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기자기한 만추의 의상봉 ★
경남, 거창. 가좌면의 고견천은 고견계곡에 꽁무니를 대고 길을 동반한다. 한참을 올라가다 건암산장 앞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울창한 송림이 길을 내주고 그 사이로 숨은 나목에서 만추의 이파리 하나가 손짓을 하고 있다.
반시간을 올랐을까. 고견사(古見寺)가 천년의 헤인 얼을 안고 아담하게 앉아 나를 맞는다. 미니천왕문을 들어서면 우측에 또 하나 천년의 얼을 키운 은행나무가 당당하다. 최치원이 심었다는, 그 나무는 대웅전 뒤 천년 석불을 수호하다보니 그리도 덩치를 키웠는지 모르겠다. 석불도 세월만큼 허물을 벗었다.
전신과 이목구비가 세파에 닳아 이제 불심만 앙팡지게 남은 몸뚱이라. 옆의 강생원의 ‘강생원’이란 현판은 숙종의 친필이란 데 무지한 내게 별 감흥 없이 지나쳤다. 의상이 여기서(?) 참선시 매일 쌀 2인분이 쏟아졌다는 쌀굴은 한참 먼 마장재쪽이라 어쩔 수가 없다. 원효와 의상이 세운(667년) 견암사가 뿌리라 생각해선지 작은 사찰치곤 풍기는 고즈넉한 맛이 감칠 난다. 이 가뭄에 이 높은 곳의 풍성한 청정수의 맛도 일품이라. 헌데 이 절이 여느 절과 다른 점은 산님들을 위한 등산로를 산사 옆으로 에두르지 않고 사찰 속내를 관통시키고 있음이다. 은행나무며 석등이며 석불, 강생원 현판을 비롯한 ‘옛것을 보라’는 절 이름-고견사에 명실상부함이려니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속내를 샅샅이 보여준 절은 왼편에 산길을 터준다. 돌너덕길은 경사를 이루고 십여 분 헉헉 숨을 몰아쉬면 앞이 캄캄한 바위가 덮쳐온다. 천길 단애인 그 크기를 말할 수가 없다. 그는 수직 사타구니 아래에 조그맣고 깊은 옹달샘을 안고 있다. 쪽 바가지로 퍼서 숨을 돌리고 정신을 추스르면 왼편에 커다란 금부처님께서 넌지시 지켜보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마애 앞까지 오면서 혹심을 품은 자는 억 만 톤 바위를 굴러 압살시킬지도 모를 위엄을 보여주고 있는 성싶었다. 금불상을 여의고 오르는 경사로는 빡세다. 늦가을바람 피는 갈색이파리 몇 개가 나지에 매달려 햇볕 속에서 촐랑대는 한가롬을 바위동네가 감싸고 있다. 그 바위들의 폼이 우아하다. 드디어 장군봉과 우두봉을 가르는 삼거리에 닿았다. 우측 우두봉을 향하려다 난 불쑥 “어디서 봐야 소대가리처럼 보이요?”라고 빅토리오님께 물었다.

“저 아래(주차장 밖)서 봐야지요.” 듣고 보니 소대가리 찾아 나선 놈이 소대가리 보다 못한 소대가리질문[우문]을 한 셈이다. 그 우두봉은 의상대사의 명성에 개명까지 하는 풍파를 감내하려 수백m 철사다리를 걸치고 산님들을 맞고 있다. 곡예 하듯 철사다리를 오르며 조망하는 풍광은 곳곳의 바위동네의 풍정이라. 그 바위들은 위치에 따라 변모한다. 또 그 바위들은 소나무를 빼어나게 기르지도 않고 있다. 순전히 바위로만 형성된 이 급경사 바위산을 의상대사는 몇 번이나 오르내렸을까. 우두봉이 드디어 나의 발아래에 깔린다. 아니, 이젠 의상봉(1046m)이라 하자.
의상봉은 북쪽의 가야산 허리춤을 붙잡고 헤인 얼을 이어 여기다 펼쳤다. 이곳의 대간능선이 아늑하고 평안스런 것은 바위동네들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서 따뜻함을 뿜어내기 땜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마주친 영축산이 유달리 뾰쪽하다. 의상대사는 여기 정상에서도 참선에 들었을까? 대사는 현세와 과거세를 유영(굳이 선의 경계를 가름은 우리네 범부들의 착계;着界일테지만)하는 참선을 했고, 선행기(禪行期)도 꾀 길었기로 쌀굴까지 생기지 안했던가. 대사는 참선 중에 집착을 못 끊고 고비마다 현몽하는 선묘(善妙)낭자를 어찌했을꼬? 선의 경지를 모르는 나는 또 소대가릴 굴려본다. 요즘으로 치면 대사는 선묘의 죽음에 미필적고의자살범이라 해야 하나? 의상이 8년 연상인 원효와 함께 구도하러 당나라를 향하다 원효는 유명한 해골수로 갈증을 풀다 돈오불(頓悟佛)하여 돌아서고, 의상만 당나라사신 배에 타 등주(登州)에 도착한다.
등주장(將) 유지인(劉至仁)집에서 장마로 하여 두어 달 머물게 되는데, 그 집 양녀 선묘가 홀딱 반해 맘을 뺏긴다. 의상의 인품도 그랬지만 신라조국에 대한 향수가 더 그리했으리라. 선묘는 당나라 노비로 끌려오던 중 탈출하여 천행으로 유지인의 양녀가 됨이다. 선묘는 의상께 사랑을 고백한다. 의상은 선묘의 간청을 뿌리치고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들어가 지엄(智儼)스님께 사사하여 수제자 법장과 함께 화엄사상을 정립하게 된다. 귀국시(670년) 의상은 약속대로 선묘를 찾지만 그녀가 불경중이라 부러 외면하고 배를 탄다. 그걸 안 선묘가 뒤따랐으나 배는 이미 바다가운데다. 선묘는 갖고 온 상자를 바다에 던지고 자신도 바다에 뛰어든다. 이내 폭풍으로 변한 바다는 선묘를 삼키곤 상자를 의상이 탄 배로 밀어 건지게 했다. 상자를 개봉한 의상대사! 거기엔 선묘가 직접기운 법복과 편지가 있었다. “죽어서라도 님의 안녕을 지켜드리고 대덕을 본받아 따르겠다.”고 쓰여 있었다.
무사히 귀국한 의상대사는 화엄의 초조(初祖)로 우뚝 섰고, 낙산사와 부석사를 창건할 때에도 선묘낭자의 예시를 선몽 했었다. 선묘가 사랑을 고백할 때도 ‘집착을 버리세요.’라고 법어를 내렸는데 선묘는 아직껏 집착에 얽매임일까? 늘 현몽하는 선묘를 의상대사는 이곳에 와서 행한 참선에서 어떻게 다스렸을까? 이 돌대가리는 소대가리봉에서 그것이 궁금타. 별유산을 향한다. ‘별유천지비인간’에서 따옴직한 그 산정에 오르니 pm1시가 지났다.
산정에서 조망하는 주위의 바위동네는 끝내주는 멋으로 쥑여주고 있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배터리 나간 디카를 꺼내 어찌 한 컷을 담아본다. 난 때론 닭대가리도 닮아 디카 배터리 충전을 깜박할 때가 많다. 나의 그 점을, 아내의 말을 빌리면 ‘매사를 대충대충’이고 나의 알량한 합리론 들이민다면 ‘낙천적이라 그런다.’고 돌·소·닭대가리를 죄다 아우르는 거다. 이곳의 바위들은 각지고 뾰쪽한 게 없다. 대게가 두루뭉술하여 부드럽고 리드미컬한 선의 미감을 자아내고 있다. 원효와 의상의 높은 법력에 감흠 하여 바위들마저 모나지 않음이라.
또한 여기 산길은 순탄하기만 한 산책로도 아니고 고난도의 험로도 아닌, 준수한 산능을 이어가는 산자락에 군데군데 바위동네를 감상하며 푸근함 속에 아기자기한 깊은 맛에 빠져들게 한다.
별유천지-이곳을 처음 온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늦가을이 숲 바닥으로 숨어들고 파란하늘은 잿빛구름을 쓸어내다 남긴 채 산능을 타고 넘는 나지들의 손짓에, 아우성에 세월을 실어 보내고 있다는 거였다. 그 나지들을 헤일처럼 쓰다듬고 온 세월이 바위얼굴을 씻어내고 나무에 닿아선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 타원형의 금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
그 섭리가 조용하려 좋다. 그 자연스러움이 푸근하여 좋다. 그 좋음이 아기자기한 바위동네를 아우르고 있어 좋다.
의상봉! 별유산! 업장으로만 피둥피둥 살찐 내가 의상대사의 흔적이나마 내음하려 하고, 나아가선 희롱(?)하려 했던 방자함은 그들(산)의 넓은 헤인 덕이라 여김이다.
이 따스한 햇살이 천 년 전에도, 의상대사께서 여길 지나칠 때도 그러했을 터···.
그래 오늘도 행복하다. 이 산행이-.
08. 11. 23
'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려수도의 파수꾼 욕지도 (0) | 2008.12.01 |
---|---|
바이러스와의 전투 속을 찾아(속리산) (0) | 2008.11.25 |
소매물도 스케치 (환상의 섬) (0) | 2008.11.12 |
억새 숲에서의 스와핑 (화왕산) (0) | 2008.11.12 |
홍랑의 비련 좇는 철쭉 길 (한라산) (0) | 2008.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