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곡폭포 설경 속에서
구곡폭포 설경 속에서
설을 쇤다고 귀가하여 이틀째 날 새벽 커튼을 열었다. 여명은 한가롭게 눈발을 날리면서 온 누리를 하얗게 꽃피우고 있었다. 정원의 수풀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소복차림 하느라 속살댄다. 어딜 갈까? 마음은 벌써 개 넋이 된다. 어딜 간다? 서울근교 설경들이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속에 춘천 봉화산 구곡폭포가 어필한다. 구곡폭포 빙벽을 타는 클라이머들의 스릴을 공감하고, 강촌역에서 구곡폭포까지의 십 여리 눈길정취에 빠져드는 겨울 낭만이 파노라마 됐다. 나는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춘천행열차 차창에 스치는 설경과 구곡폭포 십리 길의 눈꽃 트레킹을 한 번쯤은 즐기곤 했다.
서울을 빠져나간 열차가 강원내륙을 내달리자 눈 날리는 설국이 펼쳐진다. 강촌역에 내리자 오후1시, 휘날리는 눈보라에 온통 사계가 희뿌연 은빛세계다. 강촌~구곡폭포 십리산책 길에 들어서자 분패치는 눈발 속에 달랑 나 혼자다. 재설차가 지나간 하얀 눈길(도보+자전거전용길)에 단 한 사람의 발자국만 찍혔다. 분패치는 눈발이 안경에 달라붙어 고슴도치 행군을 한다. 눈 많이 내리기로 유명했던 내 고향(영광) 초등시절의 아침등교길이 문득 떠올랐다. 발목까지 쌓인 눈 속을 추위와 싸우며 기어코 등교했던 추억의 파편들이 아련히 겹쳤다. 지푸라기 새끼줄로 칭칭 동여맨 고무신발에 마포부대를 뒤집어쓴 채였다.
환장하게 시려 반 고드름 된 손이였으니 장갑도 안 끼었지 싶다. 암튼 그렇게 나는 6년간의 등교로 졸업식에서 ‘6년정근상’을 탔었다. 거의 아버님의 열정이 빚은 결과였다. 낼 모레가 설날인데 초등학교 때의 설날은 왠지 젤 좋고 기다리기 지치기도 한 명절이었다. 초등3년 때의 설날을 나는 죽는 날까지 잊을 수가 없으리라. 설 닷새쯤 전에 부모님은 영광읍장에 다녀오시면서 운동화 한 컬레를 사와 내게 선물하셨다. 운동화를 받아 든 감격은 내 일생에 젤 벅차고 황홀한 흥분으로 각인됐다. 검정 천과 노란 생고무바닥이 붙은 운동화둘레는 하얀 띠를 둘렀는데 나는 그놈을 신주 모시듯이 방 윗목에다 모셔놓고(?) 설날을 기다리느라 애간장이 탔다.
그놈의 설날은 오사게 더디게 왔다. 나는 방에서 하루에 몇 번이나 운동화를 벗었다 신었다 했는지 모른다. 드뎌 설날 새벽 부모님께 세배를 올리고 얼른 운동화를 신고 동네어르신께 세배올린다고 마당으로 나섰다. 운동화 젓는다는 어머니의 볼멘소리가 끊겼다. 눈길고샅을 걷다가 뜀박질도 하다 강아지처럼 날뛰었다. 근디 그렇게 기다리던 설날이 심드렁해진 건 동네친구들이 추워서 밖에 나오질 않아 자랑할 참이 없어서였다. 내일 등교 때까지 설날은 굼벵이처럼 더디 흘러갔다.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뽐낼 내일 기다리기가 그렇게 긴 하루란 게 심통이 났다. 그땐 음력설이라고 하루 쉬었다.
담날 아침, 등굣길에 마주치는 친구들이 보는 등 마는 등해서 의기소침 한데 Y가 “따숩지?”라고 물어(?) 우쭐했던 정황이 지금도 새록새록 하다. 당시 학교엔 책걸상, 신발장도 없었다. 신발은 복도에 벗어놓고 교실바닥에 앉아서 수업을 받았는데, 나는 운동화를 갖고 들어와 앞 친구등 뒤에 모셔(?)놨다. 근디 수업 중에 담님 강**선생님이 학생들 사이를 거닐 때 나는 가슴이 콩알만 해졌다. 신발 들고 교실 맨 뒤나 복도에서 체벌서는 창피에 지례 겁먹었다. 순간 선생님이 내 곁을 지나치다 멈춰 섰다. 난 죽었다싶어 고갤 처박았다. “설에 선물 받았구나. 좋지?” 얼핏 훔쳐 뵌 선생님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설인데 차마 벌세울 순 없었겠지!’ 집에서 나의 고백을 듣고 부모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담날부턴 복도에 운동화를 놔뒀다. 첨엔 불안했지만 아무렇지도 안했다. 내가 운동화의 주인이 아니라 운동화의 노예가 됐단 자각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였다. 눈 살짝 녹은 귀가 길에 눈 위에 찍힌 물결치는 모양의 운동화 발자국을 나는 뿌듯해 했고, 그래 몇 번이나 되돌아 봤는지~! 차마 말은 안 해도 친구들의 시선은 은근히 부러운 눈치였다. 그 당시 우리들의 신발은 대게가 검정고무신이고 짚신도 꾀 신었다. 고무신이 빵구나면 헌 고무신을 오려 붙이고, 터진 양말은 헌 양말을 덧대어 기워 신기 일쑤였다.
아니 거의가 맨발이었다. 하물며 운동화라니! 어느 땐가 앞마을 여학생 S는 목이 긴 고무장화를 신고 다녀 시샘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따뜻한 어느 날 삯고개재 질퍽대는 황톳길에서 조심히 디딘 우측발밑에서 황톳물이 찍 솟아 왼쪽바지가랑이와 운동화를 망쳤다. 울쌍이 된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 대충 씻었지만 누런 자국은 그대로였다. 누나가 비눗물로 씻느라 고역을 치루고, 저녁밥 짖는 아궁이 불앞에서 나는 운동화를 말리느라 엄마와 자리다툼하며 성질냈던 경황이 지금도 또렷하다. 가난하여 더 춥고 아쉬운 게 많았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잘도 이겨냈었고, 지금보다 더 만족도가 많았지 싶다.
풍요는 행복의 바로미터가 아니고 마음이 가난하여 성취하는 기쁨은 배가된다. 강촌역에서 구곡폭포까지의 눈세계를 어슬렁대는 낭만은 승용차를 타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온 몸뚱이로 자연과의 스킨십에서 느끼는 감동의 기쁨은 오로지 자기 몫이다. 하산길 눈두덩에서 고교생인 듯싶은 남녀학생이 눈사람을 만드느라 정신 팔다가 나를 보곤 생끗 웃었다. “강촌겨울을 학생이 온전히 즐기네요!” 라고 격려했더니 고맙다고 인살 했다. 나에겐 저런 고교시절은 언감생심이었다. 해야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은 시절이었을까? 어쩜 삶이 단순 명료하기도 해서였지 싶은 때였다.
낼 모레가 설이다. 큰애와 둘째는 외국에 나가있고 막내는 시가(媤家)에 가서 울`내외뿐인 설맞이다. 명절에 식구들이 한 상에 빙 둘러앉아 얘기꽃 피우며 음식 먹는 재미가 행복인데 말이다. 그래도 나는 오늘 구곡폭포를 찾으면서 까마득한 추억 한 토막 - 생애 최초로 선물 받은 운동화를 신고 펑펑 쏟아지는 눈길을 걷는 동화속의 노스텔지어 깃발을 꺼내들고 흥얼댔다. 그리고 오늘의 낭만은 명년 설날에, 눈이 내리고 다시 복기하는 추억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명년 설엔 눈이 펑펑 내리고, 아내와 애들 모두 같이 동행하여 강촌에서 구곡폭포까지 눈밭 길을 소요하기를 기도한다. 2025. 0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