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위암병기(胃癌病記)
2010. 06. 09 (수, 맑음)
오전 9시 반쯤 지나 아내와 난 여느 때처럼 함라산 등산로를 걷고 있었다.
때 이른 폭염으로 조붓한 숲길은 더욱 청량하고 밤꽃 향은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의식 한 꺼풀을 더 벗겨내는 성싶었다. 부신 아침햇살은 싱그런 초록이파리 사이를 헤집고 들어 유령 같은 그림자를 배회하고 있다.
2년 전 아내가 요통수술 후 두어 시간의 산책로로 함라산이 최적의 장소라 여겨 이삼일 간격으로 찾는 산책은 우리부부의 일상의 한 궤적이 되다시피 했다.
오늘따라 걷는 아내의 발길은 여간 무거워 보이고 표정도 사색의 그늘이 짙게 베어있어 나는,
“당신, 아침 전화 땜에 그런 거여?” 라고 물었다.
“-----”
“염려할 것 없어. 보다시피 내가 뭘 어쨌는데-.”
“보호자를 데리고 오라 했다며?”
사실 나도 아침에 원대건강검진센터에서 걸려온 ‘오후 1시에 보호자를 데리고 와 주시기 바란다.’는 전화를 받고 종잡기 어려운 의구심과 약간의 불쾌감을 털지 못한 채였다.
그러니까 6월3일에 받은 종합검진 결과를 통보하기 전 병원의 배려였을 태지만 나의 건강에 대해선 어느 면보다 자신감에 차 있는 내게 ‘보호자’운운하는 건 넌센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건강한 사람이 무슨 보호자가 필요합니까?’ 라고 되받은 나였다.
그래도 한사코 보호자를 동반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저쪽 이였다.
난 가볍게 생각했다. 오후 1시에 나 혼자 찾아갈 심산 이였다.
이미 아까의 전화통화는 까뭉갠 채 숲의 신선한 공기를 포식하느라 심호흡에, 상쾌함에 달떠 있었는데 아내는 완전히 풀 죽어 저기압상태로 뒤처져 따라오는 거였다.
‘보호자 동반’은 아내에겐 풀 수 없는 무거운 족쇄로 온 신경을 옥죄고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난 중2년 때 급성장염으로 한나절 병원신세를 진후론 지금까지 잔병근처도 가본일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보호자’운운이 뭘 뜻하는지도 몰랐고, 더는 알 필요도 없는, 건강에 대한 자만심이 그런 걸 용납하고 싶질 않는 나였다.
오후 1시,
아내와 난 원광대 건강검진센터에 들어섰다. 안내양에게 방문목적을 알리자 옆 사무실에서 간호사 한분이 나를 마치 구면인양 알아보고 안내를 한다.
이내 여의사가 불려오고, 그 여의사는 나를 집무실로 안내하면서 한참을 빤히 쳐다보더니만 “너무 젊으시네!”라고 엉뚱한 뚱딴지소릴 뱉는 거였다.
난 평소 ‘젊다’는 소리를 뭣하면 쓰는 인사치례의 소리로 듣고 있었는데 안정을 기하기 위해 녹차 한 잔을 권하고 싶다는 말을 보태는 여의사를 정색으로 탐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젊으시니까 (아내와) 같은 자리에서 얘기를 하지요”라고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그녀는 책상 위의 모니터화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화면엔 둥그런 위(胃) 어느 부위 세 군데에 종기처럼 약간 부어올라 선홍색을 띠고 있었는데 그것이 조기 위암일 것 같다는 소견을 피력하며 보다 확실한 진단을 위해 소화기내과에서 정밀한 검사를 하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오늘 중이라도 빨리 서둘라고, 대학병원소화기내과 유명의사님께 소개를 하겠단다. 난 대답을 하면서도 실감이 나질 안했다.
다급하게 최촉하는 여의사완 달리 난 덤덤했다. 무시하고 싶었다. 그래 시니컬한 웃음을 지었다. 아내의 얼굴엔 핏기가 싹 증발이라도 했던지 하얗다. 울음 섞인 볼멘소리로 뭔가를 묻고 있었다. 여의사가 써 준 메모지를 들고 대학병원소화과로 향하고 있는 우리부부였다.
허나 대학병원을 향하던 우린 생각을 정리하자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풀죽은 아내를 나는 쫓다시피 하여 물리치료를 받고 오라고 내몰아쳤다. 아까 집을 나설 때 센터를 들린 후에 아내의 무릎통증치료를 위한 물리치료를 받자고 했었던 참 이였다.
내 위암이란 게 오늘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기에 한사코 마다하는 아내에게 무릎치료를 받고 오라고 쫓았던 거다. 아내는 마지못해 사지(死地)를 향하듯 발걸음이 무거워보였고 난 그런 아내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오후의 햇볕은 따가웠다. 집을 향하면서 생각을 추슬렀다. 수술을 할 바엔 서울 유명 위암병원을 찾자는 생각으로 애들에게 전화질을 시도했다. 막내가 맨 먼저 통화가 됐다.
빨리 위암전문병원을 물색해 보라고 일렀다. 한 참후 막내가 자기친구가 아산병원에 근무하고 있어서 알아보라고 했다며 그가 직접 전화를 할 거란다.
반시간이 흘렀을까? 아산병원에 근무하는 막내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월요일(14일)에 진찰예약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여기병원에서 발급한 ‘소견서’와 ‘검사결과기록사본’을 팩스로 곧장 보내주고 CD와 슬라이드 필름은 월요일에 지참하고 오란다.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도중에 아내를 만나 소정의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고 오후4시쯤에 팩스로 서류를 보냈다.
이 무슨 날벼락에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건가?
내 병을 남의 병 인양 얼떨떨한 기분이 돼 남의 일 하듯 덤덤하게 활보하는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평상의 자만심과 낙천적인 성격의 일단일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나를 아내는 이해 할 수가 없다는 투다. 내게서 일말의 초조, 불안의 기색을 감지하지 못하는, 평상적인 아니 뭐가 그리 당당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내는 ‘쓸개가 없는 사람’ 같단다. 아내는 장탄식을 하며 나를 힐난한다.
까닭은 08년 12월말에 종합검진을 받았었는데 그때 센터에서 소화기내과를 한 번 찾아가 상담을 해보라고 전화통보를 해줬었고, 그걸 무시한 내게 아내는 못마땅해 하며 병원에 갈 것은 누차 권유했던 바였다. 아내의 원망은 그런 나를 향하다말고 강권하여 병원에 끌고(?)가는 걸 고집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그렇다. 작년 초에 병원엘 갔었음 조그만 염증치료로 끝낼 수가 있었을 테다. 그 염증이 1년 반 동안에 암으로 발전한 게 틀림없음이다.
건강에 대한 지나친 자만심이, 의사의 말을 우습게 여긴 오만의 자초지종이겠다.
정작 나보단 아내가 죽을상호가 됐다. 밤에 아내는 정읍누나에게 전화를 한다. 건강만큼은 걱정 붙들어 맨 우리부부는 누구한테 이 얘기를 하기도 남세스럽다고 속으로 삭히고 있는데 아내의 답답함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가보다. 가장 흉허물 없이살아 온 누나에게라도 이 황당한 현실을 실토하지 않곤 도저히 밤을 새울 수가 없었던 아내였을 테다.
밤10시를 넘겨 싱가폴에 주재하는 성훈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산병원보단 삼성병원에서 치료를 받자는 거다. 그래 친구를 통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란다. 다시 잠시 후에 둘째가 삼성병원에 이민우가 있으니 그쪽으로 하자는 거였다. 민우는 둘째와 절친 사이로 우리집도 몇 차례 방문했던 서울대의대 출신이다. 어찌 삼성병원을 택하지 않겠는가.
한결 안도감이 들었다. 낼 ‘소견서’와 ‘검사결과사본’을 팩스로 보내기로 했다.
2010. 06 10 (목, 맑음)
둘째가 이민우교수(성대 출강 중)와 접선을 해 서류를 보냈고, 그의 주선으로 15일 오전 8시50분에 위암전문의 이준행교수의 진료를 받기로 예약을 했단다.
이제 내가 위암환자란 사실을 인정하니 뭔가 할일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나 하는 갖가지 상념이 평상심을 흔들고 있었다. 더불어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할 텐데 하는 조바심이 엄습해오는 거였다. 그리고 위암에 대해 인터넷서핑을 해보았다.
우리나라 암 중, 특히 남자에겐 가장 많이 발생하는, 완치율도 80%를 넘는, 근데 대게 위를 절게 해야 한다는 거다.
정읍누나가 오셨다. 누나의 아픔이 얼마큼인지를 가늠한다. 피붙이 중에서도 가장 밀접했던 그래 양가의 흉허물들을 속속들이 넘 잘 알고 있는 바다. 그 누나가 내가 중2때 급성장염으로 학우들 등에 업혀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어찌 알고 광주까지의 먼 길을 금세 달려왔었다.
전화도 귀하고 교통도 불편한 당시에 말이다. 더구나 한나절 병원신셀 지고 퇴원했기에 어린 맘에도 무척 고맙고 미안했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다가왔다.
얼마나 상심과 걱정이 크실 텐가? 주·유·애리의 전화로 전화통이 불티가 났다. 그들도 엊밤 모였었단다. 성훈이가 1주간 휴가를 내어 14일 싱가폴을 출발한단다. 붙임성이 적고 원칙주의의자이자 고집 센 그래 좀 답답할 뿐이지 인정과 속 깊음은 누구 못잖은 실력파다.
그가 온다니 맘이 조금 가벼워진다. 애들은 지금 당장 상경하라고 독촉이다.
허나 내 집이 편하다. 될 수 있음 14일 당일 새벽에 상경하고 싶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2010. 06. 11 (금, 맑음)
아침식사 후 여느 때처럼 아내와 난 함라산을 찾았다. 짙은 초록 숲 터널 천장엔 조각난 하늘이 숨바꼭질하다 수 많은 푸른 호수를 만들고아침햇살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 아장거리는 안개를 쫓아내고 있다.
이 신선하고 몽롱한 숲의 세계가 오늘따라 유별나 보이는 까닭은 무슨 연율까?
방정맞은 생각이라 스스로 책망하면서도 문득 수술 후 언제쯤 이 싱그럽고 신비한 숲의 세계에 발 들여놓을 수 있을까하는 과민성을 어쩌질 못하고 있었다.
녹음의 신선함, 밤꽃을 비롯한 향기, 부신 햇살의 춤사위가 얼마나 보배스러운 것인가를 오늘 더 절감한다.
평상시엔 고마움을 모르던, 아니 간과해 버리곤 하는 일상 속에 다가서는 하찮은(?) 게 언젠간 고갈되거나 또는 접할 수 없는 고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야 그것들이 베푼 무상의 은전을 깨닫게 된다.
숲 속 산책길의 사유, 산악회를 따라 먼 거리의 유명산을 등정하는 통쾌한 맛은 언제쯤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위암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암으로 특히 남성암 중 1위(20.3%)로 사망률도 10만 명당21.3명으로 3위(통계청 사망원인 총 계보)였으나 의학의 발달로 사망률이 감소하고 있단다.
조기위암수술은 대게 2/3의 위 절제 수술을 하게 되는데, 합병증을 차단하고 수술후예를 좋게 하기 위해선 집도의(執刀醫)의 수술에 전적으로 달렸다 하겠다.
하여 좋은 시설과 훌륭한 명의를 만나야 함이다. 삼성병원은 그런 기대칠 충족시킬 거란 생각이 들었다.
2010. 06. 12. (토, 맑음)
어쩌다 새벽 서너 시에 잠을 깨면 잠 못 드는, 그래 눈만 감고 있음 뱃속에서 내는 부글부글 소리를 듣게 되고 그 소린 또 신경을 날 서게 하는 고역의 시간을 어제부터 인지하고 있어 여간 심난하다. 암세포가 지랄을 떠는가 하는 기우를 떨칠 수가 없다. 신경과민은 하등의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곱씹으면서도 말이다. 이러다 불면증까지 시달리게 되나?
밤, 8시 반에 시작한 남아공월드컵 B조 첫 경기인 우리나라와 그리스의 예선 한 판-.
전반 기성용의 프리킥을 이정수가, 후반 초엔 캡틴·박(지성)이 상대 볼을 가로채 수비수 2명과 골키퍼까지 재치고 골을 넣어 대한민국을 열광케 했다. 완승 이였다. 16강이 보이는 것 같다.
역대국가대표팀 중 가장 훌륭하고 또 경기도 시종 잘 풀어갔기에 흥분과 기쁨에 만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2시간 이였다. 나도 잡념을 떨치는 열광의 시간 이였다. 아내도 이 시간만큼은 축구에 몰입했다.
월드컵 태극전사들 파이팅~! ‘大~한민국!’ 짝짝짝.
2010. 06. 13 (일, 흐림)
내일 상경할 준비를 하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모레 담당의 이준행교수의 진찰결과가 급히 수술을 해야 할 상태라고 입원수속을 밟으라면 얼마나 병원생활을 할지 모르기에 이것저것 챙기다보니 시간을 좀먹을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상에서 읽은 위암수술에 대한 여러 정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압박해 오기도 한 시간 이였다.
더는 장마전선이 시작되면 집 관리는 어찌해야 함인가? 뾰쪽 수가 보이질 않는다.
덩치 큰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귀찮고 속 썩이는 시간이 많음을 익히 통감하고 있었지만 막상 얼마동안을 방치해야 할지를 모르니 집 가진 게 골치 아픈 부담거리일 뿐이다. 어떤 목적에서든 덩치 큰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건 기쁨보단 걱정거리가 더 많을 뿐인 것이다. 내 몸 하나 안식할 거라면 몇 평이면 족하고 그 몇 평의 공간도 소유가 아닌 영구임대주택이라면 보다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갖게 될 것이다. 고작 몇 십 년을 살고 갈 공간이 굳이 꼭 클 필요도, 소유할 필요도 없음이라.
많은 걸 소유함은 그만큼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감당케 된다는 사실을 몰라서 우리 모두는 큰 집을 소유하러 일생의 대부분을 소진시키고 있음일까?. 돈 땜이라면 나의 집이 인플레한만큼 다른 집도 마찬가지다, 돈액수만 커질 뿐이며 그 돈을 한 푼도 임종시 가져갈 수가 없다.
늙고 병들수록 주거공간은 작아야 되고 그것도 소유 아닌 임대여야 홀가분하고 여유로운 말년을 보낼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나그네일 뿐이다. 영원한 소유란 없음이다. 모든 걸 잠시 동안 빌려 쓰는 게다.
주택은 소유의 개념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쉼터란 관념으로 가치관을 바꿔야 함이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주택을 마련키 위해 생의 대부분의 지혜와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우(愚)에서 벗어나야 행복한 자유인이 되는 게 아닐까.
난 지금 위암판정을 받고 치료를 위해 떠나면서 집의 노예가 된 처지를 한숨 짓는다.
진즉 맘먹은 바지만 하루라도 빨리 집을 팔아치워야 한다.
2010. 06. 14 (월, 맑음)
오전 11시10분 발 성남행 우등고속에 나와 아내는 몸을 맡겼다. 인근에 첫째와 막내가 살고 있어서였다. 성남도 첫 버스길이지만, 애들이 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서울행은 줄곧 승용차만 이용하다 버스를 타니 그리 편안하고 쾌적하다. 차창에 스치는 풍광도 한결 여유롭게 맞아 즐길 수가 있고 간간히 눈을 감고 묵상에 빠쪄 좋았다.
새벽에 도착한 성훈이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단신 이국생활에도 살이 토실하게 붙어 있어 건강한 모습이라 좋았다.
자기집을 고집하는 그에게 막내집으로 갈 것을 고집했다. 모처럼 나온 휴가를 우리내외가 들어 좀이라도 방해하고 싶지를 아니해서였다.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도 효도를 다 함이다.
막내집에 여장을 풀었다. 전혀환자같지 않은 나를 맞는 애들의 표정은 긴장속에서 어찌해야할지를 몰라 나를 빤히 쳐다보다 눈길을 훔치는 허둥댐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우는 나의 서류를 접수하고 '초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누차 강조했다고 둘째가 알려왔다. 맘이 좀 진정됐다. 아내도 식구들 등살에 몹쓸 시름에서 벗어났던지 활발하다.
큰애가 연대의대 노성훈교수의<위암완치 설명서>란 책을 구해 준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하려면 책부터 찾고 책이 없음 구입하는 버릇은 여전한 애다.
노교수는 21세기 위암을 일컬어 환자는 암과공존하는 시기라고 갈파한다.
위암환자는 생의 고비에서 희망을 잃지않고 자신과의 투쟁에서 한걸음씩 치유의 계단을 올라서는, 예전엔 미쳐 몰랐던 참된 자신의 저력을 발견하고 삶의 기쁨을 깨닫게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암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삶과 공존하면서 극복해 가는 기쁨에 이르는 불청객 친구란 거다.
노교수는 책에서 암을 '정보 인식의 길' '치료의 길' '돌봄의 길' '예방의 길' 네 분야로 나눠 상술하고 있다.
책은 나의 위암극복에 좋은 멘토역할을 할 것 같았다.
2010. 06. 15 (화, 맑음)
성훈이의 안내로 삼성병원 암센터에 들어선 시각은 오전8시 반쯤 이였다, CD와 슬라이드필름을 접수시키고 예약진료 수속을 밟다보니 예진시간이 다 됐다.
위암센터 1층 로비 안내전광판 이준행교수의 예약환자 명단엔 내가 첫 환자였다.
8시50분 간호사의 부름을 받고 4번방으로 들어섰다. 외소하고 깡마른 이준행교수 앞에 앉았다. 미리 접수시킨 CD화면을 모니터 상에서 판독하시던 교수는 이제 초기인 듯싶으나 자세한 진단은 종합검진을 하고 결과를 본 후에 말할 수 있다는 거다.
하시면서 내과수술을 전담하는 자기보다 외과수술 전공인 손태성교수를 소개하며 시술을 받는 게 좋겠단다.
이교수가 손교수를 소개함은 혹 내 위암이 초기란 걸 의미함일까?
방사선 내지 로봇시술을 받아도 괜찮겠다는 소견으로 손교수께 소개한 것일까 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까닭이야 잘 모르겠으나 그렇게 긍정적으로 예단하고 싶었고 하여 나와 가족들은 조금은 안심을 하였다.
9시 시무 10분 전 나를 첫 환자로 끼워 진찰을 받게 함은 민우의 배려일 것이다. 어쨌거나 우린 고무됐었다.
CT촬영을 비롯한 종합검진을 하느라 몇 시간이 훌쩍 지났고 오후 2시 반엔 1번방에서 손태성교수의 진단을 받았다. 손교수 역시 오늘 받은 종합검진결과를 본 후에 보다 정확한 진단을 하겠다며 로봇수술보단 개복수술을 하잔다.
로봇수술은 시술이 간단하고 치료도 빨라 초기위암에 주로 시술을 하지만 아직은 검증된 확실한 데이터가 미흡하니, 후예가 좋고 완치를 위해선 개복수술이 훨씬 낫다는 설명을 했다.
개복수술을 하여야 세밀하게 관찰하고 보다 완벽한 시술을 기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런 모든 결론을 종합검사 결과를 보고 22일 오후 3시 40분에 다시 얘기하잔다.
손교수의 말인 즉 나의 병세는 초기는 지났다는 걸 의미함일 게다. 여간 자상하셨다.
민우를 만났다. 영상의학과학을 전공한 그는 삼성병원과 성대의대에 출강하며 훌륭한 의사선생이 돼 있었다.
그는 나의 집에도 몇 차례 내왕 했었던 어쩜 한 가족이 되기 직전까지 유대를 쌓았었다. 힘든 의학도시절 그가 밤에 전화선을 통해 사랑의 고뇌를 털어놓던 일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때 그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던 나였다.
그런 그가 준수한 의사로 교수로 성장하여 오늘 우리에게 각별한 친절과 배려를 베풀고 있어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겠나! 말 할 수없이 고마웠다.
난 <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를 선물했고 책을 받아 든 그는 깜짝 놀라며 축하해 주었다.
내가 환자가 아닌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 살뜰한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 미안했다.
2010. 06. 18 (금, 흐림)
어제밤 8;30분에 치러진 남아월드컵 예선2차전에서 4;1로 완패한 씁쓸한 허전함이 마음 언저릴 떠나질 않던 하루였다. 박주영의 해딩패스를 이청용이 상대수비수를 따돌리고 골키퍼마져 재키고 찬 절묘한 슛팅은, 대굴대굴 굴러 골넷을 출렁이던 골이 흡사 슬로모션을 보는 것처럼 느리게 나의 초조함도 거둬가고 있었다. 동점고~올!
아니였다. 볼이 골포스트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식구 모두는 벌떡 일어나 난장판을 만들었다. 언제 집어 들었는지 애들의 장난감나팔까지 입에물고 난리를 쳐 부부젤란 저리가라였다. 우리보단 월등한 기량의 아르헨티나를 어떻게 할 순 없다는 자조감은 후반전이 흐를수록 더해가 집안 공기는 무거워졌었다. 어제밤 아파트단지내의 모든 아파트의 창은 불빛이 명멸하다 이내 무거운 침묵이 몰고 온 어둠 속에 묻혔었다.
그 동점골이 터지는 순간은 나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을 게다. 오직 있는 건 '우리들' 이였고 환성뿐 이였다.
퇴근한 민주가 (양재동에 있는 H자동차 기획실에 있어 통근길이 좀 멀다) 카풀 동료의 배꼽잡는 에피소드 하날 소개하여 저녁상은 웃음보따리 만찬이 됐다.
애주가인 민주의 카풀동료의 엊밤 에피소드.
- 저녁식사를 하다 단골인 치킨집에 전화를 한다. 허나 전화질을 아무리 해도, 거의 반시간정도 시도해도 상대방은 전활 받지 않고 신호음만 가는거였다. 허둥지둥 식살 끝낸 그는 화도 나고 궁금도 하여 치킨집으로 달렸는데 이 무슨 훼괴망측인가? 20여m나 눌어선 사람들의 선두는 그 치킨집에 목디밀고 있는 거다.
밀치고 안으로 치킨집안에 들어선 그는 "왜 전활 안받느냐?"고 항의를 했겄다.
주인장 왕, '닭이 없어서요."라고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며 얼굴도 안처다보았겠다.
화가 난 그는 "뭔 소리여? 닭이 없는데 밖의 손님들은 어떤 사람들이여?"라고 시비를 걸것 같이 쏘아대는데,
주인 왈, "주문은 오후 2시에 끝났어요. 닭이 없어 주문을 못받아 귀찮아서 전활 안받았어요. 저 손님들은 예약받은 소손님들이구요"
어이가 없었다. 그는 뛰처나와 인근의 e-마트로 내달렸다. 1층 식품코너의 술안주감 진열장도 썰렁하고 점원들은 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직 한 군데 떡집만 진열장 속에 갖가지 떡이 아직 남아 있을뿐이어 허탕을 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근처 구멍가게를 두 군데 뒤져 오징어 세 마리를 손에 들고 왔었다. - 는 거였다.
그러니까 월드컵경기는 애꿎게도 닭들이 몰살(?)당하는 비극의 날들인 것이다. 어디 저소음이닭 울음소린가?
닭들의 반란이 시작될련가? 부부젤라 윙윙소리에 더해 소음은 귀를 짼다.
2010. 06 22 (화, 맑음)
오후 3시40분.
손교수는 종합검사결과와 향우 수술일정을 알려줬다. 두 군데는 조기암이고 하나는 좀 애매하여 개복수술을 하면 되겠다는 게다. 정황이 나쁘진 않으니 낙관하라고일러준단.
수술날자는 애초 8/7일 예약을 3일 앞당겨 5/7일에 하기로 했다. 빡빡한 일정에 3일간 앞당길 수 있었던 것은 민우의 배려가 주효했다고 했다.
수술 전의 1주일분의 약처방과 함께 3/7일 오후 3~4시 사이에 입원할 것을 알려줬다.
간호사가 입원시 주의사항을 비롯한수술전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줬지만 난 아직도 환자란생각이들지않은 평상심 이였다.
바쁠 것 같아 민우에게 고맙단 메시지만 남기고 병원을 나왔는데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번에 식사라도 하자는 나의 제안을극구 사양하던,워낙 바쁜 일정의 그를 귀찮게하는 가싶어 집무실로 찾아가지 않했다. 입원하면 자연 만나게 될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민우의 은덕을 입게 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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