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07. 03 토
삼성병원에서(어제 오후) 오늘 오후 3시까지 방문하여 입원수속을 밟으랬었는데,오늘 정오무렵엔 메시지를 다시 줄때까지 출발을 하지말라고, 그리곤 오후 1시를 지나 4시까지 입원수속을 하라고 친절하게 메시지를 보내주는 병원~!
입원실 부족 땜이려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친절에 감탄치않을 수가 없었다.
원무과에서 입원수속을 밟는데 2인실로 배정받을 줄 알고 있었던 나에게 6인실 한 군데가금방 비웠다고 그곳으로 선처를 해줘 어찌나 고마웠던지! 병실환경이야 어떻든간에 하루에 10여만원씩 절약할 수 있다니 쾌제를 안 부를수가 없었다.
사실 예약시 난 6인실 입원을 요구했던 바다. 673호실에 들어섰다. 뭣보다도 내 옆에 입원중인 분이 나와 같은 동향이라서 반가웠고 그래설까 난생 처음의 입원은 어줍잖게 분위기에 동화됐던가 싶다.
암센터 건물 자체도 최신건물(08년 개원)에 첨단시설을 했기로 6인실일망정 병실같지않은 청결과 쾌적함에 여유로운 공간과 편리한 장비와 사물함까지 최첨단을지향했지않나 싶었다.
어제, 처제가 유방암 수술로 입원해 있었던 신촌S병원을 방문했었지만 (그 건물도 신축한지 얼마 되지않음)2인실의 환경이란 것도 여기6인실과는 비견할 수 없는-병원냄새와 분위기가 찌들어 있었다.
삼성병원은 병원같지않은 어떤 컨벤션센터나 호텔에 들어선 분위기를 느끼게 함이라.
오늘 밤 9시 이후론 (낼 정오까진 물만 먹음)수술당일까지 금식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숙지시키는 간호사의 병원생활 안내를 받았다. 간병인으론 둘째가 (휴가를 내어)나섰다. 아낸 몇 년 전의 요통수술의 예후증을 말끔히씼어내지 못하고 있어서였다.
저녁식사론 잡곡밥에 아욱된장국, 김치,코다리찜, 콩나물무침, 저육맛지짐이 나왔다. 먹을만 했다.
pm8시 복부의 체모를 위한 '니크린연고'를 갖다주며가슴밑에서 배꼽부위까지의 체몰위해 연고를 바르고 10여분 있다가 휴지나 물로 닦아내라는 거였다. 털 없에는 방법도 의외로 간단했다.낼 오후 주치의가 래방하여 모레 있을 수술에 대한 자세한 얘기와 시간 등을 알려 준단다.
pm11시, 휴게실에서 서독 대 아르헨티나의월드컵축구경길 시청했다. 서독이 4:0으로 아르헨티나에 완승할 거란 생각은 점쟁이낙지 '파울'이나 하고 있었을까? 2인실 이상의 병실엔 티브이가 없다. 나에겐 티브이 없음도 맘에 들었다.
병실에서 첫밤은 그렇게 낯설음을 털어가고 있었다.
2010. 07.04 일
am9;00. 링거-정맥주사(하트만용액+지세이포도당)를 폴더에 매달아 오른팔목에 놓은 채 소화제(피자임95mg)를 2정 복용하며, 마크롤액 250mg/btl , 동아마스터20mg, 야마테주 1mg 등을 복용하거나 잉거주사에 혼합 주사하였다.
낼 수술을 위해 장을 깨끗이 비우기 위한 설사약을 복용하니 대여섯 번의 설사를 했다.
* 마취동의서에 서약하다.
* 수술시 보호자 동의서에 사인하다.
* 수술동의서와 때어낸 장기에 대한 사용 승락서에 사인하다.
* 낼 오전11시경~오후1시 사이에 수술이 있으며 그에따른 상세한 설명과 주의를 듣다.
* 면회는 오후2시부터 8시까지고, 토`공휴일엔 오전10시부터란다. 면회도 병실이 아닌 휴게실을 이용을 권한다. 물론 환자의 상태에 따라 운영의 묘를 발휘하겠지만 가급적 방문객의 병실출입은 삼가하는 게 상대방을 위한 배려일 테다. 하여 상주보호자의 취사행위와 식사도 병실에선 허용칠 않는단다(준비한 식사는 지하1층 직원식당에서 가능하다).쾌적한 병실을 위해선 필요한 조치라여겨 난적극 호응하련다.
*1층~지하1층의 각종 편의시설 중 카페나 음식점에선환자는(환자복차림) 출입을 금하고 있어불쾌했다.
암센터의 암환자와 그를 찾는 가족과친지들의 편의를 도모하면서 적당한 이익창출을 위해 존재한가게들이 환자와 그를 찾아온 손님들을 격리 입장 시키는 상행위는 어떤 명분도 실익도 없겠다 싶었다. 암은 전염병이 아니지 않는가! 혹여 전염성이 있는 암환자가 있담 팔찌(입원과 동시에 환자인식 팔찌를 달게 되는 데 그 팔진 퇴원시 제거함)의 색깔을 구분시켜 그런 우려감을 얼마던지 털수가 있을 것이다. 병원측에서 그 점을 알고도 묵시하고 있담 재고 선처해야 옳다.환자가 있기에 존재한 병원-그 부대물들이 환자의 기분을 상처주어선 존립할 가치가 없슴이다.
병원의 모든 시설은 환자를 위한, 최상의 환경을 유지하는데 존립가치가 있어야 하는게아닐까?
*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다시 펴 들었다.
2010. 07. 05 월.
오전 9시전에 나의 침상맡엔 푸른 수술복 한 벌이 놓여졌다. 오후 1시쯤으로 예상했던 수술이 11시쯤 있게될 것 같다는 게다.
운명의 시각은 좀 더 빠르게 10시 반이 지나자 수술복으로 갈아입은 난 이동식메트에 누워 3층 수술실로 향한다. 아내를 비롯한 식구들이 뒤따르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난 수술실로 들어섰고, 문이 닫히자 오른편에 있던 간호사가눈만뺀 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수사관이 피의자에게 '미린다법칙'을 고지하듯 몇 가지 질문을 하는 거였다.
치아상태, 상처유무, 질병관계, 약복용,등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간호사의 눈빛은 어찌나 투명하던지 그 맑은 호수에 빨려들고 싶었다. 더는 그 간호사가상당한 미인일 거란 생각에짧은 순간을 수술실에 들었음을 잊고 있었고, 다시 나의 왼편에 서서 이제 마취실로 들어간다며 편안하게 안정을 취하라는 (남자?)간호사의 해맑은 눈빛이 다시 나로하여금 어떤 순수의 세계로 드는 착각을 갖게 했다. 그는 (수술 후)통증으로 인해이를 물기보단 입을 벌리는 게 났다고 일러줬던가 싶었다.
그가 마취실로 든다고 하자 난 그에게 한가지다짐할 게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만약 잘 못 돼 사경이 된담 저는 '시신기증자'이니 서둘러 주세요."라고 말하자 그의 눈가에 다소 의아한듯한 기척이 스치는가 싶더니 곧장 "염려 마세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겝니다. 안심하세요."라며 나를 마취실로 안내했다.
그들, 맑고 깊은 호수는 나를 가 없는 평안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후에 생각키를 수술실에 드는 환자 옆의 간호사는 눈이 더 없이 맑은 미인이라면 환자는 보다 편하게 안정을 취할 수가 있겠다는 경험칙 이였다.)
뭔가 부드러운 게 나의 얼굴을 감싸나 싶더니------------------------------(11시10분쯤 수술 - 오후4시쯤 회복실에서 나와 병실에 도착 - 밤 8시까지 마취약의 힘을 빌어 나를 깊은 잠에 이끄는 잠귀신과의 식구들의 싸움 - 밤8시 이후 자정까지의 가사상태의 숙면)---------------------그렇게 깊은 잠에서 깬 나는 이제 잠을 자고 싶어 환장하여 잠귀신 부르느라 심야의 사투를 시작해야했다.
난 수술 후 병실 침상에누워, 나를 붙들고 죽음(?)속으로 끈질기게 목 조여오는 잠귀신과 싸우는 식구들의 별난 전쟁(?)을 어렵푸시, 몽땅 끊어진 기억의 토막들을 간간히 기억하고 있다.
아낸 이따금 나를 흔들어 불러댔고, 뺨을 살짝 때리기도 하며, 너무나 먼 아스라이 들려오는 나를 부르는 누나(정읍)의 목소리를 수화기를 통해 이어주기도 했다. 그런 모든 것들은 현실이 아닌 피안 저쪽의 아득한 도저히 닿을 수 없는 흐릿한 미몽이였다. 생후 처음으로 타인에 의해 가사상태에서 9시간 여를 보냈다는 점도 운명적인 삶이라.
수술후 환자가 깊은 잠에 빠져들게하지 못하게 하는 까닭은 수술 중 산소호흡기를 통해 숨을 쉬는 허파는 극도록 위축돼 있어 그 쪼그라든 페를 원상회복시키기 위한 필수행위란다.
이제부턴 기침과 심호흡을 뱃살을 쥐어짜고라도 해내야하는 제2의 전쟁에 들게됐다.
2010. 07. 06 화.
코에서 산소호흡길 땠어도 나의 몸뚱인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 갖가지 호스로 연결 돼 나의 의지대론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만신창이 된 고깃덩이일 뿐 이였다. 비닐봉지 세 개에 든 액체는 폴대에 매달린 채 호스를 통해 나의 오른팔 정맥을 통해 생명의 끈을 붙들어 놓았고, 요도에선 주황색 액체가, 옆구리에선 연한 핏물이 호스를 통해 삐죽대며 그게 육체가 죽진 안했다는 물증인양 비닐봉지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그 거추장스런 몸뚱일 일으켜 세워 땡겨 쓰리는 뱃가죽을 복대로 감싸 잡고 걷기운동과 심호흡을 간단없이 하란다. 폐 확장을 돕기 위해서 운동을 한다는 건 숙지한 사실이되 더는 그렇게 해야 방귀를 잘 뀔 수가 있다는 게다.
천하에 빌어먹고 천대받는 방귀란 놈이 병원에선, 수술환자에겐 그리도 환영받는 귀빈(?)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나중 얘기지만 방귀를 유도해 끼기 위해 방귀촉진제를 먹는 환자도 목격했으니, 천하에 방귀쟁이는 병원에 자릴 만들어 방귀를 대여해 주는 직업등록을 하면 환자를 도우면서 돈까지 벼락으로 벌지 않을까?
삼 일째 물 한 모금도 먹진 안했으나 뱃속은 그리 편하다. 억지 기침을 하다 느끼는 뱃속의 통증만 아니라면, 60여 년 동안 노폐한 내 몸의 시궁창속 오물을 죄다 훑어내고 청정수를 주사하고 있단 생각에 쾌재를 부르고도 싶었다.
단식의 효험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배꼽에서 가슴밑까지 20여cm를 개복하고 위를 2/3 절단한(위 아전절제술)채 각가지 호스를 연결하곤 걷기운동과 심호흡을 죽치게 해야 한다는, 그게 살 수 있는 길이라서 열심히 해대는 생존의 끈 잡아끌기는 모두가 눈물겹다.
아닐 것이다. 어쩜 건강이 얼마나 행복이며 그걸 간과하고 살았다는 뒤늦은 자각, 건강돌보기를 그리 치열하게 했어야 했었을 지난날에 대한 어금니 물기였을지도 모른다.이제건강을 되찾아서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
건강이, 삶의 행복이 이렇게 치열하게 고통을 수반하는 걸 절감한이후의 생활은 훨씬 긴장하고 매 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할 게다. 그게 나를건강하게 만들어준 가족과 이웃에게 조금이나마 빚을 더는 게 아니겠는가?
아내와 가족들이 한결 밝아졌다.
* 소변줄을 제거했다.
* 심호흡(인스피로메타)기의 공을 들숨으로 끌어올리기을 해보지만 공 하나만 겨우 오리고있다.(수술 전엔 두개 반 이였다.)
*소변줄을 제거한 후의 용변은 처음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잠시동안 온 몸을 자지러들게 하였고, 특히 나는 야뇨증 현상인지 밤에만 유독 소변을 봐야해서(매 시간 단위로) 숙면을 못해 죽을 맛이였다. 그 소변량은 또 스스로 기록해야만 한다.
새벽6시쯤에 X-레이 흉부사진을 찍었다. 병원의 필요한 부서는 24시간을 근무한다고 봐야함이다. 특히 간호사들의 눈물겨운 헌신은 직업정신을 떠나서도 그 친절과 세심한 배려에 감탄했다. 그들은 어떤 경우든 ‘회피’와 ‘NO'는 없었다.
내 앞 창가의 80세 턱밑의 노인환자는 기력이 쇠하여 젊은 간병인이 꼭 필요하나 간병할머니(부인) 역시 노인네라 모든 걸 간호사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입원한지 2주가 넘었다는 데도 할머닌 병원에서 쫓아내지만 않음 계속 머물고 싶다는 게다. 집보단 병원생활이 할머니껜 더 편할 것 같아서다. 그건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할머니나 환자할아버지께서 집보다 병원이 편하고 안심할 수 있어서일 테다. 세상 어디에서 24시간 그런 친절과 봉사를 받을 수 있을 텐가!
내 옆 동향의 이 장로님은 2년 반 전 여기서 위 전절제술을 받고 예후가 좋아 지금은 음식도 잘 먹고 평상을 유지하는 삶을 꾸렸단다. 20여일 전 (불고기)폭식만 아니 했다면 재 입원 하진 안했을 테다. 급히 지방병원으로 갔다가 헬기편으로 여기에 재 입원 하여 유착된 장을 바로잡기위한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 후유증인지 췌장염이 도져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니까 이 장로님은 위암에 대해선 거의 도사(?)의 경지에 다 달았나 싶었다. 거기에 박식하니 늘 병실의 대화를 주도한다. 그 분은 내 퇴원 하루 이틀 후에 퇴원예정 이였지만 사려 깊은 친절을 잊을 수가 없겠다.
또 나보다 이틀 늦게 입실한 맞은편의 전직교장선생님 - 난 그분을 베토벤선생이라 했다. 은발의 곱슬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풍기는 지성이 그리했다. 베토벤선생의 간병인도 현직 교감선생님인 부인이다. 8월이 정년이라는 교감선생은 훤칠한 키에 아주 낙천적인 성품이어서 병원분위기를 밝게 한다. 교감선생이 평교사로 첫 부임지에서 남선생을 만나 뿅 가서(?) 꼬신 그리도 건장했던 선생이 지금 옆의 위암환자로 있단다. 교장선생도 나처럼 술·담배도 안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며 살아왔는데 무슨 위암인지 억울(?)해 하신다. 술·담배도 실컷해보고 병에 걸렸음 원이라도 없겠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의 푸념이기도 했었다. 70대인 베토벤은 혈색도 좋고 폐활량도 엄청 좋았다. 호남인 베토벤에게도 암은 무지막지한 놈이다. 하기야 암이 인품이나 지성을 보고 가려가며 침투하는 놈이던가?
내 옆의 수술동기(내 앞에 했었다.)인 70대 초반의 호인(好人)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국수공장사장이다.
어찌나 금슬이 좋던지 밤새 두 분(간병인 부인)은 새처럼 속삭거렸다. 아침에 보아하니 미소가 얼굴에 벤 천진난만의 애늙은이 고운인상 이였다. 그 잉꼬는 수술 후에도 지속되고 있어 우리부부는 그 분들의 수술결과가 좋아 그러려니 여겼다. 허나 다음날 알아차린 결과는 너무 애통했다. 개복했으나 암세포가 너무 깊이 침투하여 항암치료 후에 다시 수술해야 한다고 수술을 중단했단다.
그렇게 치명적인 통보를 접하고도 웃는 얼굴을 잃지 않고 죽음에 초연한 듯 병실의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과 따뜻한 맘 쓰기를 솔선하니 내 어찌 감탄치 않았겠는가! 짐짓 항암치료가 특효를 발휘하여 개복수슬로 완치하기를 기원한다. 내가 병동 내 트랙을 돌며 걷기운동을 하다 비상계단에서 눈물을 훔치다 외면했던 제주아주머니의 충혈된 눈자위가 지금도 선연하여 짠하다.
병동은 병실과 간호사실과 각종 사무실 및 창고로 나눠있는데 창가로 배치된 병실을 이어지는 복도는 160m에 달하며 그 복도 안쪽엔 간호사실 등이 들어선 게다. 환자들은 그 복도를 운동장 트랙을 돌듯 걷기운동을 하는데 병실마다 있는 화장실과 사워실 말고도 화장실과 중환자용 사워실이 복도에 있고, 손을 씻는 곳도 별도로 두어 군데 있어 쾌적한 환경이란 병동같지가 않다. 불원간 병원까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다는데 시설이 이정도는 돼야 경쟁을 할 수 있잖을까? 의술은 가히 세계적 수준인데 병원시설이따르질 못해 정작 의료개방은 미적대고 있음은 아닐는지?
'삼성이 하면 뭔가가 다르다'는 말은 괜한 회자어가 아님을 병원에서도 실감하게 된다.
쾌적한 병실을 유지하기 위하여 병원측이 쏟는 노력은 가상하다. 다만 적극 호응해야 할 환자들 자신들이 병원측 몰래 방문객들을무시로 드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그 어수선한 폐해는 고스란히 환자들 자신의 몫임을 망각한 걸까?
수술 후 이틀째만 무사히 보내면 고비를 넘는다는 데 나는 아주 가장 교과서적으로 오늘을 보내고 있음에 자족한다.
오후에 이민우교수가 방문해줬다. 나의 수술성공과 치유격려를 위한 자리였지만 그와 둘째와 내가 이렇게 한 자리에서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개무량하고 각별했다.
내가삼성병원에 입원(그가 있어 택했지만)한 이후 오늘까지 음양으로 그의 보이지 않는 은혜를 입고 있음이라 확신하기에, 더욱히 그가 서울대 의대인턴시절에 둘째를 통해 만나 절절한 고뇌담을 나눴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다만 내가 몹쓸 병에 걸려 이렇게재회함이 미안코 부담스러웠지만 말이다.
그가 건실하고 촉망받는 전문의로, 교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어 그를 알고있다는 자체가 행복했다. 고마웠다.
2010. 07. 08 목.
새벽에 ‘피~시’하는 소리를 내며 며칠간 굳게 닫혔던 항문은 개문을 시도하였고, 그 여진은 연발탄의 신호인양 포문을 열더니 어제부터 포만감에 거북스러웠던 뱃속을 시원하게 진정시키는 거였다.
어제 밤 간병교대를 했던 아내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고, 아침엔 병실의 모든 이들로부터 축하박수세례를 받았으며 심지어 정읍누나는 전화에 대고 “잘했다, 정말 고맙구나.”라고 방귀가 반가운 손님이라도 된 듯 호들갑을 떨었다.
병원에서 수술환자와 가족에게 있어 방귀는 구세주(?)같은 귀빈인 모양이다. 완벽한 수술의 뒷마무리는 방귀가 나온 후에 가능하기라도 하는지 모르겠다. 하여 방귀가 나오지 않는 환자에겐 방귀 촉진제가 필요하단다. 오후엔 극소량의 변까지 나왔다. 설사에 섞여 나온 변은 새끼손가락 절반쯤 이였는데 고유의 색깔을 띄웠고, 설사는 수술시 장내에 머물렀던 사혈(死血)덩이였다. 뱃속이 그리 시원하다.
위축된 폐 확장을 위한 심호흡과 장기 제자리잡기의 걷기운동은 하루의 일과다. 수술 전에 공 두개 반을 올렸던 인스피로메타기의 공은 겨우 하나만 올려진다. 수술부위가 땅겨 심호흡을 하기가 고통이다. 대신 걷기운동은 병동 복도뿐 아니라 암센터 2층부터 지하1층까지의 로비와 회랑을 신바람 나게 쏘아 다녔다. 병원엔 환자 대여용 도서관이 있고 직원이 책수레(冊車)를 끌고 다니며 대여를 하고 있었다. 나는 <09‘ 이상문학작품집>를 대여하다가 마침 갖고 온 나의 책<남김없이 내려놓은 우리명산 답사기> 한 권을 도서관에 기증했다. 여기서 건강을 되찾고 있는데 대한 보답으로 책 한 권이나마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앞의 베토벤선생께서 한 권을 달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생각이 났다. 내 수술을 집도한 자상하고 친절한 손태성교수와 조교(?) 오정아선생께 한 권씩 선물하면 좋겠다싶어 애들에게 책을 갖고 방문하도록 했다. 아침이면 나의 수술부위를 정성껏 치료하던 오정아선생, 많은 업무량에 깡말라서 더욱 이지적으로 다가서는 깊은 혜안의 오선생을 복도에서 만나 대뜸 말을 걸었다.
“워낙 바쁘셔 관심 밖의 책 읽을 시간도 없으실 테지만 책 한 권 선물하고 싶은데요?”
“무슨 책인데요?”
"제가 쓴 산행긴데 별 내용은 없지만 그냥 한 권 드리고 싶네요."
"그래요, 좋죠, 책을냈어요?꼭 주세요."
"기왕이면 (손)교수님께도 드리고 싶은데 전해주실래요?"
"그래요, 교수님도 여간 기뻐하실거예요."
"이따 오후에가져오라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냥 놔두셨다가 시간이 나서 생각나실 때 심심풀이로 보세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목레를 하며 약속을 했댔다.
애들이 가져온 책 맨 뒷면에 난 사인이랍시고 몇자 적어 오선생님이 나타나길 기다렸으나 저녁까지 내내 뵐수가 없었다.
하여 담날 아침일찍 예의 수술부위 치료차 오셨을 때에책 두 권을 드렸다.
2010. 07. 09 금
오늘 아침부턴 식사가 제공됐다. 식사라야 물 190mg에 요구르트100mg이 전부였다.
그것들을 먹는 방법도 물 30mg을 두서너 번 나눠 입안에 넣고 30번 정도 씹어 삼키는데 10분쯤 소요돼야 한다니 물190mg을 600여 번 씹어 삼키는데 1시간 정도가 걸리는 셈이다. 요구르트도 마찬가지다. 물 한 모금을 30번 정도 씹어야 하는 까닭은 위를 절단하여 위가 없기로 입안에서 오랫동안 씹어 침샘으로 위액을 대신하기 위함이란다.
예컨대 위에서 하던 저장된 음식물을 위액으로 잘게 부셔 분해하는 작업을 할 수가 없기에 입이 그만큼의 수고를 해야 함이다. 요구르트나 ‘아침햇살’ 같은 음료가 소화에 장애가 없다면 양을 좀씩 늘려 가면 된다. 물을 씹어 먹는 오늘의 기쁨은 이제 수술이 성공적이라는 확신이 드는 땜일게다. 먹을 수 있다는 건 살수 있다는 다른 말이다.
먹는다는 게 생의 원초적인 욕구고 필연이란 사실을 처음으로 절감한다. 먹을 수 있다는 건 생의 에너지원을 스스로 공급받을 수가 있음이라. 먹음에 대한 간과했던 행복들을 수 없이 곱씹어 보았다.
이장노님, 베토벤 선생님, 제주의 호인님 을 비롯한 673호실의 환우(患友)들과 간병인간엔 며칠사이 끈끈한 유대관계가 짙게 생성될 수 있다는 건 동병상련의 이심전심일테다. 때론 수술환자답잖게 담소가 넘칠 땐이곳이 병실인가?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비록 몸은 불편하고 아파도 나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기에 가능하리라. 어쨌거나 밝은 전망과 낙관적인 희망은 치유에의 첫걸음이기에 웃음이 상존한 병실은 좋았다. 밝은 병실을 만드는 일등공신은 베토벤선생의 간병인인 교감선생이고 항상 유익한 화제를 잘도 풀어대는 이장노님이 그 뒤일 게다.
환자로써 문병오시는 분들의 면면과 행위를 살피는 재미(?)도 잠시동안이나마 아픔을 잊게 해 준다.
어쩌다 교회목사(목회)님께서 문병오셔 환자의 쾌유를 주님께 간절이 갈구하는 기도를 엿듣다보면 그 지극한 성심에 감동하면서도 그 기도가 길어질 땐, 더는 점점 소리가 커질 땐 꼭 그렇게만 해야 하나 하고 이해하려는 생각을 거둬들인다. 마음 속 말로, 묵언으로 하는 간절한 기도가 소리내어 하는 기도보다 뭔가가 부족할 리는 없잖은가. 더구나 여긴 6인실이기에 타 종교인도 있을테고 문병객출입도 제안하여 후게실을 권장하고 있는데 말이다.
내 인격이 존귀한 거라면 타인의 인격도 나 못잖게 존중받아야 함은 종교이전의 만고진리다.세상은 병실에서도고만고만하게 별다를 게 없는 삶의 생존장이였다.
* 인스피로메타기의 공은 겨우 하나만 올리고 있다.
* 소변줄 제거 후 야뇨(夜尿)현상이 잦아 잠을 설치는 불면의 고통에 시달리다.
* 수술자국은 깨끗하게 잘 아물고 있다고 오선생이 격려를 해 줬다.
2010. 07. 10 토
어제 밤부터 주말을 이용하여 둘째가 다시 간병인으로 나섰다. 나의 잦은 야뇨현상으로 인해 설잠을 잘까 걱정이 돼 소리 내지 않으려 조심했으나 두서너 번 깨우고 말았다. 놀란 토끼처럼 일어난 둘째에게 그냥 있으래도 흡사 죄인처럼 허둥 되는 데야 내맘이 무거웠다.
누군가 아팠을 때 가장 고마운 건 가족이라. 피붙이가 아니곤 누가 간병인을 자처할 텐가?
아침부터 본격적인 식사가 배달됐다.
# 조반 - 누룽지미음(50G) * 2. 물김치(국물) * 2 .
계란찜. 우유. 잣죽(간식거리)
# 중식 - 쌀미음(50G) * 2. 두유. 물김치(국물) *2
# 석식 - 누룽지미음(50g) * 2. 물김치(국물) * 2. 그린비아(프로틴)
‘* 2’는 두 개씩이니 하나는 참에 먹으라는 게다. 30번 이상 씹어 삼키는 건 상식이다.
오늘의 식사가 별 거부반응 없이 소화된다면 본격 식음도 성공인 셈이겠다. 난 거뜬(?)했다.
다만 (수술 전에 비해)병아리 눈물만큼의 식사로 포만감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단다.
오후엔 왼쪽 아랫배가 몹시 아파서 흉부X-선 촬영을 해 보았으나 특이한 현상은 없단다. 수술 시 뒤틀린 장들이 제자리를 찾느라 야기 된 통증일 거란다. 안심이다. 정말 그때만의 좀 더딘 순간의 통증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퇴근 때 명오가 질부를 동반하여 문병 왔다.
입원 후 친구 나아가서 친족 중에 유일하게 나의 수술사실을 내 스스로 알려준 결과다. 아낸 알렸다고 날 힐책했지만 당질간이면서 불알친구인 그에게, 더는 가까운 올림픽 페밀리타운에 있으니, 만난지 꾀 돼 망설이다 전화질을 한 거였다.
후에 나의 입원사실을 알게 됨 얼마나 서운해 할 건가? 어떤 핑계로도 명오에게만은 알리고 싶었다. 그도 젊은 시절 간염으로 직장(도공)을 잠시 쉰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건강하다. 질부는 그가 식탐이 있다고 고자질(?)을 해서 웃었다. 그의 내외와 우리가족은 지하 1층 직원식당에서 오붓한,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가 있어 좋았다. 아프니까 이렇게 모두가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는구나.
누군가가 아픔은 몹쓸 짓이지만 그 몹쓸 것은 가족의 느슨했던 끈을 더 돈독하고 살갑게 꼬아주기도 한다.
뿔뿔이 흩어져 일상꾸리기에 바쁘다가도 가족 누군가곤경에 처하면 맨 처음 달려와 그 고통을 분담하려 전심투신 하는 게 가족이다.
그리고 궂은일을 서로 도맡아 하려는 가상함도 가족이기에 가능하리라. 하여 평소 가족의 고마움을 잠시 망각하고 살다가도 길흉사는 그런 가족의 공동체적인 운명을 공감하고 뿌듯해 하는 자리로 매김 된다.
가족은 사회생활의 기초고 공동체의 시발이며세상의 일원이다. 수술 후 난 그걸 새삼 절실하게 되씹어보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혼자 살아가기 힘겨운 사회성의 동물이기에 가정을 일구고 그걸지키려 평생을 소진한다.
골드미스인 둘째의 앞날이 그리 쾌청하지만은 않는시름이 새삼 지핀다.가정은 삶의 터울이므로---.
2010. 07. 11 일.
무른 대변을 보았다. 한 시간 터울의 야뇨는 어김없어 밤엔 숙면을 취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했다. 오늘의 식단은 좀 성찬인성 싶다.
# 조식 - 흰죽(50g) * 2. 물김치(국물) * 2.
근대된장국(100cc). 꽁치양념구이 1토막. 무나물. 연두부찜 1개. 우유.
# 중식 - 흰죽(50g) *2. 물김치(국물) * 2. 쇠장조림(1)
버섯찌개(100cc). 동태조림(1). 시금치나물.
# 석식 - 흰죽(50g0 * 2. 물김치(국물) * 2. 고등어조림()
숙주나물. 돈사태찜(1). 그린비아(프로틴). 시레기된장국(100cc)
배액주머니까지 제거한 난 이제 그 거추장스런 호스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복부의 수술부위의 통증도 실감할 만큼 나아지고 있다.
둘째와 난 어제 소나기로 되돌아섰던 인공폭포가 있는 동산 산책로를 일주하기로 했다. 병원 내에 녹음 우거진 동산이 있고 거길 산책할 수 있다는 건 환자의 기분전환과 운동에 최상의 장소일 것이다.
삼성암센터가 돋보이는 건 그 동산과 30여m 높이의 3단 인공폭포를 거대한(1층~지하2층까지) 통유리 벽(페어그라스)을 통해 넓은 로비의 벤치에 앉아 완상하며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맨 첨 다가온다.
3개 층의 로비는 병원 같지 않은 초현대식 구조물로 많은 방문객과 환자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어 병실분위기를 쾌적하게 한다. 다만 앞서 얘기 했지만 카페와 식당에선 환자출입을 금하여 환자는 밖에서기다려야 하는 이질감을 자행하는 상술을 당연시 하고 있다는 불만을 어찌할 순 없었다.
지하1층엔 암교육센터가 있다. 센터에선 암치료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자료와 프로그램을 통해 심리적인 안정을 기하도록 한단다. 나는 무엇보다도 거기서 관련책자와 신문을 읽을 수 있어 좋았고 인터넷도 할 수 있어 시간활용에 최적 이였다.
나는 걷기운동을 한답시고 대부분의 시간을 로비와 교육장에서 보내다보니 간호사의 호출을 받기 일쑤여서 미안했다. 하여 자연스레 우리가족의 면회 장소도 로비가 되다보니 그곳은 손주·녀의 놀이터로 둔갑했다. 로비 대리석 바닥이 깨끗하여 서너 살짜리가 안방처럼 뒹굴어도 괜찮았다.
사실 손주·녀는 내가 아파서 쾌재를 연호하는 놈들이다. 오후2시 놀이방에서 나와 곧장 병원으로 나들이를 오고 푸짐한 먹거리에 가족들을 모두 만나 신나게 놀 수가 있기에 말이다.
그놈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할애비 아픈 이 시절만 이어지길 바랄 것이다. 난 그놈들이 노는 꼴을 보고 아픈 배꼽을 잡고 웃으며 우울함을 벗어나 좋았다. 큰애와 막내는 오전 내 준비를 하여 애들이 귀가하면 여기로 달려와 밤 8시경에 헤어진다. 날로 생기를 찾는 나의 활기를 봐 기쁘고 애들 소풍도 시켜 그만인 끈끈한 가족애를 피우는 터가 된 것이리라.
병원은 우리가 살면서 망각의 늪에 놓았던 건강의 고마움과 가족애의 기쁨을 꺼내 올려 새삼스레 통감케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짐짓 몹쓸 병만 아니라면 한 번쯤은 아파 보는 것도 삶에 윤활유가 됨을 알게 될 것 같다.
사람은 죽기까지 남을 속이거나 도둑질만 하지 말곤 모든 걸 다해봐야 함은 그게 생의 값진 자질이 되기에 하는 말일게다.
위암이 좀 과하긴 하나 나의 인생에 그런 값진 전환점이 되기를 염주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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