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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주전`흘림골의 단풍놀이 (설악산)

 주전·흘림골의 단풍놀이 (설악산) 


헐떡대지 않고 넘은 한계령은 오색을 향한 내리막이 문제였다. 굽이굽이 휘돈 길엔 버스와 승용차가 늘어져 불붙기 시작한 산자락의 단풍보다 요란한 색깔로 칠을 했다. 흘림골 입구까지의 2km를 앉은뱅이 짓을 하다보니 정오가 넘었다. 차에서 내렸다고 해서 등선대를 오르는 흘림골 길목이 가을하늘처럼 뻥 뚫린 것도 아니었다. 차보다 몇 수십 곱절 많은 인파가 넓은 목계단을 빼곡히 매워 인간꽃뱀이 되어 느물대고 있는 거였다.

뭣 하는 짓인지! 누구 말따나 차라리 점심이라도 먹고 왔어야 되는 건데, 몇 백 년을 살고 있을 주목이 파란하늘을 떠받치고 서있는 당당함 말고는 눈요기 거리도 별로다. 단풍이라야 당단풍나무가 빨갛게 타고 있고 생강, 함박, 개박달, 떡갈나무 등이 당단풍이 멋져보였던지 화장하느라 한참 이였다.

태풍이 할퀴고 간상체기 위에 커다란 주목 시신은 댕강댕강 잘려서 원형의 벽을 쌓아 별난 미감을 돋우고, 어떤 노거수 주목은 산채로 천년 죽어 천년을 사는 표상인양 속살을 텅 비우고 생시목(生屍木)으로 서있다. 오래 살려면 우선 속[욕심]부터 비워야 한다는 걸까! 그놈을 붙잡고 싶었는데 인파 땜에, 아마추어도 못된 솜씨 탓에 디카에 가두는 걸 포기했다. 머리통이 보이질 않는 거대한 꽃뱀의 한 비늘로 변한 나는 그 비늘 틈에서 사람도 오래 살수 있음을 떠올려본다.


160년 전 오늘(10/11), 행려병자처럼 쓸쓸하게 죽어 매장됐던 에드가 앨런 포우는 지금 이 시각 메릴랜드 볼티모어 교회에서 다시 화려한 장례식을 치루고 있다. <검은 고양이>로 대표되는 추리소설의 대가 포우는 볼티모어 어느 선술집 밖에서 쓰러져 나흘간 사경을 헤매다 1849. 10. 11일 4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그의 사촌 닐슨은 마을사람 10명의 도움을 받아 공동묘지에 곧장 매장을 한다. 가난에 절린 비참한 최후였다.

올해는 포우 탄생 200주년, ‘포우 박물관’측과 ‘포우 펜’들은 그의 비참했던 운명이 안타까워 장례식을 다시 치르기로 하고, 밀납인형 시신을 만들어 관에 안치하고 나흘간 철야조문을 받은 후 오늘 교회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마련한 거였다. 포우처럼 천·만년을 살 수는 없어도 몇 십·백년은 살 수가 있는 방법이 있담 시신기증이라고 나는 넉살좋게 얼버무리곤 한다. 이렇게 꽃뱀의 한 비늘이 되면서도 그렇게라도 자위해야만 선술집 시궁창에 빠져 죽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해 본다.


꽃뱀 비늘들이 일제히 살아 솟구친다. 여심폭포라! 헌데 폭포는 없다, 깊은 여심(女深)의 상징이 미궁처럼 건재할 뿐이다. 무릇 비경이란 은근살짝 이어야함이거늘 폭포수 마른 여심은 시커멓게 볼거리도 못되었다. 선녀가 하늘로 등천했단 등선대(登仙臺;1004m)에 올랐다. 반여시간이면 오를 곳을 한 시간 반을 뭉그적댄 꽃뱀은 정상에서 똬리 트느라 어수선하다.

흘림·주전골을 낳는 점봉산이 저 남쪽에서 하얀 바위 상들을 우뚝우뚝 솟구쳐 만물상을 만들고, 반대편 귀떼기청, 대청봉들은 안무 속으로 아른거리고 있다. 등선대 코 아래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점심을 때우곤 주전골을 향해 내리막길을 들었다. 십 여분을 하산하니 꽃뱀은 다시 어슬렁거리며 주전골을 기고 있다.


나는 다시 꽃뱀비늘로 보태져 한눈 뒈지게 팔며 깊은 협곡을 훑는다. 짙은 숲 산릉에서 솟은 하얀 바위날이 하늘을 파먹고 있고, 햇빛은 간혹 그 바위얼굴을 비추다 골짜기로 내려와 나무에 내려앉은 가을을 어루만지면, 이파리는 색색으로 화장을 하느라 수선거린다. 깊은 골에 물소리가 없어도 단풍 번지는 밀어가 간지럽다. 그 간지럼에 부대껴 떨어지는 이파리가 수북하다. 가을은 홍건이 내려앉고 있었다.

꽃뱀은 점점 꼬릴 더 늘어뜨리고 성미 급한 비늘은 삐져나와 하얀 계곡에 파리처럼 앉는다.

그 파리떼를 쫓느라 당단풍은 빨갛게 불태우지만 파리떼의 극성은 갈수록 더 심해진다. 한 시간을 꽃뱀비늘로 박혀있어도 그 뭉그적거림은 몇 십 미터일 뿐이라. 모든 풍광이 액자 속의 정물인 채로다. 어떤 아낙은 파리가 되느니 차라리 육자배기라도 까자고 목청을 고래고래 찢는다.


꽃뱀 땜에 깊은 골에서 안절부절못할 짐승들이 흥겨워 장단 춤을 출지가 궁금하다. 파리떼는 이제 흰 계곡에 부지기수로 불어나 뭔가를 탐닉하고 있다. 나도 그 파리떼가 마냥 부럽다. 지지리도 못난 난 옆의 B를 꼬드겨 파리떼에 합류했다. 4시 반 이였다. 앞으로 얼마나 가야하는지, 문제는 언제쯤 꽃뱀의 거동이 느리게나마 눈에 띄게 될는지? 가 미치도록 궁금한 거지만 어떤 비늘도 정답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비극(?)이랄 수 있었다. 까닭은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꽃뱀의 대가리가 어느쯤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 이였다.

하얀 계곡에서 늘어지게 사지를 폈던 파리떼 한 무리가 5시가 돼갈 무렵 꽃뱀에 끼려들려 하자 꽃뱀몸통비늘이 막아선다. “끼워 줘”라고 파리떼가 하소연 한다. 비늘이 “안돼”라고 응수한다. 이때 파리떼들이 하나 둘씩 “끼워 줘”하고 아우성치다 이내 박자까지 맞춰가며 “끼워 줘”를 연호하는 거였다. 골짜기는 때 아닌 “끼워 줘~!”란 구호에 파묻히고 이곳 어느 깊은 골에서 가짜 위조지폐를 만드는 위조 범은 깜짝 놀라 보따리를 쌀지도 모를 판이 됐다.


폭동이 별건가? 허나 파리떼들은 자기를 잘 알고 있었다. 고분하게 꼬리에 붙었다. 주전골파리떼의 시위는 즐거운 해프닝 이였다. 나도 꽃뱀꽁무니에 끼어 다시 비늘로 변했다. 꽃뱀이 다소 뭉그적대며 움직인다.

이제 모두들 어둠과 마주할 불안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구겨 넣은 재킷 꺼내 입느라 수선이나 난 악발로 버텨야지 달리 방법이 없다.

금강문 오르고 내리는 급경사외길에서 꽃뱀이 몸통을 갑자기 다이어트 하느라 정체가 그리 심했을까. 꽃뱀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만 이젠 어둠이 나를 자꾸 붙잡는다. 하얀 돌만 디뎌라. 숲은 검은 마귀할멈으로 변해 나의 발길을 잡아당기고 온 신경은 다 동원하여 그를 뿌리치며 하산을 하느라 등줄기엔 식은땀이 홍건 해진다. 재킷은 무슨 얼어 죽을 외투?

얼마를 내려오니 계곡이 눈부시게 희다. 물소리가 가늘다. 물인가? 여긴 호우라도 내렸단 말인가!

질펀한 계곡의 흰 바닥엔 간혹 검은 멍이 들어 번졌다. 저건 검은 바윈가? 다 틀렸다. 계곡을 질펀하게 깔아놓은 건 눈발 이였다. 설악은 어느새 눈발을 내리 깔아놓았단 말인가~! 어둠이 그 많은 폭포와 만물상의 바위를 앗아간 대신 나를 위해 눈발을 계곡에 뿌린 것이리라.

달이 휘영청 밝기라도 한담 저 눈의 계곡은 얼마나 눈이 부실건가!

수 억겁을 살아온 계곡은, 돌과 바위는 청정수에, 때론 폭우에 얼굴 씻기 얼마였던가! 그 청량한 공기에 살갗 마사지하기 얼마였을꼬~! 반들거리고 흰 바위와 돌멩이는 그 부단한 노고를 말함이라.


가뭄 땐 설악은 낮에 계곡의 속살을 까발려 선탠을 하며 흰 속살을 건강하게 만들다 밤엔 무서리를 담아 담금질 하는 순환의 살찌움을 하는 중일 게다. 이 밤 초승달이라도 떴다면 어둠을 더듬는 이 발고생도 덜 수 있을 텐데~. 휴대폰 불빛이 그나마 어둠을 뚫는다.

길은 아직도 멀었는가? 어둠 속에서 휴대폰불빛은 도깨비마냥 춤을 추고 있다. 위조범은 걸음마 나살려 하고 도망쳤을 터-. 설악의 주전골은 나에게 또 하나의 추억을 선사하고 있음 이였다. 오색약수터에 닿았을 때는 밤 7시 반을 넘기고서였다.

09.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