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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매창의 숨결 찾아 - 봉래(내변)산

 매창의 숨결 찾아 - 봉래(내변)산

  

 

 

 

 

매화우(梅花雨) 흩날리는 이른 봄날 봉래산엘 들면 매창의 숨결을 한껏 더 느낄 수 있을까?

23번국도를 타고 우선 들린 곳은 부안읍의 매창묘소가 있는 매창공원이었다. 공원이라기엔 민망할 만치 협소한 마을쉼터엔 매창을 기리는 시비(詩碑)들이 배꽃[梨花]아닌 매화와 지금 꽃봉오리 터트리는 벚꽃나무들을 동무하고 있었다.

 

 

 

 

최소한 이화우(梨花雨)시비 옆엔 배나무 몇 그루만이라도 있었음 시혼(詩魂)이 더 절절해지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을 어쩌질 못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매창공원의 이매창의 묘-

 

 

정들자마자 떠난 유희경의 무소식에 띄운 매창의 애타는 연시(戀詩)는 그리움 자체이다. 시비를 일별하고 30번도로를 타다 다시 736번 내변산로에 들어서니 하얀 꽃송일 무더기로 단 매화와 목련이 산촌을 품고 있는 그림같은 풍정들이 차창을 넘나든다.

 

갓길에 도열한 벚나무들이 히얀 꽃잎을 비처럼 흩날리면 매창의 숨결을 찾는 여정이 한껏 고무될 터인데, 좀은 아쉽다는 생각에 내변산탐방지원센터 주차장에 들어섰다.

 

 

 

 

매창과 유희경을 더해 부안삼절로 회자되는 직소폭포를 향한다. 봉래구곡의 물길이 갈수여서 매창의 연심마냥 애태운다. 애간장 태우는 놈들은 봉래구곡의 활엽수들도 역역하다.

 

연둣빛 싹은 여린 가지눈금을 째고 혀를 내미느라 안간힘을 쏟고 있다. 매창도 이맘때쯤 여길 거닐었으리라. 그녀의 시에 봄기운이 묻어날 때가 많았다.

 

 

 

<봄날을 원망하며(春怨)>
뜨락에 봄이 깊어 새소리 들리기에       竹院春深鳥語多
눈물에 얼룩진 얼굴로 사창을 걷었네     殘粧含淚捲窓紗
거문고를 끌어다가 상사곡을 뜯고나자   瑤琴彈罷相思曲
동풍에 꽃이 지고 제비들만 비껴 나네    花落東風燕子斜

 

이른 봄날의 여운이 깊은 봉래골짝을 배회한다. 가녀린 물소리가 새들의 지저귐 속으로 빨려들었다. 불어터진 꽃봉오리의 제살 찢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산고의 아픔을 그들이라 없을 텐가! 

 

-봉래구곡-

 

자연보호헌장 탑에 이르렀다. 직소폭포를 살짝 외면하고 우측숲속으로 치닫는 벼랑길을 오른다.

바위된비알은 월명암을 오르는 속탈(俗脫)의 길이다.

 

활엽수실나지들은 밤새워 회색빛하늘에 묵화를 그리느라 세털 몽땅 빠졌다. 파도치는 능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지들에 떠받혀 장대한 묵화병풍이 됐다. 자연이 빚은 걸작이라.

 

 

-내변산능선-

 

어느 봄날 부안현감 심광세가 모친상을 당해 벼슬을 사양하고 서울로 돌아가자, 이별의 애잔한 심정을 읊은 시도 심금을 울린다.

 

<스스로 한스러워(自恨)>

봄바람에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       東風一夜雨
버들과 매화가 다투어 피네              柳與梅爭春
이 좋은 날 차마 못할 짓은                對此最難堪
술잔을 앞에 두고 임과 이별하는 일이라네" 樽前惜別人 

 

 

 

된비알을 오르다 뒤돌아보며 감상하는 엷은 안무속의 봄 풍경을 매창과 허균과 심광세도 심취했을 터~!

허균은 매창이 병 앓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명월암을 찾아 참선을 하라고 당부하는 편지를 했었다.

허균의 매창을 향한 사랑은 시쳇말로 절절한 프라토닉러브였다.

어쩜 두 남녀의 교분이나 동행유람한 날들은 촌은보다 훨씬 많고 자상하여 부안삼절에 촌은보다 허균이 들어야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관음,세봉, 옥녀봉능선-

 

 

허균과 매창의 첫 만남은 1601.7.23일 비오는 날이었다. 그가 조운판관이란 직책으로 부안에 들렸을 때다. 천하의 한량인 허균이 매창에 홀딱 반한 건 그녀의 미모가 아니라 재능이었다.

시를 짓고 거문고타는 매창에 빠져들어 밤을 새운 허균 이였다.

 

저 멀리 희멀건 관음봉골짝에서 옥녀담이 갸웃거린다. 경사진 너럭바위에서 조망하는 내변산능의 파도너울은 일상을 까마득한 망각의 해일로 잠재운다.

 

 

 

 

1606, 절친인 심광세가 부안현감으로 있을 때 허균은 이곳에 와서 셋이 변산유람을 했다.

이때 세 남녀는 이 너럭바위에 올라 자릴 깔고 풍류를 낚았을 테다.

 

이미 구면인데다 이곳현감까지 낀 행락인지라 그들의 격의 없을 풍류가 눈에 잡힐듯하다. 아니 저기 바위사이에 뿌릴 내려 옥녀담을 향해 초록보자기 흔드는 듯한 소나무는 싹이나 텄을까?

 

-옥녀담 뒤로 관음봉능선-

 

 

1606~1608년에 있었을 매창의 변산유람엔 <어수대에 올라(登御水臺)>, <천층암에 올라(登天層菴)>, <월명암에 올라(登月明庵)>, <봄날을 원망하며(春怨)> 등의 시를 지었지 싶다.

 

<어수대>

천년 옛 절에 임은 간데없고

어수대 빈터만 남아 있고나

지난일 물어볼 사람도 없어

바람에 학이나 불러볼거나

 

-작년11월의 어수대 못-

 

나는 단풍 짙은 작년가을 L과 어수대를 찾아 매향을 생각하며 낙서 한 줄을 끌적 댔었다.

 

단비로 몸 씻고

화사하게 몸치장한 채

우릴 맞은 어수대

 

매창이 시 한 수 읊는

안개 속 만추

그 고운 꽃길에 발 딛기 황송해라

 

젖은 비단길섶에

첫 발자국 남긴

너와나 꽃비가 머리에 앉는다

 

 

-작년11월의 어수대 입구 단풍-

 

 

선인봉 관음봉 세봉 옥녀봉 덕성봉이 옅은 실금으로 하늘금을 만들어 산능파도를 잠재우고 있다.

영을 넘어 산허리를 파고드는 조붓한 길은 평탄하기 그지없고, 서북쪽을 향하는 너울파도는 하찮은 아집에 안달한 자신을 깨닫게 한다.

 

월명암에 들어서지 털보삽살개가 어슬렁어슬렁 마중을 나온다. 바짝 다가서서 뭔가를 묻는 시늉을 내며 졸랑대는데 멍청한 난 놈이 귀찮을 뿐이다. 저놈한테도 불성이 있을까?

 

 

 

 

종루 옆 전나무에 기대 조망하는 사위는 너무나 아득하다. 무릇 캄캄한 밤에 달을 맞으며 선정에 드는 스님들은 기가 막힐 것이다.

매창은 허균의 당부처럼 여기서 밤중에 달을 맞으며 참선에 빠져 치유를 했을까?

 

더는 아스라이 별빛 흐르는 북녘 끝 공주땅을 어림하며 허균과의 풍류를 회억하면서 병마와 싸웠을 것 같다. 차마 자신의 명이 다 했을거라곤 상상도 하기 싫었을 테다.

 

-월명암종루와 전경-

 

 

1608, 허균이 공주목사로 있을 때도 심광세와 같이 백마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을 했었는데, 허균이 곧 파직돼 부안 우반동 정사암에 머물자 세 남녀는 단짝이 됐던 것이다.

 

허나 허균은 그해 12월 승문원판교에 임명 돼 한양으로 떠나고, 이듬해인 16091월에 매창에게 편지 한통을 보냈다. 매정한 촌은보다 살가운 허균이였다.

 


 
아가씨는 보름날 저녁에 비파를 타며 산자고를 읊었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하지 않고, 바로 윤비(尹碑) 앞에서 하여 남의 허물 잡는 사람에게 들키고, 거사비(去思碑)를 시로 더럽히게 하였는가. 그것은 아가씨의 잘못인데, 비방이 내게로 돌아오니 억울하오. 요즘은 참선(參禪)은 하는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료.”


그리고 그해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9월에 다시 편지를 보냈다

 

 

 

계랑에게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 아가씨는 반드시 성성옹(惺惺翁 허균 자신을 가리킴)이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걸세. 그 시절에 만약 한 생각이 잘못됐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다정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와서야 풍류객 진회해(秦淮海 ()의 진관(秦觀))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망상(妄想)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을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

 

-월명암입구 못-

 

 

통일신라 신문왕11(691)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다는 월명암은 절 이름도 부설거사의 딸 이름에서 유래됐단다.

의상대사가 중수하고, 선조26(1592)에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창하여 17년 동안 머물며 봉래선원(鳳萊禪院)을 열었다.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영지(靈地)의 선원에서 진묵대사는 후학을 양성하렸으며, 근대의 고승인 행암(行庵용성(龍城고암(古庵해안(海眼소공(簫空) 등이 참선했다.

 

-월명암&종루-

 

 

저만치의 의상봉(義湘峰), 가인관음봉(佳人觀音峰) 등의 암봉들의 아름다움이 빼어나고, 법왕봉(法王峰)의 일몰이 장관이란다.

인법당(因法堂)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운해당(雲海堂수각(水閣요사채를 일별한다.

 

전각 앞뜰의 매화가 매향을 홍건히 뿌리고, 쌍선봉을 애무하며 달려온 봄바람이 수선화의 노란꽃잎을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다

 

-월명암-

 

 

 이런 봄날 매향이 허균과 심광세와 동행하여 산상무쟁처를 찾았을 땐 진묵대사가 한참 후학들을 양성하던 때라서 월명암의 불운이 왕성했을 터다.

고승과 세 남녀의 만남에서 어떤 대담이 오갔을지 궁금하다.

 

그녀의 참선이 넘 늦었을까 아님 역부족 했을까?

1610년 무더운 여름 어느날 매창은 아깝게 요절한다. 그녀의 부음을 접한 유희경은 시를 지어 슬픔을  달랬다. 그녀가 오롯이 사모했던 연인이었다.

 

                                        -월명암대웅전과 전나무-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썹의 아가씨   明眸皓齒翠眉娘
홀연히 구름 따라 간 곳이 묘연쿠나      忽然浮雲入鄕茫
꽃다운 혼 죽어 저승으로 돌아가          終是芳魂歸浿邑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주리  誰將玉骨葬家鄕

마지막 저승길에 슬픔이 새로운데         更無旅櫬新交呂
쓰다 남은 장렴에 옛향기 그윽하다        只有粧瞼舊日香
정미년(丁未年)에 다행히도 서로 만나 즐겼건만 丁未年間行相遇
이제는 애달픈 눈물 옷만을 적셔주네"              不勘哀淚混衣裳

                   -정비석 역-

 

 

 

  

 

 

더위 한창인 여름날, 허균도 매창의 부음을 전해 듣는다. 작년 섣달 느닷없이 석별한 그들은 만날 것을 언약했었지만, 관직에 얽매어 바쁜 나머지 해후하질 못한 채 이처럼 빨리 그녀가 영면할 줄을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계랑(桂娘)의 죽음을 슬퍼하다.
계생(桂生)은 부안(扶安)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개결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담소하고 가까이 지냈지만 난()의 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 죽음을 듣고 한 차례 눈물을 뿌리고서

율시 2수를 지어 슬퍼한다

 

-명월암뜰악의 노랑상사화-
 
신묘한 글귀는 비단을 펼쳐 놓은 듯   妙句堪擒錦
청아한 노래는 가는 바람 멈추어라    淸歌解駐雲
복숭아를 딴 죄로 인간에 귀양 왔고   偸桃來下界
선약을 훔쳤던가 이승을 떠나다니     竊藥去人群
부용의 장막에 등불은 어둑하고        燈暗芙蓉帳
비취색 치마에 향내는 남았구려        香殘翡翠裙
명년이라 복사꽃 방긋방긋 피어날 제 明年小桃發
설도의 무덤을 어느 뉘 찾을는지       誰過薜濤墳

처절한 반첩여의 부채라                  凄絶班姬扇
비량한 탁문군의 거문고로세            悲涼卓女琴
나는 꽃은 속절없이 한을 쌓아라       飄花空積恨
시든 난초 다만 마음 상할 뿐           衰蕙只傷心
봉래섬에 구름은 자취가 없고          蓬島雲無迹
한바다에 달은 하마 잠기었다          滄溟月已沈
다른 해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엔        他年蘇小宅
낡은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해”        殘柳不成陰

 

-산자고-

 

 

천하의 난봉꾼이기도 했던 허균은 기녀(妓女)와 하룻밤 놀아난 것도 미주알고주알 글쓰길 좋아해 그게 문제 되어 관직에서 파면되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매창을 사랑하며 밤을 세면서도 살을 석질 않았음을 자랑하듯 기술했던 것이다.

 

그녀의 고매한 인품을 더 사랑했다는 이지적인 교감, 프라토닉러브를 자신도 매창도 사랑했던 모양이다.

남녀가 몇 날 며칠을 동반 유람 다니면서 뜨거운 가슴으로 연모했기에 십년동안을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그녀의 비명에 얼마나 애통해 했을지

 

 

 

38세의 완숙한 여인인 매창이 뛰어난 재주를 다 피워보지 못하고 죽자 거문고와 함께 부안의 봉두메에 그녀를 묻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매창이뜸이라 불렀다.

 

<매창뜸> -가람 이병기-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줌의 항기로운 이 흙 헐리지 않는다.

 

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아래 홀로 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羅彩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았다.”

 

 

 

 

월명암사찰주위엔 노랑상사화가 모진 겨울을 버틴 채 짙푸르게 성성하다. 그리운 임이라도 맞을랑가 싶게 반들반들 단장한 이파리는 매창의 청상(靑孀)넋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봤다.

 

매창은 촌은을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평생 동안 두 번 만나 짧은 정염을 태웠을 뿐 이십팔 년간을 서로 상사만 했었다.

살을 섞는 사랑보다도 얼을 섞는 사랑이 고매한 것은 그 향기가 훨씬 오래도록 기려지는 탓일 것 같다.

해서 신석정선생은 부안삼절에 허균이 아닌 촌음을 상정했지 싶다

 

 

 

    
이매창(李梅窓)1573년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태어난 해가 계유년(癸酉年)이어 계생(癸生, 桂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고, 자는 천향(天香)이며, 호는 매창(梅窓)이라 하였다. 조선조 여성들은 당호(堂號)만 갖게 마련인데 매창에겐 이름, , 호까지 있었으니 대단한 출세(?)인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 교산 허균(蛟山 許筠), 묵재 이귀(黙齋 李貴), 유천 한준겸(柳川 韓浚謙), 덕현 심광세(德顯 沈光世), 석주 권필(石洲 權鞸) 같은 저명한 인사들과 깊이 교우했다.

 

 

 

동백기름 바른 청상의 머릿채 같은 청초한 이파리사이로 꽃대가 솟아 노란꽃잎을 피우자마자 이파리는 시들어버리기에 상사화다.
매창이 파묻힌 뜨거운 여름은 상상화이파리도 거둬들이고 노랑꽃을 피울게다.

허균이 매창을 다시 찾은 건 별시문과 대독관이 임명되어 조카를 급제시켰다는 혐의로 함열로 유배되면서다161111월에 귀양에서 풀린 허균은 그때 부안엘 갔으나 매창이 없어 허전하기 한량없었다.

 

매창은 비록 요절하여 불행한듯하나 그녀를 기리는 세인들이 하 많아 영원히 살아있음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은 사랑을 잃은 게 아니라 잊혀진 여인이다.

 

-옥녀담-

 

 

옥녀담을 향한다. 갈수기인데도 담수호는 담청색깔이다. 옥녀담을 이룬 직소폭포까지의 호수갓길은 매창이 즐겨 걷곤 했던 곳이리라.

 

그녀의 단 하나의 오롯한 사랑 연인은 촌은 유희경(1545~1936) 이였다. 28세란 촌은과의 나이차이도 사랑 앞에선 한갓 숫자일 뿐이었다.

고경명의 의병모집소식에 광주에 내려가던 촌은이 부안에 들려 매창과의 첫 만남에 그녀가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

고 물었을 때, 그와 백대붕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 놀랐다.

촌은은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나 매창을 만나 파계하였다

 

-직소폭포-


그녀에게 시 한 수를 선시했다.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曾聞南國癸娘名
글재주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詩韻歌詞動洛城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今日相看眞面目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却疑神女下三淸

 

촌은도 천민출신이었으나 대시인이자 예학의 최고봉에 올라 사대부들과 교우하며 사랑을 받았다. 그들이 세대차를 뛰어넘어 연인이 된 건 천민출신이란 태생적인 동질감 탓이 컷을 테다.

첫 만남의 통분도 잠시 촌은은 임진왜란과 동시에 이별한 후 소식이 감감했다.

 

-월명암 종루-

 

소나무 잣나무는 아름다운 인연 맺고
생각하는 나의 정 바다처럼 깊건만
강남으로 오는 글월 끊기니
한밤중에 나 혼자 애가 타누나.” 라는 이매창의 시에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娘家在浪州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我家住京口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相思不相見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腸斷梧桐雨 라는 시를 보낸다.

 

 

세월은 덧없고 촌은은 남자인데다 예학의 거두란 멍에 탓 이였든지 15년 후에 잠깐 재회했을 뿐이다. 해서 오늘날 촌은보다 매창이 사랑받는 까닭은 오롯한 사랑의 순정 탓이리라.

이때 매창이 남긴 유명시가 이화우 흩날리 제---”.

 

 

 

 

흰 벚꽃이 터트리길 시작했다. 며칠 후면 이화우 흩날리듯 할 참이다.

직소폭포의 물보라 속에 매창이 아른댈 것만 같다. 폭포가 멈추고 옥녀담이 마르지 않는 한 매창의 사랑얘기는 옥류구곡에 안개꽃처럼 부유할 테다.

안장바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매창이 사람 못잖게 자연을 사랑했듯이 내변산을 사랑하라고 하나 싶다.

2016. 04. 03

 

-안장바위-



# 허균의 절친이기도 했던 권필은 매창에게 <여자 친구 천향에게 주며(贈天香女伴)>라는 시를 지어 선물했다.


선녀같은 자태가 풍진 세상에 어울리지 않아   仙姿不合在風塵
홀로 거문고 껴안고 늦은 봄을 원망하네         獨抱瑤琴怨暮春
줄이 끊어지면 애도 끊어지니                        絃到斷時腸亦斷
세상에 소리 알아주는 사람 찾아보기 어렵네    世間難得賞音人


저명한 문신이 기녀매창을 여반(女伴)이라고 칭한 파격은 오직 그녀 뿐이다.

 

-작년11월의 어수대-

 

-작년11월 어수대탐방 때의 농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