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날의 향연 - 새해엔 뜻하는 바 이루소서
30일 오후 4시, 달아나는 시간을 붙들어 맬 수 없는 세밑에서 애들의 주선으로 양미옥(良味屋)에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망년을 되씹으며 세월의 덧없음을 아쉬워한다고 어떤 위안을 받을 수가 있을까? 둘째가 자릴 만들고 막내가 지네 가정에서 단신탈출(?)하여 순수 피붙이 네 명이 모인 자리니 일찍 만나야 즐길 시간이 많다고 수선을 떨면서였다. 그런다고 70대의 울`부부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무심함을 어찌할 순 없는데 말이다.
둘짼 와인 3병을 들고 조퇴(早退)한 채였다. 막낸 코로나팬데믹여행(?)을 다녀온 아내와 내가 얼마나 궁금했는지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가족이란 건 그래서 좋다. 마음고생이 심할 때 누구보다 먼저 그 아픔을 공유하려고 애쓰는 아가페 사랑 말이다. 곱창 굽는 냄새도 좋다. 우선 삼패인 잔을 부딪쳤다. 와인 잔을 제공하고 와인 병 하나에 수수료로 1~2만원을 받는 식당이 있는데 둘짼 그런 식당을 선호한다.
양미옥도 그런 식당이었다. 호텔에서 마시는 와인 값보단 저렴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이다. 퇴근시간 이후엔 양미옥도 만석이 됐다. 울처럼 가족단위 손님이 대세인 듯싶었으나 달떠있을 예년의 망년분위기 같지는 않았다. 금년은 코로나팬데믹 탓에 여행다운 나들이 한 번 못한 방콕생활로 근교산행하며 산행기 쓰는 게 낙이고 보람이라면 보람이었을까!
집안에서 식구들과 공유하는 시간이 많아 얻는 평안이 행복한 삶의 바로미터란 걸 새삼스럽게 자인한 해였다. 식구들과의 소박한 시간에서 음주(飮酒)는 시답잖은 흉금까지도 털면서 한 울속의 피붙이임을 절감하는 끈끈한 시간이란 걸 깨닫기도 했다. 가능한 술자리를 피했던 내가 음주의 살가운 매력에 눈뜬 것도 금년이다. 술기운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한순간에 너털웃음 짓게도 한다. 반면 음주 탓에 야기되는 불상사와 불행은 매일 매스컴을 장식하기도 하고.
갈비와 대창을 추가주문 시켜 와인을 비우니 9시가 다 됐다. 2차 행선지는 울`집이다. 둘째가 다시 와인 세병을 가져왔다. 저녁 미팅약속 끝난 J가 총알같이 달려와 합석했다. 애주가 J가 있어야 아내는 더 신바람이 나고, 파안대소의 분위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소믈리에 뺨 칠만한 와인박사(?)이기도 한 J는 진정한 애주가이면서 월드비즈니스 맨이다.
위스키와 맥주문화가 밴 아일랜드태생인 J가 한국시골 풍정이 물씬한 울`집 분위기에 빠져 창시 꺼내 보이며 공유하는 시간은 모두가 행복에 드는 힐링순간이 된다. J에 의하면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의 지중해연안엔 포도주가 발달했고, 독일과 영국 등의 유럽북반부는 위스키와 맥주문화가 발달했단다. 고대 그리스에서 ‘심포지엄’이라는 단어는 연회(宴會) 즉 ‘술을 함께 마시는 잔치’를 의미한다.
아시아권에선 중국은 독한 백주, 일본은 쌀로 빚은 ‘사케’, 한국은 소주문화가 발달했는데 애주가가 많기론 우리나라가 선두일 거란다. J가 갖고 온 와인2병까지 비우는데 새벽2시가 넘었다. 그래도 일어설 줄을 모른다. 오후4시부터 시작한 ‘심포지엄’에 나도 줄창 버티고 있으니 주당에 입문 한 셈이라고 식구들이 말풍선을 태웠다. 실상은 내가 술맛을 즐겨서라기 보단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초칠까봐, 뚝심과 인내심을 발휘한다는 걸 알아챘으면 하는 은근한 바램도 기대하면서다.
술자리가 길어지면 술이 술을 마시게 되고 어느 때부턴 자신까지도 마시게 된다. 과음이 빚는 온갖 사회적 폐해 탓에 금주(禁酒)운동이 지피기도 했지만 성공한 역사적인 사례는 어디에서도 없다. 조선조 영조대왕은 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하자 금주령을 내렸다.
“술을 빚은 자는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술을 사서 마신 자는 영원히 노비로 소속시킬 것이며, 선비 중 이름을 알린 자는 멀리 귀양 보내라” <영조실록>
10년간 지속된 금주령은 흐지부지 됐지만 영조는 금주와 근검절약의 생활덕인지 83세까지 장수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금주운동을 펼쳤는데 이유는 적대국인 독일계이민들의 양조업을 뭉개 독일로 흘러드는 전쟁비자금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1919년 제정된 양조와 유통을 금지한 연방수정헌법 18조는 마피와와 범죄조직의 불법제조와 유통을 키워주는 독버섯을 키우는 숙주꼴이 됐단다.
밤새워도 좋다할 J의 애주벽(愛酒癖)은 지난 번 연회 때 남겨둔 조니워커블루 반병을 꺼내 바닥을 본 뒤에 끝냈다. 새벽3시였다. 모두 대단한 애주가들이다. 서로가 흉금을 털면서 파안대소 속에 이심전심을 공유하는 허물없는 시간은 행복을 만끽케해 심신을 풍요롭게 한다. 비즈니스가 일상인 에뜨랑제 J는 특히 파안대소할 자리가 그리울 게다. J를 보듬으며 유안진의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란 에세이가 떠올려본다.
31일 오후5시, 우린 다시 뭉쳐 불란서식당 몽셰프(Mon Chef)에 들어섰다. 부부가 파리유학 중에 만나 결혼한 후 광화문 고급주택가에 아담하게 차린 식당으로 율커플의 단골점이다. 엊밤 새벽까지 이어진 향연 탓에 음식에 대한 식욕이 제로상태인 몸뚱이를 ‘약속은 약속이다’라며 예약도 약속이란 핑계로 몽셰프를 노크했다. 셰프부부가 반갑게 맞아준다. 서빙을 담당한 여주인 - 마드모아젤의 의상이 파리지엔느도 셈 낼만한데 파리시가지 사진으로 실내장식한 분위기와 한껏 매치된다.
깔끔하고 영양가 높은 독특한 코스요리에 와인 잔을 부딪친다. 아낸 입맛이 없다면서 음식과 와인잔을 젤 빨리 비우는 왕성한 식욕자랑(?)으로 식도락을 일깨워 분위기를 일신시킨다. 울`부부가 건강한 소이는 하루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들면서 두 시간쯤의 트레킹 일과를 일상화한 삶일 테다. 거기에 율커플의 극진한 효심은 우리가 아쉬움이 없는 생활을 꾸리게 하고 있어서다. 행복한 노년의 생활이란 건강과 자식들의 관심이 절대적이다.
율커플은 아까 이태리제 오버코트 MORIANO를 직구하여 아내에게 선물 패션쇼(?)를 연출했다. 독특한 복고풍의 연푸른 물색코트를 걸친 아내는 기쁨이상의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들은 박수를 쳤다. 엉성하게 짜여 진 각본에 의한 리허설 하듯 말이다. 아낸 새 옷차림 그대로 몽셰프에 들어서면서 망년의 향연을 앙팡지게 즐기고~! 선물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의 기쁨이 훨씬 더한다. 그걸 지켜보는 절친들의 눈빛도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아내의 기쁨은 행복한 가정의 원천이라. 행복한 섣달그믐날, 나를 아는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리며 행복하길 기원한다. 이천이십일 년 십이월 삼십일일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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