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그 여적

단옷날 성불사에서

peppuppy(깡쌤) 2025. 6. 2. 07:04

단옷날 성불사에서

 유월 초하루다, 금년을 어느새 절반을 다 잘라먹고 있음이라. 봄꽃나들이 등쌀에 산행을 잊을 뻔한 오월이었다. 점심을 서둘러 때우고 장산엘 오른다. 연둣빛세상이던 산록이 온통 진초록으로 물들어 무성한 초록이파리 사이로 뻗치는 햇빛이 실바람 결에 번갯불처럼 명멸한다. 실바람 한 파장이 감로수다. 빡센 등산길은 녹색차일 밑에서도 땀방울을 쥐어짜낸다. 중봉에 올라 몽환속의 오션`뷰를 품는다. 손수건이 땀에 홍건하게 적셨다. 5월과 6월이 하루사인데 여름이 됐나? 장산정상(초소)이 까마득해 보인다. 눈처럼 게을러터진 건 없다 했다.

창포(붓꽃)

‘오뉴월 염천(炎天) 댑싸리 밑에 늘어진 개팔자’란 말이 생각났다. 동시에 중봉능선 끝자락 골짝에 있는 성불사를 향할까 하는 번갯불 같은 생각을 했다. 몇 군데의 너덜겅지대를 통과하는 등산로는 전망도 좋지만 내리막길이라 ‘개팔자’신세가 어필되었다. 생각난 김에 낙동강생태공원의 댑싸리 밭길도 가봐야겠다. 한 시간쯤 어슬렁대 성불사에 들어섰다. 일주문이 없는 사찰이다. 성불사는 매월 ‘1인1천원 1년에 1만2천원’의 법회비로 운영된다. 글고 매년 두 차례 진행하는 방생법회 보시금도 ‘1인 1만원’이란다. ‘짠돌이 절’이다.

주지 성산스님은 “작은 보시라도 귀하게 여기고 긍휼한 사중 가풍을 세운다면 절 살림이란 어렵지 않다. 모든 사부대중이 진정한 신앙의 가치를 깨닫게 하고, 행복해 하는 일이 진정한 불사가 아니겠냐.”고 말한다. 청동관음대성상에 참배하는 신도들의 소요가 경건하다. 단옷날(端午)인 어제는 청동관음대성상과 성벽의 인등에 점등하고 순례하는 불자들이 성황을 이뤘지 싶었다. 단오(음력 5월5일)의 '단'은 처음이라는 말이고, '오'는 초닷새라는 뜻이다. 우리조상들은 홀수가 쌍수인 날을 귀하게 여겨 단오에는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성불사 절간의 기이한 구조는 요사체다락방에서 지붕뒤쪽으로 통하는 쪽문일 것이다
요사체 다락방의 쪽창문이 보인다
▲청동관음대성상과 병풍처럼 둘러싼 수만 개의 인등▼

1년 중에서 양기가 가장 왕성하고 무더운 여름을 맞기 전인 단오명절 행사는 벽사(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 및 더위를 막는 신앙적인 관습이었다. 옛날부터 단오 때 창포물에 머리를 감으면 재앙을 물리치고 머릿결이 고와진다고 했다. 창포는 개울가나 연못에 창성하게 자라나 '창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창포의 잎과 뿌리를 삶은 물은 그윽한 향기와 항균성 물질이 있어 피부질환에도 좋다. 단오는 수릿날(戌衣日, 水瀨日), 중오절(重午節),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하며 한식, 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꼽힌다.

내 어릴 적의 단옷날은 머슴들의 날이었다. 날마다 일만 죽어라고 하면서 춘궁기에 꽁보리밥도 배부르게 먹기 힘든 때에 하루라도 맘껏 놀 수가 있다는 즐거움은 지금 생각해도 신나는 날이었을 테다. 쑥버무리 떡이나 밀가루개떡이 단오절특식 이였는데 머슴들은 막걸리나 보리밥으로 숙성한 단술이 최고의 메뉴였지 싶다. 당시 울`집엔 병연 이라는 머슴이 수년째 살고 있었는데 명절에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땐 차도 없고, 돈도 없어 수십 리 길을 걷는 세상이라 고향집에 가고 싶어도 못 갔을 테다. 참 곤궁한 시절이었다.

성불사의 빼놓을 수 없는 낭만은 사찰을 향하는 골짝천변 철조망의 명언과 명구와 독특한 필체다. 하나씩 음미하며 산문에 오르는 정취는 각별하다

겨울에 폭설이 내린 날은 나는 그의 등에 업혀 등교한 때도 있었다. 그는 건강체질에 젊음이 한창이었으니까 귀향해서 결혼하여 열심히 일하며 잘 살았을 테다. 진즉 저세상엘 갔겠지만 그립고 애틋하다. 단옷날 민속놀이로 그네뛰기, 씨름, 활쏘기가 행해지고 단오절식으로 수리취를 넣어 둥글게 절편을 만든 수리취떡과 쑥떡·망개떡·약초떡·밀가루지짐 등을 먹었다. 단오의 시원은 중국 초나라 회왕(懷王) 때 굴원(屈原)이라는 충신이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증명하려고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한데서 비롯됐다.

대웅보전 옆의 자라웅덩이의 물그림자
팔각9층석탑

중국에선 그날(5월5일)에 해마다 굴원의 영혼을 위로하려 제사를 지내왔다. 고려가요 ‘동동(動動)’에 단오가 ‘수릿날’로 등장하는데 여자들은 ‘단오비음’이라 하여 악귀를 쫓는다는 뜻에서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얼굴도 씻으며 붉고 푸른 새 옷을 입고, 창포뿌리를 깎아 붉은 물을 들여서 비녀를 만들어 꽂았다. 남성들은 액을 물리친다고 창포뿌리를 허리춤에 차고 다였다. 동의보감에서는 창포를 ‘눈과 귀를 밝게 하고, 목청을 좋게 하며, 지혜를 길러주는 식물’이라한다. 창포 뿌리는 불안·초조, 불면증, 건망증 등 심신안정제 재료로 사용되고 샴푸를 만들기도 한다. 오늘 장산산행이 성불사에서 단오절 생각으로 차환됐다. 명절의 의의와 분위기가 점점 쇠태해지나 싶어 아쉽다.               2025. 06.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