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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울지마, 톤즈>

<울지마, 톤즈>


-*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의 1%만이라도 그들과 나누면 얼마나한 혜택이 될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많습니다.단지 세상에 쓰다남은 1%를 없는 세상으로 연결하는 작은 다리가 되어 보기로 했습니다. *- 이태석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시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남부수단 톤즈의 아이들이 커다란 눈망울을 적시며 합창한 우리의 가요는 고인이 된 신부의 영전에 바치는 진혼곡(鎭魂曲)이 돼 나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톤즈의 주민들 - 오랜 전쟁과 가난 속에 질병으로 찌들린 상처받은 영혼을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던 질곡의 생존현장에 뛰어든 이태석 신부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베풀 수 있음이 사랑(성직)” 이란 걸 깨치고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곧장 아프리카로 떠났었다. (2001. 12)

그가 톤즈 마을에서 절망 속에 먼지처럼 살아가는 주민들에게 할 수 있는 건 희망과 사랑을 심는 일이였다.

손수 벽돌을 찍어 교회보단 학교와 병원을 세웠고, 절망의 늪에 방치 됐던 한센병 환자들에게 사랑을 실천한 신부이기보단 재림한 예수였다.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어린이들의 황폐한 영혼에 감성을 일깨워 희망의 새싹을 피우기도 했던 신부는 의사였고, 교사였으며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분, 이태석 신부는 1년 전(2010. 1. 14) 48세의 나이로 아깝게 선종(대장암과 1년 여간 투병)했었다.

그런 신부의 생전의 톤즈에서의 짧은 ‘사랑심기’ 삶을 다큐멘터리로 찍은 영화<울지마, 톤즈>를 보면서 나는 무위도식하는 내 자신의 삶이 부끄럽고 한심한 것 같아 멍한 가슴인 채 톤즈 아이들이 부르는 ‘진혼곡’ 속에 한참을 머물고 있었다.

살 만큼은 살아온 내가 이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 달 전인 12/7일 반 년동안의 위암치료를 마치고 이제 6개월마다 검진을 해야하는 난 오늘도 덤으로 얻은 생이 아닌가).

극장을 나서 귀가하면서 도심 곳곳에 우뚝 선 웅장한 교회들과 ‘예수’를 팔아 부귀와 명예(?)만을 탐하는 교역자들을 생각해 봤다.

예수는 생전에 교회에서 설교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에서, 황야에서, 아파하는 자들 속에서 그들보다 더 낮은 자세로 사랑을 실천했었다.


이태석 신부가 한센병 환자들의 뭉그러진 발에 일일이 그들만의 신발을 본 떠 만들어 신기듯 예수는 한 없이 낮게 엎드려 병든 삶을 치유했었다. 신부는 그들에게 예수였다.

신부는 톤즈마을의 주민들을 위해 온 몸을 불살라버린 진정한 예수였다.

다만 하나, 하느님은 있기는 한 걸까?

나 같은 사람은 놔두고 왜 할일 많은 신부님은 그토록 빨리 부르셨을까.

더는 예수를 팔아 호사를 탐하는 교역자들은 방치하면서 말이다.

크리스천이 아니기에 하는 의심? 어리석은 자문일까?

20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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