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호숫길 & 삼전도(三田渡)의 치욕


석촌호숫길에서 얼쩡댄지 얼마만인가? 10년 전이니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석촌호수는 강남의 심장으로 롯데월드타워는 서울의 랜드마크가 됐다. 하여 석촌호수 일대는 젊음이 넘치는 낭만과 꿈이 솟는 곳이다. 옛 송파강을 매립하여 잠실분지를 조성할 때 석촌호수를 남기지 않았다면 강남은 삭막한 아파트촌이 됐을 테다. 개발이 능사는 아니다.



석촌호수는 중간에 다리를 만들어 동호(東湖)와 서호(西湖)로 나뉘면서 다리 밑(브릿지게이트)은 수로다. 호수의 물은 한강에 수도관으로 연결한 인공호수로 수심이 4~5m, 호수둘레가 약 2.5km란다. 석촌호숫길을 소요하며 즐기는 레이크뷰와 신선한 공기는 첨단 대도시 속의 유토피아다.



옛날 충청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한양(서울)나들이를 할 때 석촌호수 자리께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해서 이곳은 유동인구가 많은 큰 나루터였다. 하여 송파진은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건어물이나 농산물 등을 사고파는 큰 시장으로 발전하여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큰 시장이 됐다.



유동인구와 물산의 집산지인 송파나루는 인조 14년(1636)에 청 태종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 병자호란을 일으키자 인조는 허겁지겁 나룻터를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한다. 청 태종은 이곳 나룻터에 진을 치고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군과 인조를 포위 고립시켜 아사(餓死)작전에 든다.



항복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나룻터에서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를 했던 치욕의 장소이기도 하다. 글고 청 홍타이지는 그 치욕의 장소에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라고 명 하지만 비문을 쓸 신하가 없어 인조와 조정은 고민한다. 누가 청 황제를 칭송하는 글을 쓰겠는가?



청의 득달 속에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은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이른바 ‘서울 삼전도비’이다. 이 삼전도의 굴욕적인 항복은 소현세자가 포로로 심양으로 갈 때 시강원 인원 300여 명과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인질로 청에 끌려가는 –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치욕까지 감내해야 했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심양에서 황무지 개척사업과 경영 구실로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해 쓰며 자급자족한다. 나아가 각종 외교적 현안에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며, 조선인 포로 쇄환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신부 아담 샬과 교류하며 가톨릭에 호의를 품어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조선의 세자로서 부끄럽지 않고 현명하게 처신한다.



서양 신문물을 개화한 소현세자가 1645년 2월경 약 9년 만에 귀국하지만 인조는 환영행사도 외면한다. 부왕을 위해 인질을 자청한 세자가 귀국하자 왕위를 넘보는 정적으로 내치는 천륜파천왕이었다. 인조의 청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는 현군이 되어 귀국한 소현세자를 되려 제거할 대상으로 여겼지 싶다. 심양에서 앓은 지병이 귀국하여 심신불안으로 더 악화된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3달만에(인조 23년)에 학질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 축출로 뜬금없이 왕에 오른 인조는 애초에 편협하고 쪼잔한 인물이었다. 그가 심양에서 귀국한 소현세자를 지병치료에 올인하게 하고 순리대로 왕위를 계승했다면 조선은 더 융성해졌을지 모른다. 송파나릇터의 송파정에서 동호에 드리운 스산한 겨울풍정을 일별하면서 380여년 전의 격동의 시간을 상상해봤다. 편협하고 포용성이 작은 독불군주는 나라를 망친다는 실증을 우린 지금 또 한번 절감하고 있다. 2026. 0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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