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속의 원각사와 폭포사
연등속의 원각사와 폭포사
5년 전이었던가? 장산 대천공원습지에서 우측 숲속을 뚫는 숲길을 무작정 오르다가 원각사(圓覺寺)을 향하는 이정표와 마주쳐 본격 트레킹에 나섰었다. 울창한 숲속을 헤치는 산길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울퉁불퉁한 돌`바위길이라 아내가 그만 빠꾸하자고 보챘었다. 오가는 산님도 없어 긴장감은 고조됐지만 아까 이정표엔 1Km남짓의 거리여서 ‘거의 다 왔다’고 아내를 어르며 한 시간여의 등산 끝에 원각사에 올랐던 기억을 좇아 오늘 그때의 추억을 복기하는 산행에 나섰다. 대천공원입구의 ‘장산등산로 안내판’엔 원각사 등로(登路)가 표기돼 있는데 나들목 찾기기 모연했다.
연못쉼터 윗길에서 뜬금없이 숲에서 튀어나온 산악바이커에게 묻지 안했으면 한참동안 헤맸을 테다. 원각사이정표가 없는 숲길은 시작부터 적요한 자갈길이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숨찬 돌너덜길을 반시간쯤 헤쳤을까? 장산의 유명한 너덜갱지대가 질펀하게 산정까지 펼쳐졌다. 장산은 6~7천만 년 전 백악기 때의 화산폭발로 형성된 응회암과 석영반암의 산이란다. 지금 내가 오르는 원각사와 장산마을 해발550m 고지대로 1960년 퇴역장병 10여명이 장산개척단을 만들어 원호청에서 정착금을 대부받아 산릉을 개간하여 고랭지채소밭을 조성한 산정의 별천지다.
아내와 동행했던 그땐 꽤 드넓은 야전(野田)마을에 움막(?)형 찻집과 식당이 문정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식음료 맛깔보다는 산정에서 만끽하는 맑은 공기와 한 폭의 그림 같은 멋진 뷰에 망아(忘我)의 시간을 열락(悅樂)하지 싶었다. 정작 원각사라는 절은 있었던가 싶고. 한 시간쯤 산길을 헤쳐 드넓은 산밭에 들어섰다. 드넓은 산밭은 몽땅 차(茶)밭이 되어 계단식 밭두렁을 이루고, 파란 하늘이 바짝 내려와 천막을 드리운 별천지를 이뤘다. 파란 천막 아랜 울긋불긋 연등이 어지러이 매달렸고, 움막들이 사라진 곳엔 원각사가 온갖 봄꽃동산을 빚어 영산회상을 지향하나 싶다.
연등(燃燈)은 신라 진성여왕 4년(890) 정월 보름에 황룡사에서 열려 여왕이 행차하여 친람했다니 무려 1,200여 년의 오랜 역사다. 1975년 석탄일이 국가공휴일로 제정되어 1976년부터는 여의도광장에서 조계사(종로)까지 이르는 연등행렬을 하였다. 연등회는 무형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4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20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었다.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는 연등도감을 설치하고 연등위장을 제정할 정도로 국가적인 행사로 치렀으며, 조선시대엔 집집마다 장대를 높이 세우고 자녀의 수대로 등을 매달아 거리 곳곳이 형형색색의 등이 달렸다.
밤에는 장안의 남녀노소가 등불을 들고 나와 불꽃바다를 이루는 관등놀이가 성행하였고, 연등진풍경을 남산 잠두봉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것을 1년 중 가장 큰 구경거리로 여겨 서울의 십대경치 중의 하나로 불리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난 뒤, 두 손을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사자후(獅子吼)를 외쳤다.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생명 존귀하다. 세계의 고통받는 중생들을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등(燈)은 부처님의 지혜로 번뇌와 무지의 어두운 세계를 밝게 비춰주길 공양하는 의미를 상징한다. 현우경 빈녀난타품에 부처님이 영취산에 계실 때 밤을 밝힌 등들은 다 꺼졌는데 등불 하나가 끝까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지극정성을 다해 서원(誓願)한 연등이었다. 이를 알아 챈 부처님께서 “이 여인은 등불 공양의 공덕으로 성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어 그 당시부터 등공양 풍습이 전래됐다. 심심산골 칠흑어둠을 밝힌 초파일 연등은 중생들의 마음을 열고 간절함을 서원하는 년 중 가장 성대한 축제였다. 원각사와 폭포사가 초파일 연등행사 막바지 준비에 분망하다.
오색연등이 풍경소리에 미동하는 사찰경내는 온갖 봄맞이꽃들이 만화방창하여 불국(佛國)유토피아가 됐다. 화단 곳곳에 꽃 중의 꽃이라는 목련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붉은 피를 토하는 것 같은 모란은 찬란한 봄을 기원(祈願)하는 상징으로 암흑의 일제강점기를 인극 하는 심벌이기도 했다. 김영랑(金永郞)은 현실의 절망과 미래의 희망을 시(詩)<모란이 피기까지는>를 절창하여 민족의 봄날을 기원했다. 봄에 일찍 피고 일찍 지는 모란은 부질없는 기다림 같았지만 꿈을 놓을 수 없었던 간절함 이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탐스런 모란이 화려하게 뽐내는 놈 옆엔 두툼한 꽃봉오리 막 터뜨리려 벌리는 놈이 있고, 벌써 시들어 지는 놈 옆엔 도톰한 씨방을 만든 놈이 있다. 짧고 화사하게 살다가 미련 없이 사라지는 모란 앞에서 나를 반추해본다. 화려하진 못했을망정 튼실한 씨앗 하나는 만들었는지를 관조해 봤다. 자신이 없다. 70평생을 헛 살아왔단 말인가? 모난 짓 않고 순리 쫓아 건강하고 착하게 살아가고 있는 세 딸이 사회의 밀알이어서 위안한다. 나는 아직 나의 봄 -모란이 필 명년 봄을 기다릴 테다. 희망을 여위지 않는 삶은 결코 서럽지 않을 일생이라! 모란을 가슴에 품어 안았다. 2024. 04. 28
# 모란은 부귀(富貴), 화왕(花王), 미인을 의미하는데 황모란, 백모란, 정홍모란, 낙양홍 등은 수백 년 전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황제의 총애를 받고 고려로 귀환할 때 선물로 받은 품종이다. ‘국색천향(國色天香)’이라 부르기도 하는 모란꽃은 풍성한 꽃잎의 자태로 풍기는 농염(濃艶)한 아름다움은 가히 '꽃의 지존(至尊)'이라고 부를만하다. <삼국유사>에 기록 된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의 설화를 소개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가지 모란 그림과 씨 석 되[升]를 보내왔다. 여왕이 그림의 꽃을 보더니 “이 꽃은 분명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 라고 말하며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나중에 꽃이 피고 보니 여왕의 말이 맞았다. 신하들이 어떻게 모란꽃에 향기가 없는 것을 알았냐며 묻자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향기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를 모티브로 실학자 이익(李瀷)은 <모란무향(牧丹無香)>이라는 밀봉시(蜜蜂詩)를 지었다.
“나라 위해 헌신하는 꿀벌들의 그 정성 (殉國忘身卽至誠)
마음 다해 위를 섬겨 꽃들을 사냥하지 (勞心事上獵羣英)
모란꽃 떨기 속엔 어찌 오지 않는 걸까 (牧丹叢裏何曾到)
꽃 중에 부귀하다는 명성 피해서 라네 (應避花中富貴名)”
“모란이란 꽃은 가장 쉽게 떨어지는 꽃이니 부귀란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할 만하고, 비록 화려하나 냄새가 나빠서 가까이할 수 없으니 부귀란 참다운 게 못 된다는 것을 비유할 만하다”고 평하면서 벌이 여왕벌을 섬기기 위해 충성심에서 부귀의 상징인 모란꽃을 피한다고 보았다. 벌`나비가 모란꽃에 날아들지 않는 이유는 꽃에 꿀이 많지 않은 때문이며, 꽃이 귀할 때는 곤충들이 찾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