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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위암, 병상병기

뒤로 자빠져도 코 다치는 날들

 뒤로 자빠져도 코 다치는 날들

장산트레킹 중 팔목골절 후 서울고려**정형외과서 통원치료3일째, 아내와 병원을 나서 롯데마켓을 가다 광장포도에서 어이없게끔 넘어진 게 하필 왼손팔목이 접지 손목수술부위에 충격이 닿았다. 요철1cm도 안 되는 틈새에 또 우측발끝이 걸렸던 모양이다. 여태 오만 간데 후비고 다니며 다릴 혹사시켰어도 자빠진 적이 없었는데 연거푸 낙상하면서 왼쪽신체부위를 연타 멍들게 한 거였다. 환자가 조신하질 못한 탓이라고 고려**병원장한테 얻어터지고 소견서를 받아들곤 강북삼성병원을 찾았다.

 

빨리 수술해야하는데 삼성병원은 1주일 후에 가능 해 옆의 서울적십자병원을 찾았다. 모레 재수술이 가능하단다. 집에서 도보로 십분도 안 걸리는 병원이기도 해 내일 입원하기로 했다89일 오전, 서울적십자병원 윤형문정형외과장과 면담 후 낼 수술키로 하고 입원수속을 밟으며 사전 종합검진을 받고 귀가했다. 근디  오후3시쯤 적십자병원으로부터 뜬금없는 전활 받았다. 혈액검사 중 --수치가 미진한 게 있으니 낼 9시경에 래원(來院)하여 내과선생과 면담을 해보라는 거였다. 오후2시면 입원할 텐데 오전에 래원을 요구하는 거였다.

 

98일 오전9, 적십자병원내과 외진접수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열시가 되가는데 대기자명단에 내 이름도 안 떠 안내에게 문의하니까 담당 임과장이 환잘 보고 있어서란다열시 반에 임과장과 면담한다. 외모 수려한 여의사였다. 그녀는 어제 입원수속 때 문답했던 나의 병력, 지병, 약물복용여부 등을 반복 되묻고 있었다. 글곤 내일 수술해도 괜찮단다. 그녀가 내게 호의적인 것은 정형외과에서 요청하여 면담한다는 정황설명이었다. 사실 난 불쾌했다. 어제 치뤘던 요식행윌 반복하기 위해 환자를 호출하고, 한나절을 허비하게 하면서도 납득할 해명이 없어서다. 그 정도의 면담이라면 전화로도 충분할 텐데, 2시에 입원할 환자라 입원 후에 불러도 될 텐데, 엄청 바쁜 오전시간을 뺏은 건 병원의 갑질 내지 횡포란 생각이 들었다. 임과장은 그런 나의 불만을 꿰뚫고 있었던지 눈길을 피했다. 집이 가깝기 망정이지 원거리라면 어찌해야 하나? 를 병원 측은 안중에도 없는 거였다. 병원을 위해 환자가 존재함인 것이다. 

 

오후2시 넘어 입원했다. 6인실인데 병실(부속실도)은 넓고 깔끔했다. 내 평생 삼성병원입원에 이어 두 번짼데 간호사의 친절도, 식사도 괜찮단 생각이 들었다99일 오전 10시반쯤에 수술대에 올랐다. 기존의 세 개의 철핀을 재거하고 철판을 덧대 접골시키는 재수술은 윤형문과장의 집도로 행해졌다. 2시간여의 시술 후 퇴시쯤에 그는 병실에 나타나 수술은 잘 됐습니다. 이제 접골이 잘 되는 건 환자분한테 달렸습니다라고 언중유골을 뱉곤 사라졌다. 또 자빠지면 안 된다는 뜻일 테다. 겸손하라는 경고이기도 허고~?

 

910, 11일은 주말인데다 날씨도 화창해 나들이하기 딱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십자병원에 환자가 읽을 만한 책이 태부족이다. 미션계통교회서 발간한 소형책자만 몇 권 서가에 처박혀있다. 난 그것마저 대충 훑었다. 밤늦게 온 둘째가 편의점에서 신문과 포켓북 두 권을 사왔다. 낼까진 그걸로 시간 때울 테다. 난 매일 서너 개의 수액주사를 (왼손은 깁스라 우측)맞고 있는데 오늘 주사 중 혈액이 응고 돼 주사기를 뺀채 주사전문간호사 오길 기다렸다. 근디 소식 없어 채근하길 두 번, 2시간이 흐른 오후4시에 주사를 맞았던 거다. 문제는 주사 중 멈춘 2시간동안 어떤 해명이나 사과도 없었다는 점이다. 국립병원이라 간호사직무를 소홀해도 되는 철밥통쯤으로 여겨설까? 열악한 예산 탓에 태부족한 인원 땜일까?

6천원의 적십자회비도 안 낸 기업인 김성주가 박근혜사람으로 적십자총재가 되더니 자회사직원들이 기강이 빠진걸까? 도대체가 아리송하기도 했다. 병원시설은 여유롭고, 입원비도 저렴한데다 국제적십자사 네트웍을 유지하여 외국인환자가 많은데 직원들의 친절이 기대에 못 미치면 나라체면이 뭐가 될꼬?    912. 나는 하루 대부분을 병동서쪽 끝 간이휴게소에서 독서로 시간을 때운다. 조명이 밝고 창문을 열 수 있어서다. 근디 오전에 내 앉은 벤치에 할머님이 계속 버티고 계셨다.

 

 

지팡일 짚은 할머닌 흰머리칼도 밤송이 된 채 좀 남루한 모습으로 몸을 안 씻어 냄새가 난다고 혼잣말을 하고 계셨다. 바로 앞이 샤워실이라 난 거길 가리킴서 씻으라 했다. 할머닌 갈아입을 속옷이 없다고 했다. ‘딸이 병원에 있는데----’라고 해명도 하시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돼 우린 자릴 떴다.  그날 오후, 그 자리서 책을 보고 있는데 할머니가 비틀거리며 힘겹게 옆자리에 앉으신다. 속옷 구했느냐? 고 물었다. 고갤 젓는 할머니, 난 일어섰다. 1층매점에 가서 속옷을 구해 오겠다고 하니까 주머니를 뒤져 돈을 꺼내시려 했다. 난 엘리베이터쪽을 향했다. 매점엔 숙녀용팬티만 있었다. 그도 1개들이6천원, 3개들이12천원짜리뿐이라. 사이즈100짜리 3개들이를 샀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 계셨다. 속옷을 내밀며 샤워실을 가리켰다. 고마워하시면서 또 주머니를 뒤척인다.

난 간호사를 불렀다. 할머니 속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라고 했다. 간호사 두 분이 더 오고 있었다. 나는 내 병실로 돌아온 후에 그 할머니를 두 번 뵈웠는데 팔목접합시술이 어땠는지 모른다. 83살의 할머닌 얼핏 따뜻이 챙겨주는 가족이 없지 싶었다. 다리도 불편하여 몇 발자국 걷지도 못하는 할머니는 식구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지 싶기도 했다. 면회 오는 누구도 본적이 없다고 병실 같이 쓰는 분이 말했다. 어디 한 군데 성한 데가 없는 팔순노인네는 효도자식일망정 기피인물이 되기 쉬울 테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병원비만 들어가는 귀찮이스트일 진데 어느 자식이 지극정성 다 하겠는가?

할머니한테서 얼마 후의 나를 보는가 싶어 씁쓸했다. 글고 간호사가 천사의 직업이란 걸 절감했다. 단정하고 깔끔한, 슬픔과 아픔을 삭히며 웃는 미소 뒤엔 환자들의 온갖 상처와 오물을 다 안아야하는 인고의 희생이 따름을 알아야해서다. 상주가 고향인 경북대학교간호대3년의 여학생은 실습 중이었는데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불편할 환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밝게 해 드리고 싶어서란다. 그 여학생의 해맑은 미소를 기억하련다.

2017. 09 서울적십자병원7병동에서

1층로비

입원증에 선물받은 포켓북 2권

인왕산자락 돈의문쪽에 적십자병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