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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우금산(禹金山)울금바위와 호벌치코무덤

우금산(禹金山)울금바위와 호벌치코무덤

 

 

 

자욱한 안개 속에 이슬비 흩뿌리는 4.13총선아침,  23번  국도를 타고 부안에서 줄포방향으로 남진하고 있었다.

우금산성(禹金山城)을 타고 우금봉에 올라 개암사로 하산, 사찰입구의 벚꽃십리 길을 트레킹한 후 남포제 고개 아래,

호벌치전적비와 코무덤을 들러본다는 계획 이였다.

 

-개암저수지-

 

사전 투표까지 했는데 안개비는 산행을 멈칫거리게 한다. 오후엔 비가 갠다는 예보에 나는 호벌치전적지부터 찾았다. 호벌치전적지는 정유재란 때 민초들의 의병봉기로 왜군을 패퇴시킨 혈투의 성지인데다 코베기 전쟁이란 인류사에 전무후무한 추악한 전쟁을 고발하는 통한의 장소이기도 하다.

 

-개암호와 벚꽃길-

 

오전10, 남포저수지 아래 호벌치전적지는 안개비만 추적댈 뿐 적막 쓸쓸했다.

간단한 안내판에 숲에 싸인 추모`전적비와 앞의 사당채가 촉촉이 젖어 비참한 역사를 말하나 싶은데 정작 대문엔 자물쇠가 걸려있다. 열쇠 옆 안내전화번호가 있어 휴대폰을 켜니 존재하지 않는 전화번호라며 불통, 일반전화를 걸자 그분은 부안읍에 산다며 관리하는 분이 따로 있단다.

관리하시는 분이 바로 앞마을에 사시면 해설을 듣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다. 전화번호는 뭣 땜에 표기했는지?

 

-호벌치전적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한양이북까지 점령하여 온갖 수탈을 다했지만 풍요의 고장 전라도는 침략하질 못했었다.

남`서해를 전라좌수사 이순신장군이 지키고 있었고, 지리산을 넘어 전라도엘 침범한 왜군들은 고경명,곽재우,김천일 등 민초의병들에게 연패당한 탓이었다.

그런 통한이 남았던 히데요시는 정유년(1597.1.15)14만의 대군을 투입 재차 조선침략에 나서면서 전라도를 초토화할 것을 명한다.

 

-호벌치 순절비-

 

전라도를 평정하지 않곤 승전했다고 할 수 없을뿐더러 임진년 때의 수모를 앙갚음하기 위해서였다. 더는 전라도를 살육하고 일본인들을 이주시켜 십년 후엔 그들 왜적의 세상을 만든다는 계획 이였다.

하여 병사 한 사람당 조선군인 코를 한 되씩 잘라 보내라.

코 많이 보낸 자를 포상하겠다라고 히데요시가 독려하자 왜병들은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궤짝에 넣어 일본으로 보냈다.

 

-호벌치순절비 & 코무덤-

 

임진란에 이어 정유재란에 다시 참전했던 의병,채홍국은 126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127일에 호벌치고개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 420일 적의 칼날에 순국했다.

이때 두 아들 채명달,경달도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니   삼부자가 호벌치 싸움에서 모두 순절하였다.

또한 의병,이유는 감교리(甘橋里)의 청등(靑燈)고개에서   3일간의 혈전 끝에 915일 전사하자 그의 부인 부안김씨도 죽창을 들고 싸우다 순절했다.

 

-자물쇠 잠긴 호벌치사당-

 

호벌치전투는 민초들의 의국충절의 상징이다. 그들 의병들의 코도 잘려갔을 테고, 그렇게 잘린 수십만 개의 코가 히데요시 앞으로 보내졌다. 가증스러운 건 수하 적장들도 전과를 과시하고 용맹성을 기리기 위하여 벤 코를 따로 보관하여 오카야마현의 천인비총(千人鼻塚)같은 코무덤을 만들었다.

그 코 무덤에서 한 줌의 흙을 가져와 호벌치전적지에 코무덤[鼻塚]을 조성해서 그때의 비극을 반추해보는 거다.

 

 

-개암사벚꽃길-

 

전쟁을 즐기면서 죽은시신의 코나 귀를 베어 포상을 하는 천인공노할 포악한 백정놈들-왜적들의 만행과 선혈들의 우국충정을 호벌치전적지에서 되새겨보고 일깨우는 발걸음이 줄곧 이어졌음 싶었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즉 호남이 나라를 보장하고,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어진다라고 칭송했을 정도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4.13총선의 의의를 매스컴에서 장황하게 논설하고 있다. 전라도의 혼이랄까? 우리나라의 명운은 전라도가 선도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불의에 앞장서는 호남인들의 기개를 지역주의 한으로 호도하는 일부정치인들은 호벌치전적지 코무덤 앞에서 옛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겁주느라 애비야(귀나 코를 베가는 놈)”했던 코 베가는 세상을 묵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개암사를 향했다.

 

-개암사녹차밭-

 

23번국도를 2km쯤 되돌아오면 개암사입구 이정표가 있다. 여기 개암사나들목에서 시작된 십리벚꽃터널은 절정이 지났어도 탄성이 절로 나오게 했다.

개암저수지를 휘감은 벚꽃길은 안개까지 얹혀 몽환적이게 한데다 인파도 없어 거북이드라이브하기에 최적이었다십여 년 된 벚나무꽃길은 부안군이 금년부터 벚꽃축제(49~10)를 연 후인데다 비까지 내려선지 한가해서 좋았다.

 

-개암사원경-

 

연둣빛 파스텔톤물감이 뭉텅뭉텅 덧칠된 산이 채 마르지도 않고 감청색호수에 녹아든, 풋풋한 봄을 훔치는 건 여기 벚꽃십리 길의 또 하나의 흥취였다.

분위기 다른 하얀 벚꽃나무 행렬과 연둣빛 산이 호수 속에서 나를 줄곧 따라다니는 정경은 감탄이외 언어도단 이였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다고 했다. 나를 내려놓고 사물에 몰입할 때 피안까지 보여 즐길 수가 있다. 천천히 풍경에 흠뻑 빠져보는 거다.

 

-개암호반-

 

일주문을 통과하면 검초록 씻어내는 전나무군락이 일상을 씻게 세심(洗心)시켜준다. 어쩜 막 연둣빛 입술 내미는 녹차 밭과 도랑물소리가 나의 때 낀 옷을 홀라당 벗기려드는지 모르겠다.

깨 벗지 않고 개암사경내를 들 수 없을 만치 깔끔한 사찰이었다.

최초죽염의 태생지기도 한 개암사는 매창이란 걸출한 기녀시인을 우리들에게 알려준 보시의 사찰이기도 하다. 죽염과 매창일기란 보물을 우리에게 전수 선물한 개암사는 그 두 가지만으로도 오뚝하다.

 

 

 

사찰 뒤에서 조잘대는 도랑물을 건너 산길에 들었다. 이슬 잔뜩 머금은 푸나무는 새초롬하게 싱그럽다. 막 새잎 돋은 연두이파리는 이슬을 내게 털며 풋풋한 인사를 해온다.   그들의 물세례가 전혀 거북하질 않다. 봄의 생명수 같아 기분이 업그레이드 됐다.

진달래가 새색시 볼같이 발그스레하고 이름 모를 산새가 짝 찾는 아리아를 한 곡 멋들어지게 뽑는다.

안개비도 걷히고 있다. 한 시간 남짓 빡센 오름길을 봄의 맛깔에 취하자 울금바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원효굴에서 본 연둣빛 세상-

 

거대한 바위는 입을 벌리고 누구든지 품에 안는다.

676, 이 커다란 굴에서 원효`의상스님이 선정에 들면서 개암사불사를 일으킨 탓에 의금굴을 원효굴이라고도 한다. 굴 바위천정에 뿌릴 박고 거꾸로 매단 활엽수가 연두이파릴 피우고 있어 질긴 생명의 경외감에 혀를 차게 한다.

나무의 햇빛을 향한 절규의 몸짓은 자못 처절하다. 굴 안에서 놈의 몸짓을 따라 바라본 밖의 세상은 천국이다.

 

-원효굴 천정-

 

그 천국으로 나와서 숲을 헤치며 바윌 휘도니 뒤에 베틀굴이 있다. 백제유민들이 백제부흥운동 때 굴속에서 베를 짜고 길쌈을 했던 제법 긴 굴이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백제는 망하고 의자왕은 당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자 복신(福信)과 도침이 유민들을 규합하여 왕자 부여풍을 받들고 백제부흥을 꾀하며 항전했던 곳이다. 이 우금산전투에서 백제저항군을 평정한 김유신과 소정방이 합작한 걸 기념하는 遇金嵒’(우금암)이란 한자와 흥무왕후예 김석곤이 음각하다라는 글귀가 굴 입구에 음각돼있다.

 

 

 

또 하나의 쌍굴은 복신이 은거했다 해서 복신굴이라 하는데 이 세 개의 굴 바위는 뒤에서 보면 거대한 바위 세 개가 뭉쳐 있고, 동쪽 산성따라 15분쯤 가면 우금산(禹金山340m)정이다.

이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3.96km의 우금산성(禹金山城)은 묘암골(묘암사터)에서 남쪽의 남문으로 이어진다.

동쪽으로 213고지, 300고지를 밟으면서 60m가량의 옛 성벽을 마주할 수 있다. 그 성벽을 따라간다.

 

-울금바위-

 

등산로도 우금산성과 궤를 같이 하는데 임도와 산성이 동시에 마무리되는 동쪽계곡 묘암골로 빠져 개암저수지중간쯤 쌍동이닭집에 닿았다.

궂은 날씨여선지 산님이 없어 호젓하고, 안개비 세수를 한 이른 봄의 청초한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어 좋았다.

울금바위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의 변산군도(邊山群盜)의 아지트로 등장한다. 영조때는 이곳에 9천여 명의 적

도들이 활거 해 지리산, 구월산과 함께 조선의 3대 적굴(賊窟)이었다.

 

-베틀굴-

 

우금산이 적굴이 된 건 높지 않은 산이 골 깊고 풍요의 평야와 바다가 지척이어 물산이 풍부해서였을 거다.

아기자기한 산세엔 은거하기 좋은 장소가 많고, 더는 이곳에서 삶의 터를 잃은 역사적 패자들인 핍박받는 민초들의 땅이어서 일 것이다.

저항하고 포기할 줄 모르는 의협심과 근성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불굴의 용기로 기상하곤 했었다.

 

-울금암서 본 개암사계곡-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개암사들머리를 향해 벚꽃길을 걷

고 있었다.

대한민국입시정부수립일이기도 한 413일은 20대국회의원총선의 날이었고, 호남에서 번지기 시작한 녹색바람을 우리들은 어떤 뉘앙스로 새겨 안아야 할까?

호남이 없으면 조선도 존재할 수 없다고 이순신 장군은 설파했다.

싱그러운 연둣빛 산야가 푸른 개암호반에 질펀하게 깔리고 있다4월은 잔인한 달이다.

모든 살아있는 건 새롭게 태어나는 산고의 달이어서일 테다. 이번에 우리도 새롭게 태어날 텐가?

2016.04.14

 

 

 

 

 

 

 

 

 

 

 

 

-개암사입구의 전나무-

 

-서어나무의 쌍 연리지-

 

-베틀굴안에서-

-복신굴입구-

 

-연리지 귀목-

 

-울금암에서 조망한 개암사와 개암호-

 

 

 

 

 

-벚꽃잎의 도랑여행-

-열애중인 나무-

 

-우금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