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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포쇄

포쇄




신록이 짙은 녹색의 터널을 향해 줄달음질치고 있는 오후입니다.

햇볕은 음지까지 샅샅이 뒤척이며 온기를 쏴대는 5월은 계절의 여왕이지요.

삼라만상이 기를 쭉 펴니 말이외다.

아내가 장롱 속에서 옷가지들을 꺼내 햇볕을 쬐게 하려 부산입니다.

빨랫줄이 모자라 건조대까지 모두 동원하는 데 방바닥에 엎드려 나 몰라라 할순 없었지요.

꺼낸 옷가지들을 죄다 뒤집어 겨우내 눅눅해졌던 습기를 말리느라 시간을 죽이다가 문득 옛말 ‘포쇄(曝曬)’란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중국의 한(漢)나라 때부터 조선조까지 칠월칠석을 전후해 궁중의 각종 문서와 실록들을 햇볕에 말렸다는 말입니다. 종이는 습기에 약해 서고에 오래 보관하면 눅눅해져 훼손될 염려가 많아 반드시 일광욕을 시켰던 거지요.

그 행사가 어느 땐가부터 사대부집들이 자기의 책, 옷, 골동품등을 꺼내 말리는 걸 경쟁적으로 하다보니 은근히 부(富)를 과시하는 세시행사로 번진 게지요.

서민 중에 학륭이란 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옷을 홀랑 벗고 자기네 마당에 누웠댔지요.

가난하여 말릴거라곤 자기 몸둥이 뿐인지라 시쳇말로 스트립쇼를 한 겁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 미친놈 다 있네.’라고 눈총을 쏴도 아랑곳하지 않자 누군가가 “왜 옷을 벗고 누워 있느냐?”고 시비조로 묻습니다.

학륭 왈, “지금 내 배속에 들어있는 책을 말리고 있는 중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책 말린다는 말을 ‘쇄서(曬書)’라고도 한다지요.

어떻든 난 오늘 쇄서 아닌 쇄의(曬衣)를 한 셈이지만 학륭의 기치를 생각하며 피시시 웃다가 ‘아~! 나도 윗도리라도 홀랑 벗고 쇄신(曬身)이라도 해 볼걸’ 라고 아쉬움을 삼키기도 했지요.

갖은 책이 미미해 쇄서할 깜냥은 못되니 언제 따뜻한 오후엔 웃통이라도 벗고 학륭 시늉이라도 내면서 분재(盆栽)나 완상하며 졸부들 흉내라도 내보면 되겠단 생각을 하였지요.

이 따뜻한 계절의 여왕 품에서 뭔가를 포쇄할 수 있다는 여유는 그대로 행복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 5월엔 포쇄를 하지요.

폭염 속에, 여름문턱에 들어서기 전에-.

20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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