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패산 - 망월사 - 회룡사기행
사패산 - 망월사 - 회룡사기행
오전10시경에 망월사역을 빠져나왔다. 2년 전쯤에 망월사를 찾았었는데 계절 탓인지 뭔가 낯선 게 많다. 짙푸른 망월사골짝의 서늘한 기운에 성질 급한 이파리는 황갈색 점 몇 개를 찍어 바르고 낙엽이 된다. 그런 낙엽의 유영이 계절의 사이길 트레킹에 새콤한 청량제가 되고. 내가 경험한 트레킹코스 중에 망월사행 산길이 최상이란 생각은 여일하다. 흔해빠진 데크나 시멘트포장은 쪽팔리는, 오직 자연석계단의 깊은 골짝은 원시림기분이 들게 하는 데다 줄곧 오르막길이어선지 산님들도 뜸해 호젓해서다.
골짝을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 얼굴 간질대는 바람결의 희파람소리, 청량한 덕제샘물은 골짝이 베푸는 보너스다. 그런 망월골짝을 해찰하면서 원시숲길을 한 시간쯤 소요하면 상상을 절할 멋진 산사(山寺)가 깊고 오밀조밀한 넓은 가슴팍을 내민다. 망월사(望月寺)다. 아마 울`나라에서 젤 높은 곳에 웅지를 튼 가람일 테다. 망월사의 상징인 영산전(靈山殿)에 올랐다. 푸른 숲 속에서 우뚝 솟은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이 뒤에서 바짝 다가서서 가람을 수호하나 싶은 명당이다.
내가 망월사를 연연하는 소이는 무애도인(无涯道人) 춘성(春城.1891~1977)스님께서 변변한 주지방(住持房)한 칸도 필요 없다하시면서 망월사의 중흥과 선풍을 일으키며 많은 일화를 남기셔서이다. 목침과 방석 하나가 침구의 전부였던 춘성스님은 이불은 잠귀신이라 공부(참선)할 아까운 시간을 빼앗는다며 모든 이불을 불태워 망월사 선방엔 이불이 없었단다. 또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한테 수중에 있는 것 모든 것 - 옷까지 벗어 주곤 빤스만 걸치고 지인을 찾아들곤 했었다.
자신의 법문을 녹취하는 것도, 글자 한 자 남기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라며 말리고, 화장 후 사리 챙기거나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신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자유인이셨다. 만해(한용운)스님이 3.1운동 민족대표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춘성스님이 옥바라지를 했다. 옥중에서 만해는 대한독립에 대한 결기와 당위성을〈조선독립의 이유서>라고 쓴 명문초본을 매월 한 번씩 면회 오는 춘성스님에게 건내고, 그 비밀의 초본을 상해의 임시정부에 전한 만해의 수제자요 독립투사였다.
스님의 수 많은 일화 중 하나를 소개한다. 군부독제 박정희 대통령시절 육영수여사 생일에 청와대로 초대받아 법문을 요청하자 잔뜩 뜸 들인 후에 스님 왈, “오늘은 육영수보살이 지 에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하고 보지에서 나온 날이다”했다. 일순 장내는 긴장이 팽배했다. 군더더기 없는 직설 욕법문은 선지식의 활구였고 스님은 생활부처였다. 앞서 춘성스님이 강화도 보문사를 중건할 때 육여사가 300만원을 희사했었다. 또한 육여사가 만나 반갑다고 인살 하자 "남녀가 만나면 반가운 건 당연하니 우리 입이나 마추자"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박정희대통령은 ‘불교계에도 큰 스님이 있었던가?’라고 했단다. 무애선사 춘성스님의 수많은 기행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가짜 스님들이 가짜 위정자들과 놀아나는 작금의 행태에 춘성스님은 어떤 육두문자로 각성시킬는지? 포대능선을 향한다. 포대능선 꼭대기의 바위동네엔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여기서부턴 사패산능선 - 사패산정이 2.3㎞다. 뜬금없는 고사목이 떼거리를 지었다. 화마도 아니고 벼락맞은 걸까? 이 능선지대는 낙뢰위험지대란 경고판이 서있다. 몇 년 전 낙뢰로 망월사전나무가 쓰러졌었는데 그 전나무시목이 토막진 채 지금 절 입구에 있다.
지름이 2.5m이상 되는 거목이었다.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젤 두려운 것이 자연이라 우린 항상 경외심을 놓아선 안 된다. 반시간쯤 능선을 타면 송추와 회룡사로 가는 사거리에 도착한다. 포대`사패능선은 난이도가 있어선지 산님이 뜸하다. 바위와 소나무의 연애질이 가관이다. 수락산을 간지럼 태우고 온 바람이 감미롭다. 자운봉과 오봉능선의 바위섬이 초록숲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사패산정과 선바위도 이따금씩 얼굴을 내밀고 나를 환영하나 싶다. 사패산정이 가까워지자 산님들도 숨어있던 바위처럼 세를 이뤄 나타난다.
바위 위에서 온갖 아양 떠는 소나무사이를 뚫고 드뎌 사패산정에 올라섰다. 봉우리를 이룬 큰 바위 모양이 삿갓처럼 생겨서 갓바위산 또는 삿갓산이라고 불렀다. 글다가 조선시대 선조(宣祖)가 딸 정휘옹주(貞徽翁主)에게 하사한 산이어서 사패산(賜牌山)이라고 부르게 됐단다. 산정이라기 보단 바위운동장이다. 우리나라에선 젤 크고 넓은 바위가 정수리를 이룬 게 사패산일 것이다. 가을맞이 산상음악회를 열면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많은 청중이 자리할 테다. 사방을 병풍처럼 휘두른 산마루연봉들은 얼마나 멋진 무대를 이룰 텐가! 사패산을 원도봉이라고 하는 까닭을 알만하다.
바위마당 한 켠을 빌어 다릴 뻗고 가을을 심호흡하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엎드린다. 놈은 터 하나는 잘 잡았는데 외롭고 배고픈가? 외로운 걸로 치면 지금 내가 너한테 구애할 참이다. 생각이 단순하면 외로움도 덜 탄단다. 인간은 오만 생각 탓에 번뇌의 해방구를 찾아 산정에 오른단다. 너는 유토피아에서 살고 있잖느냐! 하산하려고 자릴 털자 놈도 후딱 일어난다. 아까 왔던 길로 빠꾸하여 사거리갈림길에서 회룡사로 빠질 참이다. 깊고 가파른 회룡골짝의 하산 길은 인적도 햇빛도 없는 음산하기 오살 맞았다. 적막속의 실바람소리가 20dB(데시벨)쯤 될까?
회룡(回龍)이란 이성계가 아들(이방원)의 폭정을 피해 함흥처소에서 이곳으로 돌아와 머문 곳이라는 뜻이다. ‘함흥에 간 사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여기서 생겼고, 한양의 신하들이 이곳으로 와 정사를 논해 의정부(議政府)라는 지명도 생겼다. 유서 깊은 회룡사를 휘돌았다. 회룡사사찰 아래 '용이 돌아와 솟구치는' 모습의 회룡폭포 또한 명소다. 그 아래 400살을 넘긴 회화나무가 회룡천으로 기울고 있다. 뭣 땜일까? 회룡골 바람소리나 물소리에서 한양의 좋은 소식을 못내 기대하던 이성계의 흉내일지도 모른다.
이방원의 ‘왕자의 난’은 이성계의 ‘반역의 난’이 뿌리고 본보기일 것이다. 세상에서 어버이만한 스승은 없다. 오늘날 남 탓만 하고 거짓말 밥먹듯 하는 정치인들 자식들 보기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제나름 출세했다고 목에 기부스한 고위층들 국민신뢰도는 꼴찌란 걸 각성해야한다. 춘성스님이 이 불신의 정치판을 보면 뭐라 일갈 했을꼬? 고작 100년도 채 못 사는 주제에 과욕은 망령이다. 회룡역에 도착하니 오후 4시. 6시간을 뭉그적댄 11㎞쯤의 산행이었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뻐근하다. 노익장에 무리했나? 해도 즐겁고 유익한 힐링의 하루였다. 2023. 10. 05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의 총애를 받던 애호선사가 삼국통일과 왕실의 융성을 기원하려 창건한 사찰이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한때 은거했고, 1066년 혜거국사가 중창을 하여 나옹,천봉,영월,도암스님이 머물었다. 근대엔 용성,한암,만공,성월,춘성선사들이 선풍을 날린 조계종종립선원이다.
신라 신문왕때 의상이 창건한 법성사를 혜가국사가 3창하고 1384년 무학대사가 중창을 하여 이성계와 3년 동안 창업성취의 기도를 올린 사찰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회룡사라 개칭했다. 태종의 폭정에 뿔따구가 난 이성계가 함흥에서 귀경치 않자 태종은 신하를 보내 귀경을 간청하였으나 허사이기 일쑤여서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마침내 노여움을 푼 태조가 환궁하고 무학대사를 찾아 법성사에 행차하자 무학대사는 회란용가(回鸞龍駕)를 환영하며 절 이름도 회룡사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