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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성곡미술관 낀 경희궁길에서

 

 

성곡미술관(省谷美術館) 낀 경희궁길에서

 

식구들끼리 계절의 여왕5월을 즐길 여유도 없었던 끝자락휴일에 울`식구들은 가까운 이웃동네로 외출을 나섰다. 반 시간쯤 걸어 광화문에 닿은 우린 어느 중식점(이태리식당)을 찾아들어 피자점심을 시켰다. 와인 두 병을 든채였다. 술 한 병에 자릿세(?)로 1만원씩 지불하면 되니 훨씬 경제적이란 게 딸들의 계산이고, 그래 이따금 우린 이 짓거릴 한다.       

코로나19불안에 울` 내왼 극도로 외출을 자제해왔는데 식당은 예약해야 할만큼 성시였다. 2층에 자리한 피자전문점은 젊은이들이 주류를 이뤘는데 피자맛도 성황을 이루는 한 요인이지 싶었다. 우린 두 시간여를 식도락에 빠져 희희낙락하다 세종문화회관을 찾아 기웃거렸다. 글곤 '경희궁의 아침' 아파트단지에 진입했다. 지금도 고급아파트군에 속하는 경희궁의 아침은 서울 한복판에서 조용하고 쾌적한 환경을 뽐낸다.  

'경희궁의 아침A' 단지의 중식당
세종문화회관 소극장 입구

경희궁아침2단지에서 경희궁4길로 들어서고, 실로암교회 앞서 연결되는 경희궁3길은 지대가 높아도 살기 좋은 조용한 부촌이란 호감은 지속된다. 경희3길에서 언덕배기를 오르는 경희궁3나길에 들어서면 눈을 의심하리만치 의아스런 옛날 달동네가 다가선다. 가옥들은 퇴락한 채 폐허화 돼 흉측한 모습으로 세월의 애환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폐가들은 개발제한구역에 속해설까?  도시정비를 위하여 방치되나 싶었다. 

 달동네의 풍경은 나를 타임머신에 태워 젊은 날의 애환속으로 추억여행을 하게 한다. 허물어져가는 집들이 바짝 다가선 비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언덕길은 잊혀져갈 세월의 기억처럼 빛바래졌다. 그 폐가 대문에 달라붙은 담장이 넝쿨이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건 젊은 날을 추억케 하는 아련한 애련 땜일 것이다.

허물어저가는, 넘을 수 없는 절망의 벽이라고 체념할 때 담장이 넝쿨은 기어코 잎 하나를 담장위에 걸치고, 헬 수 없는 잎들을 끌어당겨 마침내 초록담장을 만든다. 초록 잎들은 담장에 기댄 늙은 매화나무한테도 기를 불어넣어 회색하늘에 멋진 사생화 한 폭을 그리면서 희망을 구가한다. 세상에 넘을 수 없는 벽은 없다고.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담쟁이>-

주인 떠난 대문을 겹 빗장 친 담쟁이넝쿨과 담벼락의 초롱꽃

 

황폐화 된 달동네, 서울 한 복판에 70년대의 유물전시장처럼 존재한다

모두 떠난 달동네 담장 안의 장미는 그 자리에서 옛주인을 기다린다. 세월이 무색하게시리 이맘때쯤엔 이쁜 얼굴로 담장 너머를 살핀다. 행여 옛님이 찾아오면 애지중지 했던 나 이렇게 곱게 컸다고~. 자랑하려는 듯~! 치렁치렁 엮은 빨간 장미송일 흔들어대는 건 꼭 옛주인 아니더라도 그때 그 사람들도 알아보지 싶어 몸짓하나 싶었다. 모두 떠난 달동네가 아름다운 건 그렇게 묻어나는 세월의 더께들 땜이어라.

사람만 포도시 다닐 비탈진 골목길과 폐허된 대밭에서 무심히 솟구치는 죽순

경희궁3가길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사립문턱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할매가 '길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묻지도 안 했는데 할머니의 친절이 문득 잊고 살았던 내 어머니를 떠오르게 하는 거였다. 아니 북아현동 달동네 부엌없는 마루방에서 신혼살이를 했을 때  가난했던 우릴 챙겨주던 옆집 할머니를 영판 닮았다 싶었다. 울`부부는 재 작년 그 할머니를 찾아갔으나 재개발로 그림자도 못 보고 돌아섰었다. 

한글마당 여덟번째 주시경마당의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호머 헐버트-동상

호머 헐버트는 1816년 24살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식학교인 '육영공원'영어교사가 됐다. 입국3년만에 한글을 익혀 <사민필지>란 순 한글로 된 인문지리 교과서를 출간했다. 한국의 독립에 힘쓰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다. 1892년 영어월간지 '한국소식'에 '한글'이란 제목의 글에 "문자의 역사에서 한글보다 더 간단하고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는 없다"고 갈파했다.

성곡미술관

쌍용그룹 창업자인 성곡김성곤은 1999년 2월 25일 자신의 집터에 미술관을 개관한다. 미술관의 또 하나의 자랑인 야외 조각 공원은(1,228평)에는 100여 종의 나무숲들이 사색의 산책로를 이뤄 사계절 내내 산보자들을 불러 모은다. 거기엔 국내외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작품들은 부정기적으로 바뀌기에 더 매력이 있나 싶다. 

 

▲성곡미술관의 야외 조각상▼

성곡미술관은 사계절 내내 운치 있는 정원과 야외 찻집으로도 유명하다. 도심의 조용한 숲속에서 차 한잔 마시는 낭만의 시간을 사냥하기란 쉬운일이 아니어서 미술관 카페길은 사랑받는다. 하여 경희궁 뒷길은 '성곡미술관 가는 길'로 회자되기도 한다. 빌딩 숲 속의 나무숲길을 산책하며 미술관 품에 든다는 게 이리 쉽다는 건 아무나 누릴 행운이 아닐 듯! 

매년 젊은 작가를 발굴하여 ‘내일의 작가’ 전시회를 열고 선정된 작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해 주는 ‘내일의 작가’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근디 경영난 땜에 2017년 11월엔 외국계 투자가에게 800억원대에 팔려갔단다. 안타까울 일이다. 정부가 매입하여 시민들이 사랑하게 했음 얼마나 좋았을꼬?

 

경희궁 쉼터에서 코로나를 떨군 어느 커풀의 낭만
경희궁전각들의 기와지붕의 선

1617년 광해는 경희궁을  창건했지만 정작 궁궐에 머물진 못했다. 되려 궁궐창건에 나라 곶간을 탕진했단 트집으로 인조반정의 빌미가 돼 쫓겨나야 했다. 그런 궐내 100여 개의 전각에 인조를 비롯 10명의 왕들이 재임했다. 그러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많은 건물을 헐어 경복궁복원에 전용하고, 잔존한 궁궐마저 일제가 모두 파괴해버린 비운의 궁궐이 되고 말았다. 

2002년에야 복원 된 경희궁은 지금은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등 전각 3채만이 남아있다. 광해군이 이 궁을 창건했을 때 이름은 '경덕궁'이었다. 글다가 영조 36년(1760년) 때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지금 또 무슨 문화재를 발굴한답시고 정전 앞 마당은 파헤처져 공사 중이다.  언제 끝나려는지~? 경희궁의 비극이 종언되길 염해 봤다.

경희궁의 350여년 된 귀목
유적발굴로 상처투성이 된 경희궁
경희궁외벽 뜰
경희궁 해우소
▲세종문화회관 쉼터▼
레스토랑 '양치기 소녀'에서 양꼬치구이 식사
좌측은 역사박물관의 옛 극장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