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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내변산의 봄손님과 놀아난 산행

내변산의 봄손님과 놀아난 산행

"맑은 새벽에 외로이 앉아 향을 사르고/ 산창(山窓)으로 스며드는 솔바람을 듣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불경을 아니 외어도 좋다   

봄 다 가는 날 떨어지는 꽃을 조문하고/ 귀촉도 울음을 귀에 담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도 좋다"       

<해안스님의 시 '멋진 사람' 중 일부문>

-내소사전나무숲길-

내소사일주문 앞의 할망당산목이 오색치마를 걸치고 마중을 나왔다. 세수가 950살을 넘었으니 주름진 몸매도 볼만한데 정월대보름에 스님들이 인줄 옷 걸쳐드리고 극락왕생을 치성 드렸나싶다. '나고 죽는 곳이 여기고, 여기가 나고 죽은 곳이 아니다'라면서 말이다.

일주문과 할망당산나무

일주문을 들어서면  총총 전나무 숲이다. 파란하늘이 차일처럼 드리워진 숲길은 오싹하리만치 서늘하다. 심호흡으로 일상을 걸러낸다. 십여 년 전 이곳 전나무숲에서 맡았던 알싸한 서늘함과 더덕향기를 기억한다.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해도 절로 치유가 될 것 같은 전나무사이를 거닐다가 왼쪽의 작은 연못을 들여다보고 몇 걸음 옮겨 도랑을 건너니 부도밭이다.

부도밭

가본다고, 온다고 벼르면서도 오늘에야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앞에 섰다. ‘범부해안은 가끔 내 안에서 생각 키운 스님이다. 비문 뒷면엔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란 흘림체로 탄허스님이 멋들어지게 휘갈겨놨다. ‘생사가 여기서 나왔으나 여기에는 생사가 없다끝과 시작은 오로지 마음이다는 글귀 앞에 한참을 머뭇댔다.

관음봉들머리

다시 아래로 되짚어 내려와서 관음봉엘 오르는 등산로에 들어섰다. 단단히 박힌 돌멩이들과 나무뿌리들이 계단을 만들어 가파름을 수월케 한다. 된비알 길은 한정도 없이 이어진다. 구부러진 소나무 사이로 파란하늘이 갸웃대고 햇살은 겨울한기를 밀어내고 있다. 땀방울이 솟는다. 한 시간쯤 헐떡거렸을까?

거칠게 문드러진 바위능선이 질펀하게 깔려 시원한 망망 무애(無厓)를 펼쳤다. 내소사가 발아래 골짝에 알 박혔고 안무 속에 곰소만이 아스름하다. 햇볕에 세수중인 관음봉의 반질반질한 맨얼굴이 병풍처럼 뒤에 버티고 있는, 전망 좋은 바위마당은 산님들한테 안기는 선물쉼터이다. 해찰 좀 하다 관음봉을 향한다.

관음봉은 바위등허리를 내주는데 여간 지난한 코스다. 북벽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철재계단은 지붕을 단단히 얹었다. 낙석과 고드름총알을 피하기 위해서다. 우뚝 솟은 바위관음봉424.5m는 얕잡아 봐선 큰 코다친다. 오롯이 해발0에서 시작하는 땜에 왠만한 산보다 더 오른다.

바위벼랑을 타고 올라야 할 관음봉

정상은 꾀 넓고 쉼터도 공력을 들였다. 표지석 관음봉도 누구 필체인지는 모르지만 여태껏 내가 본 표지석글체 중에 젤 멋있다 우측에서부터 세봉,용각봉,옥녀봉,덕성봉,의상봉,쌍선봉,선인봉이 파도를 일궈 곰소만안무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바다가 파도를 다 빨아들이면 연봉들은 강강술레춤을 출 것이다.

저 아래 옥색호수는 직소폭포담수일 옥녀호일 테고 호반에 발담근 바위산 너머엔 월명암이 숨어있겠지. 곰소만 저편 안무 속엔 고창선운산자락이 바다를 파먹고 있을 테고~! 난 여기 관음봉엘 3(2014.12) 전 눈폭탄속에 서서 어물쩍 댄적이 있다. 꾀 많은 적설에다 진종일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어 등산로흔적을 찾아 기고 미끄럼 타며 생고생 했던-세상이 온통 눈 퍼붓는 구경만의 아찔했던 추억을 갖고 있어 감회가 다르다.

직소폭포담수-옥녀호

세봉을 향한다. 관음봉과 세봉은 협곡이 깊은 가파른 바위산인데 그 겨울 눈폭탄 속에 어떻게 오르고 내렸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 소름 돋는다. 추억은 고생에 비례한다. 세봉바위절벽 밑 양지바위틈에 산자고가 미소를 짓고 있다. 이 높은 바위틈에서 햇볕만으로 생명을 틔웠다. 봄손님이라! 낳고 사라짐이 여기고, 여기가 태어나고 죽은 곳도 아니라는 걸 며칠 후면 산자고가 일깨워 줄 것이다.

용각, 옥녀봉 사이로 우동저수지

바위능선 위에 빨간여산님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내가 산자고에 눈 팔린 찰나에 말이다. 나나 그녀도 태어남과 죽음은 어디랄 것도 없다. 자연 속에선 한낮 산자고의 생사와 다를 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봄은 그렇게 예쁜꽃손님을 앞세워 마중을 나섰다. 나는 지금 봄 아닌 늦가을에 머뭄일까? 낳고 죽음에 계절인들 있기나 할꼬?

산자고

끝과 시작은 마음이란다. 해안스님이 3년동안 굴에서 면벽수행을 하고 법랍57년을 참선을 하면서 깨우친 만고불변의 진리란다. 해안스님(1901~1974)425일 법문을 마치고 문득 나는 오늘 갈란다. 이젠 손님도 다 떠났고, 조용해서 한결 좋구나.”라고 제자들에게 말한다. 글곤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한 말씀 더 보탰다.

 사리가 나오거든 거두지 말고, 물에 띄워 없애버리고 비석 같은 것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까지 한다. 놀란 제자가  그래도 오셨다 가신 흔적은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간청하자 웃는 둥 마는 둥한 표정으로 굳이 비석을 세우려거든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라고 쓰고, 뒷면에는 생사어시(生死於是) 시무생사(是無生死)"라고만 쓰라고 했다.

퇴색한 낙엽을 헤치고 복수초가 화사하게 요염을 떨고 있다. 놈들이 봄손님이 되어 봄바람마중을 나와 미솔 짓는다.  ~! 낳고 죽는 건 어디서나 있고 그곳이 아니기도 하다. 산행 4시간 만에 다시 아까 통과했던 일주문에 들어섰다. 따스한 햇살 속의 전나무숲은 상큼하다. 서늘하다. 쾌적하다. 

복수초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내소사경내는 단정하고 고품격이 뿜어난다. 웅장하게 솟은 하얀관음봉 아래의 빛바랜 아니, 단청을 씻어내기라도 한 듯한 대웅보전의 희멀건 민낯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세월의 세수를 얼마나 했을까? 대웅전단청은 애초부터 미완인 채여서 어쩌면 민낯이 제 얼굴인지도 모른다.

사천왕문에서 본 내소사전경, 뒤에 관음봉이 병풍처럼 휘둘렀다

대웅전단청작업을 시작할 때 일 끝마칠 때까진 어떤 문도 열지 말라고 했단다. 근디 촐싹대기 동자스님이 방정맞게 문구멍을 내고 단청작업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붓을 잡고 단청을 하던 새가 쓰러지며 단청작업은 내생(來生)이나 소생(蘇生)에 하라고 했다.”라고 미당 서정주님이 쓴 내소사(來蘇寺)에 얽힌 얘기에서 말미암음이다.

삼층석탑,당간지주,대웅전

단청을 안 한 탓에 문짝의 꽃살문양도 닳고 빛바래긴 했지만 독특한 품격과 연륜이 특별해보였다. 내소사엔 그런 특별한 별남이 많다. 그래설까? 내소사 탬플스테이엔 벽안의 도반들이 많단다. 회색빛바위병풍을 휘두른 내소사를 빠져나오며 다시 전나무피톤치드에 목욕을 한다.

봄맞이 손님들-산자고, 복수초, 매화 글고 산수화의 부름 튼 봉우리들의 생명이 피우고 지는 내변산에 시작과 끝이 어디며, 그 있고 없는 곳에 나도 잠시 머뭇대다가 사라진다. 우린 모두는 그냥 손님일 테다. 영원한 건 마음이란다.  生死於是 是無生死

범부해안지묘비 뒷면의 '생사어시시무생사'

아까 세봉정상에서 얼핏 눈길 마췄던 우동호수를 찾아나섰다. 거기에 성계벼락폭포가 숨어 있어서다. 비가 내린 뒤엔 폭포의 위용이 간담을 서늘케 한다는데 오늘 시간이 돼 마른폭포일 망정 눈에 넣고 싶었다. 우동저수지에서 골짝을 십여분 헤집으면 형형색색의 바위단층이 엇 포개져 천길 낭떨지를 이뤘다. 물길은 알 수 없는 하늘 끝 구멍에서 깔겨대고 있다고 해야 맞다.

성계폭포

흩뿌려지는 세류에 무지개가 걸쳤다. 장마철의 위용은 상상을 절하겠다. 하늘에서 쏟아질 폭포수는 여기 바위골짝을 어떻게 후려칠까? 파란하늘을 찢어놓은 바위칼날 위가 궁금하다. 물길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성계가 이 골짝에서 수련했다고 하여 성계폭포라고 했다나? 암튼 장마철엔 필히 와서 그 위용에 흠뻑 젖으리라.    2017. 03. 04

 

우동저수지

꽃잎 터뜨리기 전의 홍매와 백매

부도밭길목의 연못

안범부지비

빛바랜 대웅보전과 꽃살문

대웅보전 삼존불과 뒤 토벽의 백의관음보살 탱화

삼신각과 요사체의 앙증맞은 소각장

벽안의 도반들이 머무는 탬플스테이와 가마솥

청련암가는 이 운치 있는 길이 출입금지라 아쉬웠다

 

지나온 관음봉, 세봉연봉능선

 

능선 너머에 곰소항, 하늘금은 고창선운산자락?

내소사입구주차장

끝판엔 동백과 놀다 온 필자

태어나고 죽음이 맘인데도 이렇게 꾸미고 살고 싶다

멋진 사람      -해안대종사-

고요한 달밤에 거문고를 안고 오는 벗이나/ 단소를 손에 쥐고 오는  친구가 있다면/ 구태여 줄을 골라 곡조를 아니 들어도 좋다 

밝은 새벽에 외로이 앉아 香을 사르고/ 山窓으로 스며드는 솔바람을 듣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불경을 아니 외어도 좋다

봄 다 가는 날 떨어지는 꽃을 조문하고/ 귀촉도 울음을 귀에 담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詩를 쓰는 詩人이 아니어도 좋다

아침 일찍 세수한 물로 화분을 적시며/ 난 잎에 손질 할줄 아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어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람을 베개하고/ 바위에서 한가히 잠든 스님을 보거든/ 아예 道라는 속된 말을 듣지 않아도 좋다

野店斜陽에 길 가다 술(酒)을 사는 사람을 만나거든/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가 다정히 인사하고/ 아예 가고 오는 세상 시름이랑 묻지 않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