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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내 고향의 당산나무

내 고향의 당산나무

당산나무와 정자

무더운 여름철이 되면 나는 고향의 거대한 당산나무를 생각하게 된다. 수령이 일년은 족히 넘었을 당산나무는 동구에 버티고 서서 마을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묵묵히 지켜보며 감싸안은 마을의 수호신이였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큰 당산나무(팽나무)는 본 적이 없는 장엄한 위용을 떨치고 있는데, 몸 둘레는 장정 네 다섯 명이 양팔을 벌려 안아도 여유가 있을 만큼 거목이다. 아마 서너 그루의 팽나무가 자라면서 한 몸뚱이로 합목(合木)하여 한 그루의 거목으로 재 탄생한 땜이었으리라 추정한다.

불갑사저수지

그 거대한 나무는 수많은 가지를 뻗쳐 동쪽 품에 사방 두 칸 짜리 정자(모정) 한 채를 안고 있는데, 그런 정자를 사방에 안아도 될만한 넓은 품안을 자랑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팽나무를 누구나 당산나무라고 부르고 있었다.내 어릴 적-대가족제도가 전성기를 이루던-엔 70여 호를 넘는 동네사람들이(주로 남자와 어린애) 여름철의 폭서를 피하기 위해, 당산나무 그늘이나 정자에 머물던 정경들이 수십 편의 수채화가 되어 나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불갑저수지


정자에선 동네 어른들의 담소와 콧노래가 종일 이어졌고, 때론 고성과 애들의 울음소리가 매미울음소리에 뒤범벅이 된 불협화음으로 찌는 폭염을 쫓아내고 있었다. 어느 땐 그런 소란이 농사일에 지친 어른들의 오수를 방해한다고 누군가 ‘꽥~!’ 소리치게 되면 애들의 울음소리도 뚝 그치고, 신기하게도 매미들도 울기를 멈추기도 하는데 그것도 잠시 뿐이였다. 아무튼 고된 농사일에 피곤한 몸을 정자에 반듯이 눕히고 휴식을 즐기는 점심 후의 한 짬은 어른들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달콤한 휴식이었을 테다.

불갑사향로전의 백일홍


그런 평화로움을 노래하는 매미들의 합창이 자장가였다면 어른들의 ‘드르렁, 드르렁’ 코고는 소리와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뿌우웅~’하는 방귀소리에 우리들은 입을 틀어막고 배꼽을 쥐어잡은 채 히죽히죽 소리 나지 않게 웃게 했던 소극 이였던 것이다. 어른들의 낮잠을 방해할까 봐 얼마나 조심조심 몸 사리던 우리들이었던가. 땅따먹기, 자치기, 딱지치기, 조약돌따먹기 등의 놀이를 하다 싸움 일보직전의 소란을 피울라치면 어른들의 일갈에 혼비백산했던정경들이 눈에 선하다.

불갑저수지


뜨겁게 내려 쬐는 햇볕을 차단하며 상큼한 산소와 살랑바람까지 선사하던 당산나무-마을의 영원한 수호신으로의 고마움을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당산나무는 거대한 체구로 동구에 서서 파수꾼으로, 수호신으로 마을의 번성을 마을사람들과 같이 기원하였고 묵묵히 지켜 본 최고의 어른이기도 하였다. 마을은 진주 강(晉州 姜)씨 집산 촌 이였는데 나의 생가는 정자에서 제일 가깝게 있어 그 누구보다도 당산나무 아래서 일어나는 일들을 많이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이다.

창덕궁연경전

여름철 매미의 합창, 시도 때도 없는 참새들의 수다, 겨울철의 까마귀에 대한 막연한 불안, 그리고 가끔 좋은 소식을 전하러 아침 일찍 ‘짹짹--’거리는 까치들의 쉼터가 가까이 있는 당산나무였기에, 나는 마루에 앉아 일년 내내 바뀌는 그 손님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 즐거운 방학이 시작되면 동네학생들 모두가 아침 일찍 당산나무 밑에 모여 모정에서부터 고삿길 청소를 했던 ‘공생과 화합’의 인성교육의 터전이기도 했다.

벽골재

당산나무는 그의 둥치 못지않게 굵직한 뿌리등걸을 지표 밖으로 수 미터씩 뻗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하 밟고 앉아 희멀건 쥐색으로 닳아 울퉁불퉁 솟은 그대로 멋스러웠다. 합목하느라 울통불통 뒤틀린 몸뚱이를 우리들은 기어올라 비스듬히 누운 가지에 걸터앉아서 히히덕댔다. 또한 아래 정자에 벌어지는 정경들을 즐기며 열매를 따먹던 장난질을 묵묵히 포용하기도 한 진정한 마을수호신 이였다. 그렇기에 동네사람들은 정월 대보름 땐 모두 모여 농악을 울리며 지신 밟기에 이어 굵은 새끼동아줄을 만들어 그의 허리께를 둘러쳐주고, 조촐한 제기도 차려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기도하는 당산제를 치루는 거였다.

신륵사귀목


노동집약적인 벼농사가 주업 이였던 시대, 마을사람들은 상부상조하고 공동체의 동질감을 고취시키는 당산제를 강문(姜門)의 단결심과 한 해의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씻김 잔치로 승화시켜 흥겨운 마당놀이 한판을 연례행사로 벌였던 것이다. 어느 땐가는 가는새끼줄에 흰 헝겊조각과 검정숯을 듬성듬성 꿰어 당산나무 허리를 한 바퀴 둘러 메놓았는데 아직까지도 나는 그 토속적인 의미를 잘 모르고 있음이다. 누군가 마을 수호신에게 비원의 기도를 드리면서 치성드린 표시였겠지 하는 추측일 뿐-.

신륵사귀목의 관세음상


당산나무 아래 모정에선 장유유서의 예의범절과 법도, 효행, 상부상조와 나눔의 미덕을 체험으로 배우게 되는 ‘산교육의 전당’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몸소 실천하고 애들에게 귀감을 보이는 반면교사였던 것이다. 더욱이 마을사람들은 얼마나 철저하게 ‘양반, 진주 강씨’를 팔며 목에 힘주고 살았던가. 요즘엔 고향을 찾게 되면 당산나무도 세월의 무게를 어찌할 순 없는지 옛 장엄함은 노거수의 짙은 음영만큼 쇠락하였고, 모정에도 어딘가 허허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삼청산설경


극심한 이농현상과 나이 먹음에서 기인되는 무디어 진 감정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은 뭔가가 느껴졌다. 그건 유물론이 몸에 밴 개인주의의 만연 탓 일거란 생각을 해보게 한다. 사람들이 도회지로 나가고 마을엔 빈 집이 하나 둘 늘어가는 쇠락을 지켜보는 당산나무의 심정은 나의 스산하고 애잔함 못지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당산나무가 그렇게 버티고 있는 한 나의 고향은 영원할 것이며 추억 또한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나를 살찌우게 할 것이다.

익산집


고향을 찾을 때 먼발치에서 당산나무의 위용을 보게 되면 나는 벌써부터 안도감에 젖게 되고 반가움에 들뜨게 됨은 그가 마치 나의 부모님인냥 생각되는 까닭이라. 그는 고향의 영원한 수호신이고 더는 나에게 있어 돌아가신 어버이의 모습을 떠오르게 해 주는 성스런 나무이기도 하다. 그는 나의 고고의 터를 굽어보며 지키고 있는 수문장이고 어릴 적의 추억을 간직한 영원한 노스탈지어의 깃발이기도 한 것이다.

1998. 02

염산~지도를 잇는 칠산대교공사


익산집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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