묻고 검은 산록들이 하늘과 맞단 금을 그어 최대치의 원주율을 만들었다. 하늘아랜 겹겹 산릉이며 산릉위엔 흐르다 만 구름 한 떼라.


류몽인(柳夢寅)은 그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 적는다.

“드디어 지팡이를 내저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아, 이 세상에 사는 덧없는 사람이 가련하구나. 항아리 속에서 태어났다 죽는 초파리 떼들 다 긁어모아도 한 옹큼도 되지 않는다. 인생도 이와 같거늘, 조잘조잘 자기만 내세우며 옳으니 그르니 기쁘니 슬프니 하며 떠벌리니, 어찌 크게 웃을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신뢰도 제일 꼴찌인 장치인과 정부 고위관료는 류몽인의 글을 하루 한 번씩 독송할 일이라.

그렇게 벼렸던 천왕봉 등정이였는데 왠지 덤덤하다. 멍하다. 하늘아래 첫 땅인데도 시끄럽다. 오롯이 사진 한 장 찍을 순간도 없다. 표지석만 담고 백무동골을 향해 발을 땐다. pm2;20이 됐다.

제석봉을 향하면서 쳐다본 천왕봉의 바위능선이 장엄하다. 그 아래 제석평전의 푸른 초원은 너무 평온해 마치 고원의 상그랄라 같다. 횟빛 고사목은 그곳의 파수병이 됐고, 땅딸이 구상나무의 싱그러움은 초원의 미래를 꿈꾸고 있는 거 같아 발걸음을 한사코 붙든다. 초록고원이 파란 하늘로 빨려들어 간다.

그 초원을 막 벗어나면 생과사의 절묘한 대칭미가 지리(智異)의 비경으로 나를 맞고 있다. 허공을 향해 솟은 구상나무는 상록 아니면 회색골간으로 협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살아서 아름다워야 죽어서도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싶다.

더는 아름답게 살진 못했어도 죽어선 아름다울 수가 있다고 말하려 함인지 모른다. 썩거나 한 줌의 재가 될 바엔 시신을 기증하면 아름다운 주검으로 태어날 수가 있다.


초파리같이 살다가 죽어 초파리 떼들의 먹이가 될 바엔 주검의 사회 환원으로 진정 고귀한 후생을 삶이라.

pm3시를 넘겨 장터목에 닿았다. 무당 백 명이 났다 해서 무당골인 샤머니즘의 신비골자기로 파고든다. 울창한 수풀이 하늘을 가리고 돌길에 엎드려 있던 서늘한 기운이 나의 발길에 놀라 나를 휩싼다. 선선하다.

천왕봉에서부터의 홀로의 맛을 점점 더 깊이 맛보게 된다. 구상목과 굴참나무가 세수자랑을 하는 걸까? 사스레나무가 끼어들겠다고 하얀 살갗을 벗어던지고 있다. 어느 바위틈엔 귀한 흰꽃진달래가 뾰루퉁 하얀 주둥이를 쬠 열었다.

빨간병꽃이 숨어서 불타고 있다. 이따금 녹색의 장원에 붉게 솟은 미인송은 무당골을 압도한다. 그의 기상을훔치려는데, 이름모를 새소리가 간헐적으로 운다. 햇볕의 무게에 가는 목 쳐져 풀죽은이파리들 틈새로 떨어진 햇살이 나의 발등에서 춤을 추고 있다.

춤추는 햇살에 놀란 돌 부스러기가 나의 신발 속으로 숨어든다. 난 바위에 걸터 앉았다. 배낭을 풀고 신발을 벗어 그 돌멩일 털어냈다. 그 놈은 나에게 휴식을 제공한 셈이다.

다람쥐가 빤히 쳐다보더니만 달아난다. 산님이 오면 군것질이 생긴다는 건가? 보아하니 난 별 볼이 없다싶었던지 황망히 달아난다.

새익산회장과 여선생이 나타났다. 다시 동행하여 참샘에서 해갈하고 물병에도 가득 채웠다. pm4;40분이라.

하동군수와 함양군수가 여기 잘생긴 바위로 내기바둑 한판승을 했는데 하동군수 승! 그래서 함양에 있는 이 바윈 하동바위란다. 지금도 바위의 등기부엔 소유권이 하동으로 되 있는지? 그 바윌 훑으며 오늘의 군백(郡伯)들의 낭만과 여유를 가늠해 보았다.

백무동터미널 뒤 뒤풀이마당에 닿았을 땐 시계바늘은 아직 수직이 안돼 있었다.

오늘의 빡센 산행이 결코 피곤하지만은 않음은 지리산의 기운에 흠뻑 젖은 탓일까~!

09. 06. 13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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