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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기쁨 바이러스를 주는 사람들

 

  기쁨 바이러스를 주는 사람들

 

 

새해(기해년)동트기 한나절 전, 우리들의 진정한 스승 한 분이 영면하셨다. 그 분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아야 함인가를 실천으로 보여준 참된 인간상이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1984 ~1991)기계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황필상박사는 청계천민빈촌출생으로 궁핍한 고학생으로 학교를 다녀 26살 때 아주대 기계공학과에 늦깎이 입학했다.

 

 

그 후 프랑스국비장학생으로 유학,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원에 교수로 재직한다. 교수직에서 물러난 황박사는 1991년 생활정보지'수원교차로'를 창업했다. 황 박사는 자신처럼 어렵게 공부하는 고학생들을 위해 할 일을 궁리하다 2002년 현금15억원과 수원교차로주식200억원(90%)을 모교인 아주대에 기부했다.

 

 

아주대는 비영리법인구원장학재단을 설립하며 전국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 및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는데, 215억원이란 거액기부금 못잖게 심금을 울리는 건 황 박사자신의 시신기증이다. 황 박사는 일찍이 1994년 모교인 아주대의료원에 자신의 시신기증서약을 했던바 진정한 기부문화를 실천한 분이셨다.

 

 황필상 박사

빈손으로 태어나 노력으로 일군 자신의 모든 재화와 육신까지 사회에 기부환원 시키고 빈손으로 떠나는 숭고한 일생은 우리들의 삶의 지표로 귀감삼아야 할 명제이리라. 황 박사님의 참살이 일생을 음미하다 얼마 전(2018.10.25) 과일 팔아 모은 전 재산 400억원을 고려대에 기부한 노부부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나같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이 대학교에 기부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라고 말한 아흔한 살 김영석씨와 여든세 살 양영애씨 부부가 안암동 고려대본관에서 진행된 기부식 스냅사진이 아른댄다. 평생동안 과일장사를 하며 모은 전재산 400억원을 가난한 학생들이 훌륭한 인재가 되는 밑거름으로 쓰이길 바란다는 노부부는 이 시대의 성자(聖者)란 생각이 들었다.

 

김영석, 양영애씨 부부

평강태생인 실향민 김영석씨는 17살에 6·25한국전쟁에 참전한 국가유공자로 경북상주가 고향인 양영애씨를 만나 1960년대부터 종로5가에서 손수레과일 장사를 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억척스럽게 장사하여 조금씩 모은 돈은 청량리 상가건물매입에 쓰고, 그렇게 하나둘 매입한 건물이 큰돈이 됐지만 절약`근검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소금호수

 

슬하의 두 아들은 미국유학 후 거기서 자리 잡았단다. 어렵게 모은 재산을 자식한테 물려주기보다는 뜻 깊게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서 인근의 고려대학교를 찾았단다. 돈이란 건 자기가 힘들여 벌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재산 많이 물려준다고 더 잘 되는 게 아니다. 잘못하면 자식 신세까지 망치기도 한다.고 양영애씨는 말했다.

 

"50년 전엔 청량리에서 내가 젤 밑바닥 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가장 칭찬받는 사람이 됐으니 이만하면 후회 없는 인생 아닌가요"라고 웃으시며 말한 양영애씨가 눈에 선하다. 노부부가 과일 팔아 모은 돈의 생명이 어려운 학생들의 생명의 기운이 돼 훌륭한 인재가 되도록 고려대학교(염재호 총장)는 명심해야 할 테다.

 

그보다 훨씬 앞서 2009년 송금조 (주)태양회장이 305억원을 부산대학교에 기부했었다. 1924년 경남 양산 빈농출신으로 초등학교졸업 후 날품팔이로 시작 자수성가한 중견 기업인이다. 회사엔 사장실도 없고 체육복 한 벌로 1년을 사는 자린고비 송회장이 부산서 번 돈 부산에 환원한다면서 부산대학교에 기부했다. 송회장은 고향인 부산대학양산캠퍼스발전에 써달라고 했다

 

 

근디 부산대학교 김인세 총장은 그 돈으로 캠퍼스공사를 하면서 업자로부터 1억원 뇌물을 받아 구속되는 참담한 일도 있었다2017년에 결손아동기부금 127억원을 횡령한 새희망씨앗, 딸 치료비로 12억원을 기부받아 빼돌린 이영학사건 등이 '기부포비아(공포증)'를 야기하여 기부금사용에 대한 불신으로 번져 기부참여율은 201136.4%에서 2017년엔 26.7%로 줄었단다(통계청). 기부금사용에 대한 투명성확보와 감독에 정부는 발벗고 나서야 한다.

대기업이 공익재단(126곳)을 만들며 각종 세제혜택을 받고도 정작 공익사업에 쓴 돈은 전체지출금의 25%였다. MB의 청계재단도 장학사업에 쓴 돈은 총자산의 0.25%(2017년도)로 매년 적어지고 있단다. 공익재단의 이름하에 축재의 수단 내지 친족을 임직원으로 채용 고액급여를 챙기는 등 재단설립명분에 새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주윤발

128, 대만 메스컴들은 주윤발(63)"전 재산 56억홍콩달러(8100억원)를 기부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다. 그저 잠시 내가 보관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주윤발은 한 달 용돈으로 800홍콩달러(12만원)를 쓰며 자가용 없이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등 근검절약생활로 이미 회자된 월드스타다.

 

 

평범한 옷차림에 대해서도 "옷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입는 게 아니다. 내가 편하면 그만이다"는 소신을 밝히는 진정한 자유인이기도 했다. 소탈한 옆집아저씨인 그는 영웅본색’'와호장룡'‘황후화()'등 화제작으로 전 세계의 스타가 됐는데, 우리가 아는 (겉치장)화려한 스타답지 않은 스타 중의 스타인 셈이다.

 

 

그에 앞서 홍콩스타 성룡도 전 재산4,000억원을 사회에 환원시켜 세계를 감동시켰을 때 나는 그의 코믹엑션 한 방을 맞은 것처럼 멍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부모는 호주이민가면서 어린 그를 경극학교에 버리다시피 입학시켰었다. 또한 1987년엔 촬영중 부상으로 청력상실 했지만 보험회사에선 그의 보험요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성룡

그런 시련이 그를 대성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됐는지도 모른다. 암튼 그는 돈 모으는 것 보단 어떻게 써야 되는지를, 이런저런 봉사활동을 하면서 절감게 된다. 인생이란 '공수래 공수거'의 삶일진데 죽기 전에 해야할 목적의식이 분명해졌다. 그에겐 아들이 하나 있는데 호주에서 학업을 마치고 지금 자립의 길을 걷고 있다. 회견장 어느 기자가 물었다. 

"아들은 어쩌라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느냐?"고

"자식이 능력이 있으면 자수성가의 기쁨을 누릴 테니 더더욱 유산이 필요 없고, 능력이 없다면 물려준 재산탕진은 물론 자신마져 불행해 진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해 늘 부러워했는데 주윤발이 또 감탄세례로 뿅~가게 만들었다. 주윤발이 말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것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고 평온한 태도로 사는 것입니다. 내 꿈은 행복해지는 것이고 보통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윤발의 인생론이다. 1987년 주윤발과 결혼한 천우리롄도 남편의 재산기부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단다. 부창부수답다.

통 큰 기부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황필상 박사, 김영석`양영애 노부부님, 손금조 회장 그리고 홍콩의 월드스타 주윤발과 성룡의 삶을 엿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게 한다. 고생을 겪지 않은 삶은 진정으로 베푸는 기쁨을 터득하기 어려울 거란 점과, 사회를 감동 먹게 하는 자선행위엔 반드시 부창부수였다는 사실이다.

 

메타쉐콰이어숲 속의 무대(안산자락길)

 

감동세레만 받으며 의기소침할 필욘 없을 것 같다. 돈 없다고 탓할 것 없이 시신기증이라도 하면 될 것이다. 화장장 불구덩이에서 지글지글 타면서 사라질 몸뚱이 아닌가. 그 시신을 갈구(渴求)하는 곳에서 환영받을 수 있다. 

감동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감동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까닭인 즉 감동을 알기에~! 황금돼지해에 마음을 다 잡아 본다.

2019. 01.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