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瑞雪)로 화장한 만추의 금오산
7시인데도 아직 짙은 어둠에 세상은 캄캄 오리무중이다. 농무의 입자가 불빛마저 삼키는 고속도로를 뚫고 구미금오산을 향한다. 어둠은 여명이 아니라 하얀서설로 장막을 거두고 있다. 차창을 기웃대는 세상은 하얀 은빛이다.
하얀 면사포 뒤집어 쓴 법성사는 썰렁했다.
-서설 덮인 법성사-
붉은 단풍이 한기에 주눅 들어 시푸댕댕해도 첫 눈 밟는 오감은 상쾌하다. 약사암을 오르는 산길은 여간 된비알이다. 눈까지 범벅 칠 해놨으니 바위길 오른다는 게 신경 날 서게한다. 등골에 땀이 솟는다. 자켓을 벗었다. 헐떡거림을 앗는 건 농무가 펼치는 깔끔한 수묵화였다.
-법상사의 단풍-
농무(濃霧)는 운해(雲海)를 만들다가 심심하면 섬도 만드는 거였다. 섬 하나, 섬 둘을 만들곤 저만치 수풀도 심는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릴 찾은 산님들에게 베푸는 금오산의 시혜다.
아~! 넘 멋있다. 깔딱 바윗길을 오른다.
헐떡거리는 숨을 앗아가는 놈은 농무의 농간이다.
-운해 속의 섬-
발아래 골짝 어딘가는 안개공장이 있고 수풀은 안개의 먹이가 돼 사라지고~! 배터지게 퍼먹던 안개는 다시 수풀을 개어내는~ 그러다 또 하나의 섬이 다시 솟아오르고-.
아~! 우주의 쇼를 공짜로 보다니~!
두 시간을 즐기는데 느닷없이 바위섬에 종각이 들어서고 구름다리가 천길 바위벼랑에 걸쳐지고~!
-구름다리와 범종각-
깎아지른 단애에 약사암은 무슨 흡착제로 붙여놨을까? 산천을 주유하던 의상대사는 여기에 이르러 빼어난 경관에 그대로 선정에 들었다. 쪼르륵 배가고파 아사지경에 이르자 선녀가 한 끼의 주먹밥을 주고 사라진다.
요지부동인 의상대사가 가여웠던지 약사여래가 하강하여 시중을 드니 성불한 의상대사가 암자를 지어 단애에 붙여 놨다.
-약사암-
하여 약사전이라. 구름다리로 이어진 종각 뒤의 운해 속의 섬들! 언어도단인 선경이다. 천상으로 오르는 깔딱계단을 밟고 ‘동국제일문’을 나선다. 안무속의 현월봉(976.6km)이 구름 속으로 초대한다. 개기일식(?)속의 정오였다.
하얀바다에 까만 섬들의 연좌, 그 끄트머릴 붙잡고 있는 종각의 육각지붕은 한국화의 압권일 것이다.
-종각을 잇는 구름다리-
우린 하강한다. 구름속의 찬바람이 간담을 서늘케 해서다. 약사암 바위마당에 L이 점심자릴 폈다. 나는 오늘 그가 동행해줘서 느긋하게 우주의 쇼를 즐기고 있는 셈이다.
해찰꾼인 나를 끝까지 잘 지켜줘서다. 약사암은 구름위로 산책 나온 산님들을 위해 뜨거운 커피를 공양하고 있었다.
벗었던 자켓을 다시 입었다.
마애보살입상을 찾아 떠난다. 병풍처럼 휘두른 천길 단애 밑 살 어름 낀 바위길은 급살맞게 가팔라 신경 날 세우느라 우주쇼 볼 겨를이 없었다.
무작위 돌계단이라 겨울엔 아서라다. 쪼개져 구멍 난 바위 사이에 석정이 있다. 탑 쌓았던 노인의 생명수다시피한 석긴수를 맛보고 걸으면서 그때 동행 안내했던 노인을 회상했다.
마애보살입상이 거대한 바윌 등세우고 앞을 가로막는다. 보관(寶冠)을 쓴 반나(半裸)의 보살님은 아랫도리에 얇은 가사를 흐를 듯 걸치고 금방 비천할 모양이다.
천여 년을 버텨온 이 음각화가가 이리도 선연할 수가 있는 것은 세월을 극복할 수 있는 천혜의 위치 탓이란다.
-마애보살입상-
뭔가 쫌은 세밀하지도, 대칭과 크기도 어설픈 보살입상은 그래서 더 정감이 가고 온기가 느껴진다. 사뭇 살아움직이는 듯하다. 입상바위 뒤엔 돌탑의 세상이다.
아니 아픔을 고역으로 극복해 낸 참회의 기록 - 어떤 노인의 형설의 돌탑 쌓기가 선경(禪境)에 이르게 한 구도의 자리다.
-오형탑-
노인한테 어느 날 갑자기 떠안겨진 다섯 살짜리 손주는 뇌병변장애아였다. 운명의 피붙이려니 여겨 정성껏 돌보며 살던 노인은 손주 형석이를 한글이라도 깨우치고 싶어 열 살 때 입학시킨다.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손자를 등에 업고 학교에 가길 딱 한 번, 패혈증까지 앓게 된 형석이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비통함을 가슴에 묻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손자의 영혼을 천도하며 가슴앓이를 벗어나려 탑을 쌓기 시작했다.
불행한 자식, 그 자식이 안겨준 장애손자는 어쩌면 자신이 전생에 얻은 업보라 여겨 참회의 기도를 해야했다. 금오산에 참회의 돌 하나씩을 올려 쌓았다. 그 지난한 작업은 잠시도 쉼 없이 행해져 수행의 길이 됐고, 평정심에 이르는 위안길이기도 했다.
탑 쌓기 십여 년은 간절한 기도와 비원을 수놓은 구도자의 길이기도 했다. 나는 2년 전 8월에 그 노인을 약사암에서 우연찮게 조우 이 비원의 전당까지 동행하며 그 한의 세월을 얘기 들었던 것이다.
참으로 인자하고 맑고 고운인상의 도인(道人)이었다.
오형탑은 금오산의 ‘오’와 형석의 ‘형’자를 한자씩 차용해 지은 이름이다.
오형탑서 노인을 그려보다가 노인과 기념사진 한 컷 찍었던 그 돌탑을 배회했다. 비쩍 마른 단아한 체구는 건강을 담보한다. 노인은 지금도 심신이 강녕하실 게다.
바람 싸한 오형탑을 아니, 선인 같았던 노인의 체취를 뒤로하고 대혜폭포를 향한다. 미끌미끌한 돌너덜길은 여간 급살 맞다.
-오형탑 밑의 고드름폭포-
미아 된 구름 한 떼가 골짝에서 우왕좌왕하는데 오형탑아래 단애에 고드름폭포가 생겼다. 형석이의 눈물일까? 노인의 한숨이 어린 걸까? 아님 광화문에서 엊밤을 새운 군종들의 외침이 예까지 밀려와 서린 걸까?
한참을 하강하니 대혜폭포다. 말이 폭포지 찌질찌질 오줌저리 듯 시늉만 내고 있다. 그 여름의 기세는 어찌 했을꼬?
-시늉뿐인 대혜폭포-
대해폭포를 가로질러 도선굴을 찾는다. 천길바위벼랑을 쇠사슬에 의지하며 더듬는 곡예 같은 위험길이다. L과 나 이외에 이 길을 더듬는 인기척도 없다. 도선국사는 수없이 이 벼랑을 왕래했을 터다. 선사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을 포갠다.
밑은 운해고 위는 바위칼날에 절단 난 하늘이다. 이윽고 까만 도선굴이 아가릴 벌리고 우릴 삼킨다.
-도선굴 가는 벼랑길-
높이 22척, 넓이24척,길이25척의 꾀 넓은 굴엔 촛불이 켜진 제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치워졌다. 화재땜일 것이다.
굴속에서 보는 세상은 한 뼘의 파란 하늘이다.
구미시가지는 운해속으로 가라앉혔고 바위칼날에 상처 난 하늘의 눈물방울도 마른 – 세류폭포도 흔적만 남아있다.
-도선굴에서 본 바깥세상-
그나저나 궁금한 건 도선선사는 어찌 여기에 굴이 있단 걸 알고 선정에 들었을까? 인 것이다. 여긴 약사여래소식도 없다. 굶기를 밥먹듯 했을 테다.
천길 단애 아래에 해운사가 안무 속에 흐른다. 두 발을 담벼락 밖에 내놓은 해운각을 통해 해운사에 들었다.
-도선굴 옆 세류폭포-
안개가 너울춤을 추고 있다. 안무는 사찰 밖의 붉은 단풍나무를 칭칭 감아 돌아 만추의 눈물을 한 방울씩 짜내는 거였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찬 기운에 시껌댕탱한 단풍이파리가 애처롭다.
축 늘어진 단풍나무의 만추의 눈물풍정은 너무나 아름다워 체감으로만 말할 수가 있을 것 같다.
-해운각 앞 단풍-
아름다움이란 것은 미처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눈물짓는 만추의 풍정 속에 촉촉이 젓은 돌탑들 사이로 형석이 할아버지-노인이 다가선다.
자기의 잘 못이라곤 불쌍한 형석이를 거둔 죄(?)밖엔 없는데도 모든 걸 내려놓고 참회의 기도를 올렸던 것은 왜였을가?
손자의 불행은 자신의 업보라 여겼다. 불행한 영혼을 구원받고 자기의 업보를 구제받기 위해서였다. 욕심을 진정으로 내려놓을 때 구원의 길이 열린다.
자기의 잘못으로 온 나라가 불행한데도 오만방자 떠는 박근혜의 죄는 값싼 인정에 눈 먼 우리들의 업보다.
어쩌자고 멍텅구리한테 우리의 운명을 맡겼을꼬?
-해운사 앞의 만추-
일찍이 박근혜를 ‘칠푼이’이라고 경고 했던 YS의 선견지명을 명심했어야 했다. 금오산입구엔 야은 길재선생의 추모비가 있다. 두 임금을 뫼실 수 없다고 낙향한 선생이었다.
두 부녀대통령을 뫼시며 나라보다는 일신의 영달만을 꾀하느라 온갖 권모술수를 자행한 왕실장도 금오산엘 와야 한다.
-금호호텔 앞 만추-
여기서 야은선생과 노인의 삶을 채받아야 구원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금오산은 참으로 아름다운 산이다. 아름다운 역사의 넋들이 골짝마다 숨 쉬고 있어서다.
한 번 찾은 산은 가급적이면 피하는(가고픈 산이 하 많아서) 편인데 오늘 나는 금오산을 2년 만에 다시 찾았다.
아름다운 영혼들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해운사 삼성각의 만추-
동행이 있단 건 안도의 산행을 기할 수가 있다. 오늘 L이 나를 잘 지켜줘 넘 고마웠다.
“오늘 산행 좋았소?” 라고 내가 물었다.
“아뇨, 재미없었어요.”라고 의외의 대답을 하는 L이었다. 까닭은 해찰 많은 나를 지키느라 한참도 ‘빡쎈 산행’을 못했다는 거였다.
산행은 때론 땀을 쫘~악 쏟아내기도 해야 홀가분해지는 데 말이다.
'젊으니까 그렇지, 넘 무리하면 되려 망친다,'고 말하려다 삼켰다. 금호호텔 앞의 소나무숲길은 만추의 낭만에 흠뻑 젓게 했다.
우린 빤히 마주보며 웃었다. 우릴 금오산에 대려다 준 백호산악회에 감사드린다.
2016. 11. 27
-대혜문-
-법성사입구 & 경내-
-햄버거-
-소나무와 박달나무의 연리목-
-약사암의 운해-
-현월봉서 조망한 운해 속을 섬을 잇는 종각과 구름다리-
-마애입상 길목의 석간수정이 있는 단애-
-오형탑의 동물농장-
-석수-
-도선굴 입구-
-도선굴 아래 해운사의 원경-
-도선굴 오르는 바위벼랑길-
-해운사-
-금오산성-
-김천휴게소의 서설-
-2014. 8월 오형탑에서 노인과의 기념사진-
<가슴에 묻은 새끼, 비원의 탑골에 - 금오산 (2016/8월)>편
산행기를 pepuppy.tistory.com/486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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