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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세월이 하 엿 같다고 내친걸음 인디? (백운산)

세월이 하 엿 같다고 내친걸음 인디? (백운산)




경칩이 일주일 전인데 혹독한 겨울 끝은 구제역 공포를 그대로 놔두고 인플레에 날개까지 달아 봄맞이를 힘겹게 하고 있습니다.

천 몇 백원에서 이천 만원씩을 나눠먹은 공기업들은 빚은 곱빼기로 늘었으나 우리가 낸 세금으로 탕감할 테니 걱정 없을테고, 나라밖에 내보낸 공복들은 연애질 하면서 국가기밀에다 6억원도 부족해 손가락까지 잘라 바치겠다고 각서를 썼답니다.

위암수술에 항암·방사선치룔 하느라 반년을, 요양하느라 4개월을 시간과 씨름한 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어도 몇 시간 산속에 파묻혀 보겠다고 백운산행을 고집했지요.

도시락 싸들고서 말리는 아낸 도시락만 내게 뺏긴 채 손들고 말았고 난 기어코 버스에 올랐습니다.

아침안무가 먹빛 산야를 뿌옇게 가리며 배회하고 있습니다. 내려쬐는 햇살은 따사로울 것 같은데 봄을 명증할 무엇도 보이는 게 없네요.

10시쯤, 백운산 들머리인 진틀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병담마을 인근의 산비탈 밭 뙤기엔 고로쇠나무가 과일나무인양 빼곡히 식수돼 있고, 산골짜기에자생한 놈들은 두서너 군데씩 구멍이 뚫려 흰 호스를 족쇄마냥 채워 붙들어 매 놨네요. 나무가 달아나갈까 봐 선가?


도선선사가 알면 대성통곡타 기절초풍할 판입니다.

선사가 이곳에서 수개월 참선하다 일어서면서 다리가 후들거려 옆의 나무가지를 붙잡았었는데 가지가 부러지고 거기서 흐른 수액을 핥아먹자 무릎통증이 나았다고 해서 골리수(骨利水)라 했다는, 그 골리수를 고로쇠로 변음을 시키고 선사를 팔아 나무란 놈을 죄다 구멍을 뚫어 놨으니 말입니다.

저러다 나무가 도망가는 게 아니라 아파서 자살할까 걱정됩니다.

산님들! 우리 고로쇠물 안 먹기로 합시다. 수요처가 없으면 나무도 구멍 뚫릴 리 없겠지요.

흰 호스가 거미줄처럼 얽힌 골짜기를, 깨 벗은 무수한 나목들 사이를 걷고 있습니다.

나목들 사이로 뻗어온 햇살은 따스하고 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지난 겨울얘기로 재잘거립니다. 웃옷을 벋는 산님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비목·물푸레·노각·사스래·서어·굴참·귀목·층층`당단풍`철쭉`박달·등의 나목들이 오순도순 모여서 눈길을 보냅니다.

백운산엔 750여 종의 나무가 공생을 해서 1993년엔 자연생태보호구역으로 지정 됐다지요.

일군의 잣나무 동네를 지나칠 땐 그들의 위용에 압도당했습니다. 아니, 그 늠름함을 디카에 담으려다 밧대리가 다 된걸 알아챘지만 후회해야 소득 있겠어요. 오늘은 맘에만 담아두고 다른 산님들 거 퍼 도둑질 해야지요.

그놈들과 눈인사를 나누다보니 한 시간이 훌쩍했습니다.

신선대를 경유하는 길과 직행코스로 나눠지는 갈림길에서 신선대쪽을 택했습니다. 대부분 다 직행하는데 ‘산이좋아’‘하늘’ 두 분이 그 쪽으로 새기에 나도 얼씨구나 했지요.

백운산 사타구니 깨를 더듬는 우린 호젓해서 좋았습니다.

바위너덜도 사라지고 육산의 포근함이 말초신경을 탑니다. 반시간을 오르니 신선대는 큰 바위들을 포개놓고 산님들을 뫼시고 있네요. 저도 비집고 들어서 ‘산이좋아’님 카메라에 얼굴을 쑤셔 넣었습니다.

북쪽의 백두대간 능선들은 농무 속에서 잔잔한 파도를 일구고 남쪽 백운산 정상은 오뚝이처럼 솟아 얼굴을 바짝 내밀고 있습니다.

저 아래 무수한 산골은 능과 어깨동무를 하며 섬진강 우윳빛에 발부리를 담갔습니다. 따스한 햇살에 늘어진 산하는 푸근하고 질감 좋은 거대한 수묵화로 펼쳐졌습니다.

11시반 입니다. 신선대에서 백운정상을 향합니다.

반시간 남짓 걸려 정상에 올랐지만 인파에 묻혀 잠시 서있기도 불편 합니다. 모두들 해냈다는 성취감에 들떠 있음은 우리나라가 정녕 살기 좋은 금수강신일터여서지요.

바로 이웃 일본은 동북대지진으로 아수라장이 됐고 그 쓰나미는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칠레해안 주민들까지 애태우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침착히 인내하고 서로를 배려`양보하느라 질서정연하다고 매스컴이 찬사를 칩니다. 우리와 대비를 잠시 해봅니다.

정오가 지났습니다. 섬진강이 능구렁이처럼 조망되는 곳에 자릴 폈습니다.

‘산이좋아’‘하늘’ 셋이서요. 식사를 막 끝내려는데 김태현님이 나타납니다. 그에게 백운사코스를 다시 한 번 물었지요.

아니지요. ‘산이-’‘하늘’ 두 분을 먼저 보내고 그와 반시간쯤 하산동행하다 나 홀로 백운사 코스로 들어섰습니다.

다시 숲의 고요 속으로 빠져듭니다.

한적한 산길의 맛을 맛보지 않은 분들은 무서움부터 생각합니다. 정말 확실한 무서움이 아닌 한의 극복할 수 있을 두려움이라면 해쳐나가는 희열의 맛은 꿀맛인 것입니다.

삶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은, 소리쳐도 아무도 쉬이 나타나지 않을 곳에서의 고독감은 내면을 살찌우게 합니다. 내 자신에 빠져보는 겁니다. 모든 걸 잊는 거지요. 내려놓게 되는 게지요. 텅 빈다고 할까요. 자연에 동화 되는 게지요.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해 난 때때로 홀로 산행을 즐깁니다.

반시간을 즐기니 백운암자가 얼굴을 내밀고 있네요. 홀로를 즐기는 나도 이런 적막에서 살라면 고갤 저을 겁니다.

타고난 사람만이 평생을 숲의 고도(孤島)에서 살 테지요. 다시 반시간은 바위너덜 계곡길입니다.

거대한 절애를 끼고 백운사는 꾀 넓은 터를 차용하고 있었는데 대웅전은 보수공사로 어수선하고 뒷마당에 단아하게 앉은 한 칸짜리 ‘산영각’은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해우소 앞을 가로지르는 포장임도를 따르다가 왼편 언덕배기로 난 긴가민가한 숲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아까 김태현님이 힘줘 당부했거든요.

백운산 배꼽깨를 무질러가는 숲길은 인적냄새가 없습니다.

광양제철연수원 방향을 알고 있으니 걱정할 건 없습니다.

십 분쯤 숲길을 해치니 능선자락에 커다란 바위가 엎드려있습니다. 배낭을 풀고 간식을 꺼냈습니다.

나목들의 어지러운 혼재 사이 저 아래엔 백운사에 목맨 임도가 강물처럼 구불구불 흐르고 있고 간혹 그 강물 위를 산님들이 떠들며 움직이네요.

골이 많고 바위 은폐물이 산재해 있으며 마을이 한 시간거리에 있는데다 동쪽엔 섬진강이 바리게이트를 쳐줘 천혜의 요새요 지리산에 대간이 이어져 빨치산이 활동하기엔 딱 이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1948년 10월, 제주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순천에 주둔하던 국군14연대의 지창수상사가 주동이 돼 반란을 일으켰고, 다수의 군과 일반인이 합세하여 국군에 대항하다 백운산으로 숨어들어 항전을 함에 우리나라 빨치산의 태동이라지요.

김지회는 여기서 빨치산을 정비하여 이끌고 지리산 들어가 이현상의 유격대에 흡수돼 6·25전란 때까지 생명력을 이어갑니다.

난 그런 이현상을 ‘빨치산두목’으로만 알아왔지요.

그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1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고 해방과 더불어 풀려났으나 그의 불꽃같은 독립심은 미군정에 밉보여 지리산에 은거했다는 사실을 몰랐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골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공산주의자였으면 월북하여 북한에서 고위층에 오를 기횐 넘 많았으나 그는 그 길을 결코 택하지 않고 지리산에서 젊음을 산화(49세)했었지요.

그의 시 한 수가 생각납니다.


"바람세찬 지리산에 서니 앞은 일망무제한데

칼을 짚고 남쪽천리를 달렸구나

내 한시인들 조국을 잊은 적 있었던가

가슴엔 필승의 지략 심장엔 끓는피가 있다."

당시 빨치산으로 운명한 사람들도 시대의 아픔과 불온한 사상이 낳은 희생자가 많았으리란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선자동 계곡을 훑고 때론 페인 길에 수북한 낙엽에 빠지며 숲길을 가로막는 앙상한 철쭉을 피하다 좀 있다가 흐드러지게 필 철쭉꽃길을 상상해 봤습니다.

그때 다시 걷고 싶습니다.

푸른 건 오직 하늘뿐이고 초록은 듬성듬성한 소나무와 겨울에 상처 입은 산죽에 앉아있었습니다.

푸른 하늘은 나목가지에 갈가리 찢긴 채고, 하늘을 나는 까마귀는 영역을 침범한 산님들을 향해 외마디 절규를 토하고 있었죠.


그 정경들을 옹골차게 한 시간 여를 즐기니 한 떼의 산님들이 내려 왔고 그들은 거제도에서 왔다고 인사를 합니다.

선동마을 ‘해뜨는 집’카페에 닿으니 오후 3시였지요.

광양제철소 입구 동곡리 주창까진 10분이면 족할 것 같아 약속보다 일찍 도착했음이 후회됐습니다.

출발 시 내심 걱정이 됐는데 5시간의 산행을 거뜬히 해 냄에 뿌듯했습니다. 그런 저력은 치료 중에도 2~3일 간격으로 한두 시간씩 꾸준히 산책을 한 결과일 것입니다. 환자에게 있어 걷는다는 건 병원에서의 치료 못잖게 중요함이지요.

그 걷기도 기왕이면 숲길을 걸으면 자연의 치유를 실감케 됩니다. 참으로 자연은 신비한 거지요.

동구 밖에 선 매화는 아직도 비몽사몽인지 가지사이로 눈두덩이를 부풀린 채 눈곱을 때내고 있습니다.

‘매화가지 끝에 봄이 왔다(春信桃梅捎)’라고 옛 시인은 읊었지요.

행복한 산행 이였습니다.

2011. 03 13

#. 자리 내준 '누리산악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뒷풀이마당을 제공했던 산장주인님께서 금방 난 토종달걀을 줘 황송했습니다. 아직온기가 남아있는 생달 걀을 날것으로 먹은지가 기억 아물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