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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뻔뻔한 사람들

뻔뻔한 사람들

 

전하, 배고파 도저히 살 수가 없사옵나이다.”

1419년 세종이 사냥 나갔다가 개성영빈관에 들어서는데 맹인(盲人)114명이 어가 앞을 가로막고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세종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딱한 사정을 들은 후 유후사에 명하여 쌀 40석을 하사했다.

鳏,과寡,고孤,독獨, 잔질(殘疾,장애인)은 왕도의 정치에서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에게 환곡(還穀)을 우선 베풀고, 거처할 집이 있게 해야 한다”라고 즉위년(1418)에 어명을 내린 세종은 14212월엔 그 하명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확인감찰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었다.

 

142211월엔 한양에 사는 여자맹인26명이 북을 치며 호소한다.

저희가 환상(還上;관청에서 곡식을 빌린 뒤 가을에 갚는 제도)을 받았사오나 너무 가난해서 현물로 갚을 수가 없어 저화(楮貨)로 갚으려하오니 허락해 주시옵소서.”라고 하소연 하자 세종은 지체 없이 가납했다.

 

또한 숙종실록엔 일각상(一脚相;다리가 하나뿐인 정승)윤지완(1635~1718)얘기가 있다. 정승 된지 일천한 윤지완이 지병으로 다리 하나를 잃게 되자 사직서를 올리지만 숙종은 반려한다.

다리의 병이 짙어 대궐출입이 어렵사오니 강등 면직시켜 주시옵소서.”라고 일각상이 간청한다.

출입 때 부축 받아도 좋다고 내 허락했지 않는가?”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등청을 허락하신다면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사양할 것 없다. 경은 내일 아침에 등청하라.”

 

이렇게 윤지완과 숙종은 79차례나 사의표명과 반려를 되풀이 했다고 실록에 기록돼 있다.

1694년에야 일각상은 관복을 벗었는데 이듬해 숙종은 다시 도승지를 보내 복직하라고 하명을 한다.

일각상은 치병을 핑계로 입궐하지 않았다.

위 세종과 숙종실록의 얘기는 지금부터 320년 내지 600

전의 절대왕정시대의 실화다.

 

 

이 실록을 보면서 문득 화나고 서글퍼지는 건 작금의 우리사회의 한심스런 최고위 위정자들의 행태 땜이다.

세월호유가족들도 맹인 못잖은 자식 잃은 마음의 장애인들 다름 아니다. 그들이 지금도 도처에서 하소연하는 건 죽은 자식 살려내란 것도 아니고, 앞으로 그런 비극이 발생 안하게 큼 원인을 밝혀 재발방지책을 확실하게 세우자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면담은 커녕 시원한 대답조차 시큰둥 외면한다. 대통령의 최측근인 우병우수석은 또 어떤가?

 

 

우병우 자신은 떳떳하다 생각할망정 그의 허물은 너무나 많이 까발려졌고, 국민정서도 용납지 않고 있다.

버티면 버틸수록 대통령께 누가 되고 국정은 엉망이 돼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 된다.

윤지완은 다리 하나 불구일 뿐인데78번이나 사직서를 올렸던 것은 임금이 (불편한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편하게 정사에 올인 하게 하기 위한 충심과 원려가 아니었을까

 

 

박근혜정부 고관들의 청문횔 보면 뻔뻔한 얼굴이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박대통령주변엔 그런 낯가죽 두터운 속물들만 있나?  그 중에서도 우병우는 뻔뻔하다 못해 철면피다.

더구나 지금은 대통령도, 장관도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잠시 동안 행사하는 공복일 뿐이다. 주권자인 국민한테 위임 받은 권력으로 주인을 우롱하며 안하무인 짓 함은 눈뜬 병신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세종과 숙종임금이 지하에서 통탄할 작금의 현실이다.

 

              정창권의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참조함.

2016. 9월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