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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가슴에 묻은 새끼, 비원의 탑골에 - 금오산

가슴에 묻은 새끼, 비원의 탑골에 - 금오산

 

일본열도를 관통하는 태풍할롱의 영향권에 든다는 영남내륙이 금오산도 예왼 아니겠지? 하는 염려는 기우였던가.   오전 10시를 막 넘긴 금오산들머린 한껏 짙푸르고 촉촉했다. 넘 많아 간들간들해 보이는 홍송 떼들이 회색구름을 잔뜩 이고 마중을 나왔다. 좌측 골에선 물살이 바윌 뛰 넘어 골짝을 달리느라고 아우성이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고   읊은 야은(길재)선생의 <회고가>를 새긴 시비가 채미정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하늘 아래 두 임금을 뫼실 수 없다고, 이곳에 낙향한 올곧은 선비는 오늘도 우리 가슴을 먹먹케 한다.

독재를 옹호찬양하며 지역분열을 부채질해 벼슬을 탐닉한 기춘이는, 독재의 딸에 빌붙어 인사를 망친다고 삿대질해도 모른 척 자리보전에 혈안이다. 채미정에 한 번 들었음 싶다.

 

 빼곡이 찬 홍송들 속에서 매미가 열창을 하고 골짝에선 물길 난타가 일상을 털어내게 한다. 돌탑의 금오산이 아니랄까봐 육중한 돌탑도 마중대열에 나섰다.

중종 때의 명필 고산 황기로의 금오동학(金吾洞壑)’이 물기 머금고 닳고 닳은 오석에서 선명치를 않다. 몇 걸음 오르니 금오산외성 대혜문이 버티고 서서 왜적 아닌 산님들을 꾸역꾸역 맞아들이고 있다.

 

 

자연석 돌계단을 밟으며 훈습한 열기에 흘린 땀을 씻느라 잠시 머뭇대면 울창한 푸나무 속에서 매미는 목청 돋우며 열창을 한다.

옆 골짝에선 바윌 돌며 흥얼대던 물살도 개거품 내며 악바리 소릴 내지른다. 그 소란이 시끄럽질 않다. 자연의 교향악이 싫을 리가 없다.

해운사가 비탈에 두 발을 늘어뜨리고 산님들을 맞고 있다. 교향악 연주 속에-.

 

 

이 자연의 합창을 들은지 일 년도 넘었지 싶다. 금오산골의 교향악이 이리 웅혼할 진데 오늘 금오 심산에 기대하는바 가슴 뛴다.

우측으로 방향을 튼다. 거대한 바위들이 자웅을 겨루며 앞을 가로막았다.

깎아지른 바위벼랑을 누군가 쇳줄을 걸쳐놨고, 산님들은 그 쇠줄에 몸 맡겨 단애를 휘돈다.

 

 

 바위벼랑을 한참 휘돌아 나아가면 꽤 큰 굴이 나타난다. 도선굴이라.

대체 스님은 여기에 이 만한굴이 있단 걸 어찌 알고, 어떻게 왔으며, 어떻게 목 구명 풀칠하며 구도에 들어 득도를 했을까?

수직 낭떠러지 아랜 가늠이 안 되는데 저만치 숲 속에 해운사가 한 폭의 그림이 됐다.

 

 

솟은 바위벼랑에 눈길을 실어 하늘을 향한다. 바위산은 그대로 하늘을 절반으로 갈라놨다. 하늘아래 바위의 세계!

 아랜 천길 벼랑, 위는 단애가 하늘을 반쪽으로 갈라 쑤셔 박아버렸다. 단애 한 중간쯤, 하늘과 지상의 허공에 매달린 채 곡예 하듯 나는 드뎌 도선굴에 매달렸다.

 

 

높이 22, 넓이24, 길이25척이라는 굴은 꽤 크다. 누군가 촛불 밝혀 놓은 굴에서 조망하는 구미시가지는 전원 속의 한가한 도회다.

위로 단애 벽을 쳐다본다. 바위송곳에 찔린 하늘이 아파 설까? 눈물 찔금 흘리고, 그 눈물은 바위벽에 부셔져 이슬로 흩날리니 세류폭포라!

 

 

다시 바위벼랑을 탄다. 얼마쯤 바위벽을 타고 내려왔을까? 우뢰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하늘을 쑤셔 박은 바위산은 하늘샘을 쑤셨던지 물 폭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높이 28m의 대혜폭포란다. 아직까지 일상의 잡념에서 헤어나질 못 했담 예서 말끔히 씻으라는 듯 폭포는 산님들께 물세례를 퍼붓고 있었다.

 

 

시간이 있음 한나절을 물 폭탄에 나를 날려버리고 싶다. 얼마나 망가지고 뭣이 남을런지? 금오정상을 향한다.

오르고 올라도 계단은 이어진다. 징글맞게 가파르기까지 하다. 멀리 태풍할롱이 지나간 탓에 헐떡길을 그나마 덜 헐떡거린다.

 

 

오후 1시쯤에 정상에 섰다. 976.6m의 바위정상 현월봉은 거대한 송신철탑에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개발독재의 유산이 명산금오를 깔아뭉개 달빛봉우릴 망가뜨린 거였다. 지금 같아선 그 흉물은 딴 곳 아님 근방을 지났을 테다.

 

 

점심을 먹고 약사암을 향한다. 거대한 바위협곡을 가파르게 내려가면, 바위산을 병풍삼아 약사전과 삼성각이 거칠 것 없는 허공에 떠 있다.

미치고 환장할 조망이라. 허공에 매단 다리 끝에 종각이라니! 지금도 범종은 울리는가?

 

 

의상대사는 이 천하명당에 반해 그대로 선경에 드니 선녀가 내려와 한 끼의 주먹밥을 주고, 굶어죽을까 봐 약사여래가 내려와 본격 시중을 드니 스님은 성불할 수 있었을 테다. 하여 약사전이라.

허공의 다리엔 자물쇠를 걸어 놨다. 다리 밑 해우소를 찾아 볼일 보고 난후 나는 치매에 걸렸다.

 

 

마애보살입상도 여기서 직진한다는 걸 깜박했던 것이다. 마애보살을 망각했기에 오형탑 가는 길도 찾질 못한 건 당연지사였다.

오형탑 가는 길을 산님에게 묻고 물어 (엉터리들 이였다)다시 현월봉으로 되짚어 오르다가, 정상 밑에서 어떤 노인을 조우했다.

 

 

노인은 오형탑 가는 길을 설명하다가 자기도 거길 가는 참이니 동행하잔다. 어찌나 반갑던지! 뒤에 바짝 붙어 다시 약사전으로 내려온다.

아까 해우소를 찾아갈 때 본 이정표에 마애여래상 방향이 표시 됐었는데 보이질 안했었다. 해우소 뒷길로 나가면 될 길을 못 알아채고 헤맨 거였다.

 

 

노인이 줄곧 선도를 하고 리가 뒤따르고, 난 그녀 뒤를 좇다 해찰을 하곤 한다. 리는 오늘 요상스럽게도 동행이 됐다.

홀로산행을 즐기는 내가, 무릎 아프단 리를 외면하기 뭣해 신사인 척 한 게 그리 됐다. 심산은 묘하게시리 사람맘을 푸근하게 보듬는다. 리도 그랬지 싶다.

 

 

금오산 칠부 허리쯤의 숲길은 촉촉이 습한데다 울울창창한 활엽수가 바위병풍에 휘둘려 졸고 있다. 무덥다. 벼랑바윈 이따금 석간수를 짜내고 있어 태곳적 원시 숲을 연상케 했다.

노인은 석간수며 이무기바위 골을 가르켜주며 앞서다가 멈추길 몇 번 했던가. 석간수는 시원하고 어느 샘은 멱 감음만큼 크다

 

 

숲 뒤로 거대한 바위 셋이 어깨를 대고 압도해 온다. 바위 하나는 각을 이뤄 돌출했는데 그 각 모서리에 보살의 중심을 두고 양분 된 입상이라.

머리엔 보관(寶冠)을 쓰고 반라의 상체 어깨에서부터 가슴 위로, 다시 발등까지 흐른 옷 주름은 미풍이라도 불면 곧장 나붓길 것만 같았다. 금새 비천할 것만 같다.

 

 

이 높은 곳의 마애음각상이 이렇게 선연할 수 있음은, 북벽의 바위병풍과 앞의 울창한 숲이 풍우를 커버해 준 땜이려니.

대단히 크고 유려한 (높이 5.5m 보물490)마애입상이었다.

 

 

근데 마애상보다 나를 놀래 키고 감격케 한 일은 거기서 마주친 일단의 산님들이 그 노인을 소개해 주면서다. (산님들은 구미에 살고 계셔서 이 유명한 노인을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이 오형탑 쌓은 주인공이시란다. 난 그제야 노인을 똑바로 쳐다봤다. 인상이 곱다.

 

 

깡마른 체구에 하얀 얼굴엔 미소를 띄고 있어 해맑음 속에 그윽한 인자함이 풍기는 거였다. 참으로 겸손하고 자상하실 것 같았다.

십여 년간 그 높은 산정에 돌멩이를 지고와 탑을 쌓느라 그을리고, 굵은 주름 하 많이 잡혔으리라고 유추했던 나의 상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보다는 여기서 노인을 뵙게 될 줄을 꿈엔들 생각이나 했었던가?  여기서 비로써 안 사실이지만 이 비원의 탑에 얽힌 사연은 '세상에 이런일이' 란 프로로 티브이에 방영 됐었단다.

한참을 숲길을 헤치던 노인은 이윽고 자신의 비원(悲願)의 전당, 기도(祈禱)의 바위마당, 선정(禪定)의 탑골에 우릴 초대(?)함 이였다.

 

 

수많은 돌탑들은 각기 뜻하는바 형상을 담고, 한켠에 숲을 이룬 돌탑은 동물농장을 창조했다. 아마 어린애들이 좋아하는, 그래 생전의 손주가 좋아했을 동물들의 생각이 간절함이었을 땜이리라.

노인의 손주 이름은 형석이었다. 손주는 태어나면서부터 뇌병변 장애아였다.

 

                                  -  비원의 오형탑전당에서, 왼편이 노인 -

 아들(손주 아빠)이 생계 탓에 형석이를 노인께 맡기면서 노인과 손자의 기구한 연민의 삶은 형석이가 열 살 될 때까지 계속됐다.

걷지도 말하지도 못한 손자, 가까스로 초등교엘 입학시켜 단 하루 학교생활을 했던 형석이, 그런 손자가 패혈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

 

 

노인은 불쌍한 손자가 너무 안타까워서, 저 세상에서라도 좋은 몸으로 태어나라고,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는 형석일 갑자기 보냄은 자기의 정성부족 탓일까 싶기도 하여, 속죄하는 마음과 애통함 잊으려고 쌓기 시작한 탑이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비원의 기도로 일군 사랑의 탑은 노인을 선인(仙人)의 반려에 오르게 했을 성 싶었다. 맑고 그윽한 형형한 혜안이 그리 말해 주고 있었다.

 

 

피붙일, 손자를 가슴에 묻은 노인은 그렇게 속죄하고, 비원을 기도하며 십여 년을 돌탑 쌓기로 평안을 얻었는지 모른다. 노인과 사진 몇 컷을 찍고 시간 없어 하산했다.

문득,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다시는 불행한 아이들이 없기를 바라는 비원으로 단식중인 세월호유가족들 생각이 떠올랐다.

 

 

얼굴이 띵띵불어 내 아이 얼굴도 알아볼 수 없으면 평생 못 산다. 조금이라도 멀쩡할 때 꺼내줘라. 딱 한 번만이라도 내 새끼 품어주고 보내야지. 엄마가 어떻게 그냥 보내.”

세월호에 승선했다 실종된 아이, 어느 엄마의 애원을 옮겨봤다. 접때 나는 이 통한을 읽으며 가슴이 미어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새끼를 가슴에 묻지 않고선 그 아픔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다. 형석이 할아버지처럼 미쳐서 돌탑 쌓기라도 하지 않고선 밥도 목에 걸려 넘기질 못할 게다.

금오산과 형석이 이름에서 한자씩을 떼어 오형탑으로,   금오산 바위 골에 비원의 전당으로 수놓은 사랑의 위대함을 생각해 봤다.

 

 

오늘 오형탑을 보러 나선 산행은 뜻밖의 행운이 따른 거였다. 무릎 불편했을 리를 쬠 챙기려다 시간 흘러 지채돼고, 그 늦음의 시각이 형석이 할아버지를 해후할 기횔 줬기에 행운은 리가 가져다 줬다고 생각해 봤다.

대혜폭포엘 왔을 땐 이슬비가 흩뿌렸는데 해운사에 이르러선 굵어진 빗발, 채미정에선 소나기로 변했다.

 

 

 산행피날레를 소나기 속을 헤치며 흠뻑 마음도 몸도 젖어본다는 정취도 각별했다. 리와 내가 일행에 합류한 시각은 네 시쯤 이였다. 미안했다.

 허나 뿌듯한 산행 이였다. 처음으로 마주한 대호회장도 호방하고 자리이타를 앞세우는 분 같아 대호의 밝은 전도가 훤히 보이는 거였다.

미쁨 가는 분을 알게 됐다는 점도 흡족했다.

어른들 믿고  맘껏 활개 칠 밝은 세상이 하루빨리 어린이들 앞에 펼쳐졌음 하는 바램을 집을 향한 차창에 그려봤다. 

2014. 08. 10

 

 

 

                                         - 명필, 황기노의 '금오동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