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마당 이였던 결혼식장
4월11일은 나의 결혼기념일이다.
오늘점심을 시외 식당에서 먹는 걸로 기념일을 땜질해 버렸으나 이젠 아내도 그러려니 하고 서운한 기색도 삭혀버릴 정도로 적잖은 세월이 흘렀다.
생각하면 할 수록 그날 아내에 대한 미안함은 지금도 아니, 죽는 날까지도 말로는 다 할 수가 없겠다.
벌써 40년이 흘러버린, 1972년 그날은 난 특별히 기쁘거나 흡족해 행복에 들뜬 날은 아니었던,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 마음 조였던 우수의 날이였기 때문이였다.
이미 아니, 결혼 후에 필연코 풀어야 할, 하여 어떤 내밀한 문제도 신부에게 털어놔야 도리였음인데 입 닫은 채 나만의 짐덩이를 어쩌질 못하고 결혼에 임했던 찌질한 나였다.
허나 나의 무거운 마음과는 상관없이 결혼식장은 축제마당이어 좋았었고, 그 축제마당을 만들어준 처갓집의 정성과 열의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도 여일하다.
완도`군외`불목초등학교의 조그마한 강당, 만국기가 천정을 수놓았고 중앙통로 양쪽으론 꼬맹이들의 걸`책상이 가지런히 정렬한 채 축하객들을 맞느라 어수선했다.
난 중앙통로에 걸쳐진 오색테이프를 (난생처음으로)커팅하고 단상을 향했었고, 이윽고 입장한 (빌린 거였지만)하얀 드레스에 면사포를 쓴 신부를 맞았었다.
미인이였던 신부는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예뻤다.
막상 식이 시작되니 좀 전의 온갖 시름도 사라졌었다.
식장은 동네사람들이 만석을 이뤘고(난 신부댁이 넘 멀다는 핑계로 막내누나 내외분과 친구 두 명만 참석) 꼬맹이들은 강당밖에서 우루루 몰려다니며 창문 삐긋하게 열고 엿보는 둥 한껏 고조돼 있었다.
식장은 강당인데다 검소하고 단아하게 꾸몄고 교장선생님께서 주례까지 맡아 주셨으며 (식장사용)시간구애도 받질 안했을 뿐더러 비용도 거의 들질 안했을 터였다.
피로연은 신부댁에서 벌어졌는데 진종일 축하객들로 떠들썩한 축제의 마당이 됐었다.
내 어릴때의 동네잔치 모습 그대로가 신부집에서 펼처지고 있었다. 식장과 식순이 현대식이였다는 것 빼고는-.
먹고 마시고 한껏 취해 목소리가 높아지는 잔치는 밤늦도록 이어졌는데, 결혼식은 진정한 마을 축제로써의 한마당 이였다.
결혼은 마을사람들 잔치였다. 그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동네사람들은 친족이 아니어도 쌀 몇 되. 계란 꾸러미, 술 한 단지, 콩나물이나 다른 나물 한 시루 등을 부조하며 내일처럼 해냈고, 그래 마을사람들 모두가 모여 왁자지껄 한바탕 노는 날이 결혼식 이였는데 나의 결혼식이 바로 그랬다.
그런 잔치는 야심하도록 이어졌고 난 술이 약하다는 핑계로 자정이 넘자 자리에 누워버렸었다.
온종일 - 더는 다음 날도 잔치는 이어졌는데 친족과 동네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신랑신부는 비로써 결혼이란 인증샷을 받게 되는 거였다.
우린 연애결혼이라 서먹할 건 없었지만, 얼굴도 모르는 남녀가 처음만나 짝을 맺었던 옛날의 결혼식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라도 해야 신랑신부가 서로 안심할 수도 있어 좀더 편한 마음으로 새출발 하지 안했을까?
지금은 고지서 같은 청첩장 받아들고 식장에 가서 신랑신부 코빼기도 안 본 채 식권 받아 밥 한 끼 후딱 먹고 나오는 사뭇 삭막하기까지 한 오늘날의 결혼식이 무슨 축제고 잔치일까?
신랑신부는 예식장순서 따르느라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쫓기는 판에 어떤 생각이 일고, 무슨 기쁨이 솟겠는가?
하긴 쫓기는 시간에 난장판 같은 결혼식 끝내고 얼른 신혼여행 떠나기에 신랑신부에겐 하객들 눈치 안 보고 둘만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많아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 있는 결혼에 하객과 친족들 속에서 하룻밤 부대끼며 고된 여흥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평생에 두 번 있을 수 없는 추억 만듦일 것이다.
어쩜 지금의 각박한 결혼식은 양가 주체나 하객 모두에게 시간낭비고 헛돈 쓰느라 미친(?) 척 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결혼이란 요식행위를 치르기 위한 알량한 자기현시의 결혼문화가 된 것 같아 씁쓸하다.
그 자기위세를 떨기 위한 식장이다보니 불만이 적잖고 그 문제는 양가에 치명적인 상채기를 남기기도 한다.
그래서 그때 그날은 내 비록 아내와 처가에겐 죄송했지만 멋들어진 결혼식 마련해준 처가에 늘 감사해 한다.
어쩌다 결혼식에 참석할 때면 나의 그날이 회상되고, 그런 잔치마당이 더는 볼 수가 없는 아련한 추억으로만 끝나버릴 것 같은, 그래서 더욱 나의 결혼식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된다.
내가 벌써 두 딸을 결혼 시켰지만 현상은 나의 이상대로만 행해질 수 없음이고, 세태의 조류는 그런 부모의 생각을 애들이 좇아주는 걸 미덕으로 여겨주지도 않는다.
1972년 4월11일.
그날이 나와 아내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한 축제마당이 됐던 날이어서 좋았다.
2012.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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