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새 숲에서의 스와핑 (화왕산) ★
만추의 억새 품에 안겨보려고 아침7시에 출발한 우린 11:30분이 되서야 화왕산 나들목인 창녕여중 앞에 닿을 수 있었다.
나들목 입구 길가에 늘어놓은 좌판에서 팔고 있는 과일들만 아니었다면 산 정상까지의 한 시간 반 동안의 산행엔 가을이 없었다. 울창한 소나무들만이 그의 푸른 침엽으로 파란 하늘을 가리고 있어 어디서 묻혀 왔을 퇴락한 낙엽 몇 잎만 아니라면 갈 냄새조차 맡기도 어려웠으리라. 급경사를 이룬 한 시간여의 소나무 숲길은 억새를 찾는 이들의 발길로 지표가 헐벗겨져 뽀오얀 먼지를 일구고, 소나무들은 묵묵히 그 먼지들을 빨아들여 정화시키느라 싸한 입김만 뿜어대고 있었다. 억새탐방객들의 꽁무니에 꽁무니를 물고 늘어진 인파에 끼여 헐떡거리다보니 마침내 화왕산 정상(756.6m)에 올랐다.
억새는, 억새밭은, 억새의 세계는 거기서부터 펼쳐지고 있었다. 맞은편 구릉을 건너 산등성이를 향한 억새들은 가을햇빛을 토하면서 바람을 이고 60여만 평을 은빛파도를 일구며 있었다.
우린 허기진 배 땜에 정상턱밑 억새 숲 가장자리에 기갈을 해소 하려고 비닐방석을 깔았다. 난 빵 몇 조각(롤케익1쪽, 카스테라2쪽. 마가랫트3개)에 두유2개와 캔 깨죽1개를 꺼내 허기진 목구멍에 그것들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때 억새 숲 어디에서 왔는지 가-ㄹ여인이 나타나 내 옆에 비닐보자기를 펴고 앉는다. 그리곤 배와 단감 몇 개를 꺼내 껍질을 벗기고는 살점 한 조각을 내게 주는 게 아닌가!
“빵만 먹으려면 팍팍하잖아요?” 나의 점심 메뉴가 영 어설펐던 모양이었다.
“아, 예. 괜찮습니다.”그 말이 가-ㄹ여인 귀에 체 닿기도 전에 “감사합니다.”라고 말 한마디를 더 보태고는 배 한 조각을 물고 있었다. 나는 몇 조각을 더 얻어먹다 염치가 없어 스무고개 같은 선문답 몇 마디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마주보고 있던 아주머님께서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 내게 준다.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드리고 어쭙잖게 받아 입속에 반쯤 넣고 나머지 반 컵을 가-ㄹ여인에게 건냈다. 그녀도 사양 않고 들이키고 있었다. 그녀는 대구에 살고 홀로산행을 하고 있단다. 그런데 또 옆의 leegj님(아이디와 이름을 한참후인 허균 세트장쯤에서 알았다)이 나를 부른다. “강선생님, 술 한 잔 하시지요?” 라며 주는 스텐레스 술잔은 참으로 앙증맞게 작아서 장난감 같았다. 더구나 하고많은 호칭 중에 ‘선생’이란 말을 씀에 음칠 했지만 반가이 “아, 예. 아이구...” 어물쩍 잔을 받고 그가 따르는 술을 입에 대려는데 향기가 범상찮다.
“이게 무슨 술입니까?”
“꼬냑입니다.” 화왕산 억새 숲에서 꼬냑을 입에 댈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었던가!?
진한 향이 나의 코끝을 후비곤 억새 숲으로 번져 파도를 탄다. 그 꼬냑도 반은 가-ㄹ여인에게 건냈다. 그때 누군가가
“같이 오셨시유?” 라고 불심검문하듯 묻는다. 필시 내겐 동행이 없었다는 점을 알고 있어 던진 질문일 터였다.
"아~ 예. 친구예요.” 나도 모르게 불쑥 나온, 하지만 기어드는 대답-. 근데, 또 옆의 누가 “부부간이예요?” 라고 생뚱맞게 물어 오질 않는가?
나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노코멘트에 leegj님 짝궁이“두 분 엄청 닮았다.”고 북장단을 쳤다.
“그래요, 닮을 수밖에~ 부분 닮아간~~~” 뒷소리는 모기소리가 되다 이내 내 목구멍 속으로 자지러들고 말았다. 나는 그녀에게 역습을 시도했다.
“두 분은 부부시지요?” 나의 확인을 요하는 우문에
“예, 맞는데- 반품처리 하려고 해요.”그녀는 웃으며 leegj님을 보면서 허를 찌르는 농을 해 오는 게 아닌가?
“그래요. 그것보다는 우리 차라리 스와핑 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난 능청을 떨며 한손으론 가-ㄹ여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leegj님 커풀은 동시에 왈, “좋지요.”한다. 모두가 파안대소, 웃음의 파장은 다시 억새에게 전해져 은빛파도를 타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것저것 털어서 나눠먹다 자리를 털었다. 가-ㄹ여인은 우리완 반대쪽 억새 숲으로 올 때처럼 홀연히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이 일렁이는 억새들의 춤사위 속으로 사라져갔었다. 억세게 기분 좋은 억새 숲의 점심시간 이였다.
그 헤프닝으로 하여 leegj님 커플과는 살가워져 같이 본격적으로 억새의 세계로 빠져보자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이때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 커플은 나의 낙서수준의 산행기를 ‘한국의 산하’에서 접하고 호감을 갖게 되였단다. 난 다소 부끄했지만 내 글을 좋은 감정으로 읽어주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 졌었다.
싸한 바람은 잠시도 억새들을 가만히 놔두질 않고 은빛파도를 일구며 능선을 향해 줄달음질 치고 있었다. 억새 숲에 앉는다. 흰머리 나풀대는 긴 모가지께 에서와는 달리 그의 품안은 지극히 안온하였다. 어쩌다 그의 긴 목을 타고 내려온 바람은 미풍이 되어 속삭이고 어쩜 자장가가 되기도 하였다. 해서 온갖 새들과 동물들이 그의 품안에 둥지를 틀고 살림을 차린다. 억새는 그들의 생존의 터울이요 공존과 소통의 파라다이스인 셈이다.
만남과 소통을 생각해 본다. 억새와 갈여인과 leegj님의 커플과 그리고 다른 분들과의 오늘의 만남과 소통은 곧 우리들의 삶의 일부분이라.
삶이란 곧 무수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의 연속선상이고 소통의 역사이며 그 결과의 흔적일터이리라. 하여 만남에선 예의와 친절과 아량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야 함일 것이다.
오늘 우리가 격의 없는 소통을 하게 됨은 ‘산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공통된 지향점이 있기에 더욱 가능해 졌을 것 같음이다.
산(자연)은 순수하다. 억새도 너무 순수하여 새와 짐승을 포용하고 또 그들에게 떠날 때를 알려주며
자기도 사라질 때를 알고 치밀하게 준비한다.
오늘처럼 흰 머리카락을 흩날리다 하얀 눈발이 내리게 되면 그들은 잠시 눈꽃의 세계를 이루고 그 눈으로 삐쩍마른 몸을 정갈히 씻고 기다린다. 마지막 날을, 스스로를 불태울 날을-.
어느 밤, 달님이 가장 가까이 다가올 때 화왕산 억새-그는 홀연히 몸을 태우고 재로 변해 땅으로 흡수되어 이듬해 태어날 후예들의 영양소가 됨을 한 번도 거슬리지 않는 삶이었다.
화왕산성 동문을 지나 ‘허준 세트장’에 닿았다. 우리나라가 배출한 걸출한 휴머니스트의 일생을 재현키 위한 장소로 이곳을 택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곳을 지나면서 요즘 메스컴을 도배질하는 유명정치꾼들을 떠올렸다. 비방과 폄하와 모략과 거짓과 술수로 날을 지새우는 네거티퍼들 말이다. 그들은 지금 이곳에 와서 억새와 허준의 일생을 반추해 보았음 싶었다.
억새 - 자연은 자기의 모든 걸 취할 때와 버릴 때를 알고 지체 없이 실천한다. 우리처럼 취하려 과욕하지 않는다. 아니 흔쾌히 버릴 줄을 안다. 그래서였을까. 이근배님은 노래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 죄다
아파하는 것 죄다
슬퍼하는 것 죄다
바람인 것 죄다
강물인 것 죄다
노을인 것 죄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 죄다
죄다 죄다 죄다
너는 버리고 있구나
흰머리 물들일 줄도 모르고 빈 하늘만 이고 서 있구나>-라고.
버림의 미학을 되뇌보면서 관룡산정을 거쳐 관룡사를 찾는 길로 하산한다. 거기에 서있는 헤아릴 수 없는 소나무들은 모두가 빼어난 자태로 관상목이 되 주고 있었다. 그 관상목들에 반하여 쉬엄쉬엄 하산하는데 산 허리께에 앞길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위에 커다란 석불좌상이 속세에서 날아온 때를 걸러 몸에 바르고, 저 멀리 바위벼랑에 그림처럼 붙어 있는 청룡암자에 안거할 스님의 구도를 지켜보고 있는 거였다.
급경사 악산 길을 두어 시간 헤매니 관룡사에 이른다. 사찰 옛 입구가 고찰에서만 볼 수 있는 풍광을 압축한다. 가파른 돌계단위에 돌담으로 아취를 만들어 새들 집처럼 지붕을 올려놨다. 그 지붕의 선은 옆의 늙은 호위수들의 나지들에 에워싸여 더욱 고담하였고, 그 뒤로 사찰의 추녀가 관룡산을 엎고 살며시 내다보고 있음이 산수화의 극치미라.
자연의 아름다움은 사람(거장)의 혼이 가미되면 더욱 빼어나지기도 한가보다. 그 날아갈 듯 아니 금새 쓰러질 것 같은 아취지붕 문을 뒤로하고 억새, 허균, 가-ㄹ여인, leegj님 커플을 생각하며 흐뭇한 억새세계로의 여행을 마무리한다.
어설픈 나를 안내하고 챙겨준 총무님께 말로나마 감사드린다.
07.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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