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전문의 아바타 (항암 & 방사선치료 25일) [2]
2010. 09. 24
“분매에 물을 주라.”
퇴계선생이 68세로 임종시 시봉하는 사람에게 했던 최후의 유언이다.
분매는 20년 전 단양군수로 재직하다 풍기군수로 전임할 때 연인 두향이 선물했던 매화분이였다.
두향은 선생께서 여향(女香)에 모쪼록 심취케 했던 유일무이한 여자였지 않나싶다. 첫 부인을 몇 해 뒤 사별하고 정신박약 여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스승의 부탁으로) 16년을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던 선생은 그마저 사별한지 2년 후 단양군수로 자원 부임한다.
그때 18세의 두향은 막 관기에 적을 올렸는데 선생을 조우하게 돼 사랑을 나누게 됐던 것이다.
48세의 고적한 장년의 선생이 단양군수 재임 9개월 동안의 두향과의 로맨스는 사랑의 향기에 빠져들게 했을 테고, 두향의 사랑은 물올라 만개할 열정 이였을 것이다.
청초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섰을 두향의 사랑을 9개월 만에 이별 해야할 선생은 떠나는 마지막 날밤 그녀의 치마폭에 시 한 수를 남긴다.
死別已呑聲 生別常惻惻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안 나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다)
그 후 선생은 이웃 풍기군수로 또는 안동에서 20년을 머물면서도 한 번도 두향을 찾지를 않고 매분을 가까이 두고 사랑했던 반면, 두향은 선생과 즐겼던 강선대에 초막을 짓고 수절하다 선생의 부음을 듣고 남한강물에 투신 자결한다.
추석연휴에 읽었던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3권의 이퇴계 선생의 절제된 사랑을 생각하며 아니, 눈을 감고 지하철의 메케한 냄새를 잊은 채 두향의 애뜻한 연정을 맘껏 상상해 보는 거였다.
처녀 가슴에 지핀 사랑의 불꽃을, 열정을 삭히며 인극 했을 두향의 타는 애증의 20년을 나는 상상의 나래에 싣고 병원을 오가는 지옥철 속에서 역겨운 오심을 잊고 있었다.
역겨운 냄새를 잊고 울렁거리는 오심증을 달래는 방법의 하나는 누군가의 로맨스나 나의 지난날의 즐거웠던 추억을 곱씹어 보는 게 특효였다.
화두(話頭) 말이다. 심오한 ‘?’이 아닌 가벼운 일상의 입맛 돋는 짜릿한 기억도 좋을 테다. 오늘부턴 병원 오가는 지옥철 속 시간 죽이기로 책읽기 아님 눈 감고 추억 씹기다.
2010. 09. 25
토요일인 오늘도 오전 11시에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추석연휴의 뜸한 치료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하루 앞당기자는 병원측의 제의를 난 얼씨구나 챙겼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마치고 귀가하고 싶었기에 말이다.
아내는 오늘 귀가했다. 추석도 여기서 보낸 탓에 집안 꼴이 항상 걱정이고 각종 공과금과 울 집안의 사적인 볼일들이 족쇄처럼 달라붙어 무거워진 걸 다소 덜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집에 도착한 아내의 일성은 생각보다 더 심난한 모양새였다. 2층 올라가는 계단커브에 어떤 놈이 실례를 하고 신문지로 덮어 놓았나 하면 앞집에서 무슨 공사를 벌렸는지 스티로폴부스러기가 건물 안을 부유하고 있단다.
다른 건 몰라도 어떤 죽칠 놈이 싸놓은 걸 치워야할 아내의 울상이 눈에 선하다. 고소(苦笑)하다.
난 아내를 버스터미널에 배웅하고 막내네 집으로 왔었다. 순전히 식사문제 땜이라.
내가 아파서 살판 난 영특한 강은이의 재롱을 보며 시간을 또 죽인다.
제 뜻대로 움직여주는 할애비는 신나고 영리한 로봇친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지 앞에선 영원한 종 - 이 투병중인 할애비가~!
2010. 09. 27
아내더러 오늘 중에 오라고 채근 질을 해댔다. 막내가 이것저것 심혈 기우려 챙겨준다고 하지만 아내만 못하다.
겨우 이틀 지나고 있는데도 아내가 옆에 있어야 편하다. 내가 강은이의 종이 되듯이 아낸 나의 종노릇을 군소리 없이 잘도 해내기에 그럴게다.
평소에 나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이웃들, 소품들, 자연들, 가족의 소중함을 모르다가도 그게 하나 없어 졌을 때야 그 존재의 의미와 아쉬움을 통감한다.
분신인 아내의 소중함을 평소엔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는 자각에 스스로 놀랐다. 아내는 나의 손발이, 눈과 입과 귀가, 마음까지를 대신해 준다. 아파보지 않고는 분신의 존재감을, 고마움을 절감하기 난 할지도 모른다.
미련한 내겐 말이다. 결혼이 중요한 걸 새삼 되새김질 하게 한다.
막내가 정성껏 마련해 주는 음식과 간식이 아내만 못하다는 느낌은 아내의 손길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습관일 텐가?
보다는 내 딸이지만 아내만큼 허물이 없지는 않은 땜일 거다. 요는 어딘가 좀은 더 불편하다.
하물며 출가한 딸애는 이미 개울 하나가 우리사이를 흐르고 있어 소원해 진 탓일 것 같다.
맘이 우울하니 피곤기가 더 하는 것 같다. 팔다리 관절이 절여온다.
감기몸살 징후의 나른함이 다름 아니다.
며칠 머물겠다고 간 아낸 나의 재촉에 오후 늦게라도 상경하겠단다. 큰 인심 쓰듯이 송화기에 대고 아낸 우쭐대고 있었다.
“ ‘그렇게 아쉬워? 그러니까 있을 때 잘 해’ 라고 합디까~!”
2010. 09. 28
어제 밤늦게 큰애 네가 홍콩서 귀국하여 날 뵈러 온다는 걸 극구 말렸더니 오늘 방사선치료가 끝나나자마자 모든 식구가 모여들었다. 홍콩서 근무하는 신랑을 찾아 애들 대리고 떠났던 큰애가 3개월 만에 신랑의 국내출장을 기회로 귀국했으니 반가워 웃음꽃이 피었다. 더구나 큰애는 홍콩으로 이사를 가야할 처지기도 해 앞으론 만날 기회가 어려울 것 같아서 밝지만은 아니했다.
모두가 모였으니 거나하게 술좌석에다 식도락까지 즐겨 잔치마당이 됐는데 모두가 나를 의식해 결코 흥이 나질 않는 모양 이였다. 딴 방에서 책을 읽던 나였지만 자꾸 ‘미안하다’는 애들의 죄송해 함에 내가 더 미안하고 좌불안석이 되서 그래 멀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자원해서 걸린 병이 아니지만 건강 지키지 못하고 병든 몸으로 식구들에게 불편을 끼쳐야 하니 맘이 아팠다.
아직 건강해야 할 내가 몸 함부로 혹사시켜 자식들의 즐거운 시간까지 빼앗아야 한다는 사실에 자괴한다. 나이가 들수록 늙은이들은 스스로 건강 잘 챙겨야 자식들한테도 대우 받을 수 있다. 내 아픔은 나만으로 끝나는 게 아닌 가족 모두의 질곡인 것이다.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잠자듯 운명하는 죽음 복 탄 사람은 피붙이들에게 죄짓지 않음이다.
심신을 단련하는 길을 부지런히 찾아 매진하여야 함이다.
오랜만에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두 모인 즐거운 시간 이였다.
2010. 09. 29
나의 방사선치료는 암센터 지하1층 6번방에서 오전 11시20분에 실시함이 고정된 시간이 됐다. 정천영 선생을 비롯한 젊은 두 분 박병석, 강동님님의 방사선사 선생들의 친절과 조력을 받아 방사선조사를 하게 되는 데 상반신을 벗고 반듯이 누워있는 5분여의 시간은 감칠맛 나는 음악이 여리게 흐른다는 것 외 아무런 느낌이 없다.
방사선이 나온다는 구멍을 가르쳐 주고, 방사선이란 가시의 빛이 아닌 전자파의 일종이라 생각하면 된다는 점과 조사동안 밀폐된 방에 조명을 밝게 함은 모니터실에서 치료상태를 관찰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해 줬다.
정천영선생은 양성자치료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해 줬는데 요점은 방사선 치료는 통상적으로 피하 10cm근방의 암세포를 조사할 때 그 곳에 이르기까지 방사선이 포물선을 그리며 조사 되고, 양성자는 직선에 가깝게 조사 돼 효율적 치료가 되는 거라고 명료하게 설명해 주기도 했다.
양성자치료는 현재 국립원자력병원에만 있다던가? 삼성병원도 2012년에 양성자치료시설을 갖추게 된단다. 양성자시설은 세계적으로도 몇 군데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삼성의 시설과 인술 및 친절은 가히 세계적이라 여길 만하다.
방사선사들의 직업은 가히 한량(?)들이라 하면 욕먹기 십상인가? 그들의 일상 한 꺼풀만을 피상적으로 얼핏 엿보게 되는 나의 소감은 참으로 한량들 같았다는 게다.
환자를 안내하고 조사에 알맞게 침상에 눕도록 도와주는 일 외에 모니터실에서 감독하는 게 전부처럼 보여 저서 하는 말이다.
힘겹거나 열나게 바빠 보이지도 안했다. 주말 이틀 쉬는 시간에 방사선기계를 정비하는 수고가 그들 몫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들의 친절과 밝은 미소는 심난해 가위 눌러 오는 나의 우울까지도 일순 앗아가곤 했다. 그들은 행동도 말씨도 경쾌했다. 환자에게 힘이 솟게 했다고 하고 싶다. 그게 몸에 밴 직업의식이라도 좋다.
2010. 09. 30
채혈을 했다. 내일 임도훈 교수와의 면담시 나의 1주간의 치료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수순일까 싶었다.
항함치료가 끝 난지 꾀 돼서 입맛이 돌아와야 할 텐데 나아질 조짐이 묘연하다. 관절마디가 쌈박거리고 오심증은 가라않질 않아 간호사께 하소연을 했다. 카트릴 정 5일분 약처방을 받아 들었다. 달리 묘수가 없다는 거다.
음식 혐오증에 걸렸다 해도 결코 뻥이 아니다. 더구나 음식점에서의 식사는 진즉 포기했다. 어떤 음식이던 음식점에 들어서면서부터 오심증이 발동해 벌써 구역질부터 나온다.
외식이 주식이다시피 한 둘째가 갖은 수단을 부려 내 입맛에 맞을 거라며 꼬셔 불러내 시도한 외식을 난 한 번도 맛있게 먹은 적이 없다.
나를 알고 있는 아내가 만들어 준 음식이 그래도 목구멍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먹어야 산다.’는 원초적이고 단순한 생각에 억지 먹어치우는 식사다. 빵 종류와 과자를 그리 잘 먹었던 내가 지금은 입에 대기도 싫다. 한 끼도 생선 없인 밥을 먹지 못한다고 아내로부터 핀잔께나 듣던 내가 생선도 쳐다보기도 역겹다.
육고기는 씹을수록 소태맛이 난다. 오직 시원한 국물이나 묵은 김치에 밥 몇 숟갈이 그나마 삼킬만해 반 공기를 치우고 있다. 슬그머니 영양실조 될까봐 시름이 지핀다.
오직 신선한 과일로 주림을 매꾸고 있다. 언제까지 계속 되려나?
아낸 나를 애 달래듯 얼굴을 카멜레온처럼 변색하며 닦달(?)하기 일쑤다.
2010. 10. 01
방사선치료에 앞서 임도훈 교수와의 예약된 면담이 있었다. 치료 상태가 좋아 95% 이상의 기대치란다.
위무시키기 위한 다분히 고무적인 말일지라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나아지지 않고 있는 오심증과 피부에 하나씩 땀띠마냥 난 빨간 반점의 이유와 관절의 쑤심을 얘기 했고, 임교수는 치료 중에 간혹 나타나는 현상으로 별달리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란다.
따라서 그걸로 심한 부작용을 일으킨 적 없어 특단의 묘책도 없다는 거다. 처방전의 약을 복용하고 참는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대신 모든 치료가 다 끝나면 모든 게 정상으로 환원되니 안심하란다. 반 백발에 인상 좋은 그는 연신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애 달래듯 다독거렸다. 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예약 된 교수님들은 내가 특진비를 주고 선택한 전문의들이라.
요는 나는 ‘갑’이고 교수들은 ‘을’인 셈이다. 하나 ‘갑’과 ’을‘의 관계가 맺어진 순간부터 입장은 전도 돼 ’갑‘은 ’을‘의 눈과 입만을 쳐다보며 그의 일갈에 희비하게 된다.
나의 생사여탈권이 그에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앞에서 쩔쩔맨다. 촉박한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 쓰는 ’을‘은 빨리 ’갑‘과의 면담을 끝마치고 또 다른 ’갑‘을 불러들이려 한다.
그들 ‘을’에겐 밖에서 대기 중인 또 다른 ‘갑’을 마주하기 전 단 1분의 여유도 없어 ‘갑’의 그간의 치료정황을 파악조차 못하기 십상인 듯 하다. 하여 ‘갑’을 마주하며 건성으로 인사를 나누곤 시선은 모니터의 깨알 같은 문자읽기에 집중한다. 그렇지 않고는 ‘갑’을 모르기 땜이라.
‘을’의 예리하고 따뜻한 시선을 마주보며 그간의 치료 상태를 얘기 듣고 의문점을 묻고 싶었던 ‘갑’은 노상 시선을 모니터에 꽂은, 속사포의 진단과 서두는 인상의 ‘을’에게 실망 하면서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다소곳이 물러나온다.
‘을’도 고되긴 한량없으리라. ‘갑’과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갖고 자상한 카운슬링까지 해 주고 싶겠지만 ‘을’ 그가 ‘갑’이 되어 맺은 병원-‘을’과의 관계가 전도 돼 ‘을’(병원)이란 거대한 메커니즘의 집합체가 만들어 놓은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하는 ‘갑’(전문의·교수)으로 전략한 처지에 순응해야 함일 테다.
명망 있는 전문의교수라면 병원과 관계를 맺을 때 당연히 ‘갑’의 입장으로 병원을 ‘을’의 자리에 설정하였으리라. 그랬던 전문의 ‘갑’이 ‘을’이 짜 놓은 시간표대로 해야하다보니 촌음의 여유도 없어 그가 관계 맺은 환자‘갑’의 치료정황을 모니터할 짬도 없었던 땜에 환자를 실망시키기 십상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병원과 전문의 교수와 환자가 맺은 ‘갑’과 ‘을’의 관계가 이처럼 전도 된 바는 거대한 병원에서만 가능할 테다.
그 거대병원이 신경 써야 할 점은 그가 맺은 전문의교수‘갑’에게 또 다른 환자‘갑’의 치료 상태를 숙지할 최소한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도된 ‘갑’과 ‘을’의 관계를 다소곳하게 수용하고 신뢰하게 되는 게 아닐까. 거기에 서로의 발전도 기대할 수 있겠다.
‘갑’인 나보다 또 다른 ‘갑’인 전문의교수님들이 짠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2010. 10. 04
점심때 병원 본관 지하1층 식당가 맨 끝에 있는 분식집에서 점심으로 우동을 시켜 먹었다. 11시20분 방사선치료를 마치고 귀가하면 오후 1시쯤 돼 집에서 점심을 들곤 했는데 오늘은 볼일이 있어서였다.
점심 메뉴를 훑으며 난 꾀나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우동국물 맛이 담백할 것 같아 주문했었는데 먹을 만했다. 오랜만에 먹는 우동은 오래 전에 중국집에서 먹은 우동이 아니였다. 어묵국물에 굵직한 면발을 넣고어묵 두 조각과채 썰은 다시마 몇 가닥에 삶은 달걀 한쪽을 고명으로 얹은 게 전부였다. 그건 내가 수십 년 전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을 오가다 늦은 밤에 간이역 플랫폼에서 즉석에서 말아준 그 우동 이였다.
새벽겨울에 가난한 호주머니에서 몇 푼 꺼내 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우동 한 그릇을 사 먹던 추억이 김에 뿌옇게 서렸던 간이역에 닿았다. 가난했어도 그때가 좋았다.
크고 오톨한 면발을 오래도록 씹으며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여행을 떠나면서 그 우동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어도 되겠다는 일말의 안도감까지 챙겼기에 기분 좋았다.
2010. 10. 05
am9;30, 병원본관 외래 4층에서 내시경 검시를 받았다. 앞서 채혈을 했었고 수면내시경을 신청했으나 보호자가 없어 안 된다고 해 검사를 받았는데 오히려 잘 됐다고 자족했다.
수면내시경이 보호자가 꼭 있어야하고 검사 후엔 차운전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그만큼 뭔가가 좋지 않을 까닭이 있어서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잖아도 오늘아침엔 아내가 동행하겠다고 나섰지만 한사코 내가 뿌리쳤었다. 오후 3시50분에 손태성교수님과의 면담이 있는데 그때까지 무료하게 기다릴 게 내키질 안 해서였다.
근데 보호자가 없인 수면내시경은 아니 된다니 처음엔 후회도 잠시 했드랬다.
내시경검사 중 여의사는 내게 식도와 위도 아주 깨끗하다고 격려를 해줘 고약한 고통을 잠시라도 달랠 수가 있었다. 내게 위도 있긴 있는 모양이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손태성 교수를 뵈웠다. 그는 시간을 10분 단위로 쪼개서 서너 분의 환자면담을 하고 있는데 방 두 개를 쪽문으로 드나들면서 간호사가 미리 깔아놓은 모니터를 미쳐 볼 틈도 없이 환자를 맞고 있어 그 실 나를 알고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아니다. 모니터를 일별하기 전까진 나를 기억하기란 나의 철없는 기대치라고 생각했다.
그도 건성으로 나를 보며 인사를 받곤 이내 시선은 모니터를 향하여 거기에 고정시킨 채 비로써 나의 현 상태정황을 얘기한다. 평소에 나의 병세를 숙지하고 있다는 듯 말이다.
나는 오전에 내시경검사를 했다고 했다. 물론 모를 리 없는 그는 무언 이였고, 나의 간단없는 질문-지난 번 면담시 24개의 임파선 중 두개가 발견 된 임파선을 재거했다는 진단을 이해하지 못해 설명을 요했다. 손교수는 임파선이 24개가 아니라 26개고 그 임파선이란 위를 감싸고 있는 걸 말하며 두 개를 재거 했기로 만약 다른 곳에 전이 됐을까 싶어 치료를 하고 있다는 거였다. 애초부터 나의 재 발병률은 7%였기에 그 수치를 얼마쯤 떨어뜨릴 수 있다는 확신으로 치룔 하고 있다는 게다. 오늘 한 내시경검사 얘긴 까먹고 3개월 후에 다시보자는 말을 남기고 엉거주춤 일어선다. 내가 되물으려하자 간호사가 자세히 얘기 할 거라며 간이쪽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얼 얘기 해준다는 건지?
전철 속에서 나는 문득 오늘 만난 손교수가 손교수의 대리인-아바타란 생각을 해봤다.
너무나 바쁜 그는 자기를 선택해준 환자들을 면담하려면 자기의 분신-아바타라도 만들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겠다는 상상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면담한 손교수는 전문의 손태성이 아니라 아바타 손태성일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바타는 모니터를 보고야 비로써 상황파악에 들고 깨알 같은 문자 속에서 진단과 예단을 하며 나를 숙지해 가는 거였다. 아바타는 모니터 없인 아무 일도 해 낼 수가 없으렸다.
손태성교수가 내게 진정한 히포크라데스의 후예로 다가선 건 나의 위암수술 때였을 거란 생각을 해 보았다. 그 후론 모니터를 통한 아바타를 내게 보낸 거란 생각 말이다.
내가 선택한 전문의 교수님들- 이지연, 임도훈님들도 아바타를 만들어 나와의 면담을 성사시켰을 거란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아바타들도 손교수의 아바타와 언행이 별반 다르진 안했던 듯싶다. 내가 특진비까지 지불하며 선택한 전문의들이 아바타로 변신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정황을 이해한다. 그건 어쩜 모두가 슬픈 일이다. 그 책임은 오로지 공룡병원에 있을 것 같다. 정확한 진단과 치료만 이뤄진다면 아바타면 어떠랴!
애초 병원에서 따뜻한 감정을 기대하긴 내가 너무 환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