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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만날 수 없다는~

만날 수 없다는-


죽음이 가장 몹쓸 것은 다시는 볼 수가 없다는데 있으리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볼려고만 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죽은 자는 다시는 볼 수가 없다.

죽음이 무섭고 슬픈 것은 이젠 존재하지 않음에 있으리라.

그래서일까?

‘산송장이래도 좋으니 곁에 있기만 해 다오’라고 중환자에게 피붙이들은 기도하게 되는지 모른다.

지난하고 애 끓는 간병을 하면서도 살아 있기를 갈구하는 비원이 ‘죽음’을 앞둔 유가족들에게 절절함은 ‘죽은 자’의 허망을 기막히게 인지하고 있기 땜이리라.

나는 20대 초반에 아버님을 여의었고, 결혼 후엔 어엿한 가장으로 궁색하지 않은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시절에 두 어머님을 저 세상으로 보냈었다.

회갑에 든 이제야 회한이 되는 것은 부모님께 무엇 하나 효도랍시고 한 일이 별무여서 이지만, 이번에 장모님을 떠나보낸 후 더욱 그런 감회가 사무치게 됨 이였다.

이 전엔 부모님에 대한 추모의 정이 사무치지 안했음은, 내가 상당히 냉혈적인 이기주의자의 체질에 물 들은 삶에 기인하지 않음인지 생각된다.

반면에 지금도 티브이나 영화를 보면서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울먹이는 현상은 모질지 못한 여린 마음에서라 생각되어 나의 이중성을 자각하곤 놀랄 때가 많다.

아마 그런 나의 성품은 초등교 졸업이후 줄곧 고단한 객지 생활에서 체득한 독존의식이내면에 숙성됨 이였나 싶고, 더는 부모님과의 별거(?)에서 동고동락한 잔정이 적어짐에 비롯됨 아닐까 유추해 본다.

나는 부모님과 갓 떨어져 생활한 중학시절을 빼곤 여태 보고 싶어 안달한 적이 있었나 싶게 기억이 가물 하다.

다만 부모님 중에서도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의 정이 더욱 간절했음은, 당신의 인격과 덕망에 대한 흠모심이 돈독했음과, 투병과 임종을 지켜보았던 절절함 때문이려니 생각하는 것이다.

그 실 생모는 나를 위해서는 당신의 목숨까지도 가볍게 내 줄만큼 무한정한 사랑을 내게 쏟았었는데도 말이다.

어머님에 대한 추모의 염이 미약한 또 다른 소이는 당신의 투병이나 임종시의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음도 한 원인이아니였을까 생각된다.

생모가 아닌 장모님에 대한 간절한 보고픔이 간절함은, 담도암이란 병으로 원대병원에 입원 치료한 4주간의 투병과정을 지켜보았었고, 그 기간 죽음을 향한 환자의 처절한 모습을 애 닳게 간병하며 당신 생의 마지막 생활을 같이 할 수 있었기에 더 함인가 싶다.

하여 자식으로써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봄은 혈연의 정을 더욱 끈끈히 가슴 새기게 되는 계기가 될거란 생각을 한다.

더불어 장모님의 생 자체가 불행의 연속 - 3대 독자로 자란 장인이 상속받은중농이란 가계와 어설픈 지식이 선비연 한 생활자세로 이어져지각없는 자만심이 낳은 무기력한 비생산적인 삶, 그리고 슬하의 아들 5명의 비루하기까지한 불운의 삶들을 당신 혼자 짊어지고 고군분투했던 처절했던 생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속상해 했기에 말이다.

이해할 수도 어떤 대책도 없는 장남,술주정에 못된 송아지마냥 자충우돌폐가망신 생활을 접지 않는 막내가 장모님의 병을 도지고 키웠는지도 모를 만큼 자식복도 박복이셨다.

옛말에 ‘남편 덕 없는 년은 자식 덕도 못 본다’는 전언이 있는데 어쩜 그렇게 장모님께 합당한 말인지 되씹게 된다.

당신 피붙이를 위해선 머리카락 한 올도 아끼지 않을 한 없이 순박하기만 한 애정을, 그 당신의 강단치 못한 사랑으로 해서 혹여 자식들이 속 못 차린다고 난 때때로 지적하기도 했었지만 그게 순진한 자식 사랑인데 어쩌랴.

타인에겐 너무나 예의 바르고 공손하여 초면엔 자못 바보마냥보였을 때가 있었을 성싶고, 배품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인자하심이 천성이라 그리 고달프게만 살아야 했는지?

당신에겐 ‘사위자식 백 년 손님’이라, 여든여섯 살에 중병으로 나의 간병을 받으면서도 무에가 그리 어려운지 뭣 한건 숨기려 애쓰고, 좋아 보이는 건 내게 다 주려는 끝도 없는 사랑을 환갑인 내게 쏟다 떠나셨드랬다.

장모님에 대한 추모의 정이 간절함은 내가 나이 들어 속이 좀 깊어지고 친족에게 집착이 강해지면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 왔었고, 당신의 애통한 생의 말년을 지켜보며 침울한 대화를 적잖이 나눈 때문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퇴원 후 곧 당신네 집 완도로 내려가시게 했었다는 불효였다.

8남매 중 유일하게 보람 이였고 위안 이였던 집사람한테서까지 소홀히 당 했다고 생각 하실 수도 있었던 요 근래의 정황과 퇴원 후의 우리네의 당신에 대한 대접이 한 없이 맘에 갱킨다.

그 실은 당신이 계심으로 해서 잘 난(?) 아들들의 문병 핑계 삼은 내왕이 싫었고, 근래는 당신에게 기대는 막내의 막나니 생활이 더는 볼 수가 없어 조금의 경제적인 도움도 주지 않으려 주저했던 우리부부의 독심 이였는데 지금에 와선 이토록 맘에무거운 짐으로 남게됨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당신의 회갑 사진을 볼 때마다 난 “박장업씨 운운----” 하며 집사람에게 넋두리 인양 당신 얘기를 하곤 하는데 그건 당신이 그리워 뱉는 독백임을 집사람도 익히 짐작하고 있음이라. 정말이지 보고 싶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정채봉씨의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중에서 아이의 간절한 노래를 읊어본다.

담도액 빼 내느라 가슴에 구멍을 내어 막힌 담도에 호스를 끼워 찬 비닐봉지 주머니를 멍에처럼 달고 다니시던 안쓰럽고 애잔한 모습일망정 보고 싶고, 그렇게라도 살아만 계신다면 미진했던 이것저것 해 드리고 싶은 심정 사무친다.

생전에도 항상 그랬지만 당신 땜에 나 불편 할까 봐 , 아니 그 중병 중에도 짐 될까 노심초사 하시던 불운한 당신이 - 애쳐러운 당신이 하 그립고 애 닳게 가슴 후빈다.

하지만 이젠 그 처연한 모습도 찾아 뵐 수가 없다.

‘처갓집 행’이라고 완도엘 가길 못내 고대 했던, 흡사 고향을 찾아가는 듯한 달뜬여행도 이젠 먼 이국의 여행길이 될 것이다. 장모님 안계신 처갓집은 여느 친척집에 다름아니다. 쓸쓸하고 어쩜 삭막할 것이다.

‘봉건의 잔재’만을 몽땅 뒤집어쓰고 평생 온 몸을 장작불처럼 태우시며 초개같은 삶을 꾸리셨던 두 어머님과 장모님은 그 삶이 진정한여자의 일생이라생각하시고 실천한 모범 아녀자였으며, 그래 그 세 어머님은 내게 나의 ‘아카이브의 별’속에서만 존재하는 영원한 그리움이 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애닳픈 일은 보고싶어도 볼 수가 없다는 데 있다.

보고 싶어도 다시는 뵐 수 없는 얼굴! 그 모습!

좋은 인연으로 재생하시어 행복하시기를 기도 한다.


0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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