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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

노송과 바위산의 성주봉

★ 노송과 바위산 (성주봉) ★


하날이 뫼를 여러 세계(世界)도 밝으시고

천추(千秋) 수월(水月)이 분(分) 밧긔 맑아세라

아마도 석담파곡(石潭巴谷)을 다시 볼 닷하여라 ㅡ<옥소의 서시(序詩)>ㅡ


봄은, 생명은 아직도 엷은 커튼을 거두질 않고 있다. 고고(呱呱)의 진통이 부끄러워서인가 수줍음일까? '잔인한 4월‘은 5일하고도 10시 반인데도 아직도 안개커튼을 드리우고 있다.

문경읍 당포1리 성주사 입구에서 안개커튼 속으로 들어선다. 들머리에 들자마자 거대한 바위산은 45도에 가깝게 일어서서 찾아드는 우리를 빡세게 혼줄 내킨다.


흙 한줌이 아쉬운 흰 바위산은 세월의 때깔을 긁어모아 육송들을 건사하고 있는데, 모두가 영양실조인 듯 훼훼 굽어 안쓰럽다. 허나 그놈들이 그리 멋있을 줄이야!

반시간쯤을 그놈들에 눈 팔며 그놈들이 허리에 맨 밧줄에 의지하여 헉헉대니 협곡 골자기에 닿았다. 거기엔 수백 년을 수문장처럼 서 있는 거대한 적송 한그루가 우릴 맞는데 마담·서울이 적송을 붙들고 있다. 서울서 이사 와서 첫 산행이란 듯싶은데 반가운 해후일까?

디카를 꺼내니 같이 담아달란다. 거송과 마담·서울을 좁은 렌즈에 박았다. 렌즈 속에서 나온 마담·서울 왈, “사진쟁이(작가) 신가보다.”라고 나를 신분상승을 시키자 나의 디카가 코웃음을 짓는다. 셔터만 누를 줄 아는 내인지라 가소롭다는 거다.

협곡에서 산릉을 타기위해 벼랑바위를 밧줄에 목숨 걸고 오른다. 706고지쯤에서 버스 속에서 인사했던 김선생님(정퇴한지 오랜데 아까 회장께 맡겼던 책<남김없이 내려놓는 우리명산 답사기>를 들고 계셨다)을 만나 동행을 한다. 산력이 20년도 넘은데다 분재까지 조예가 깊으시니 진정한 산님이라. 요소마다 메모 철을 꺼내 뭔가를 적으신다. 에세이집 두 권을 출간하셨다는데 불원간 멋있는 산행기가 나올 듯싶다. 정갈하고 단아한 자태에서 선비풍취가 역역하였다.

706고지에서 790고지의 협곡은 20여m 절벽이어서 밧줄타기 스릴을 즐기다(?)보니 지체가 심하다. 능선 양편은 바위벼랑이고 능선에 서있는 적송들은 자연이 빚은 최상의 멋을 뽐내고 있다. 그 멋들어진 호사로 산님들의 뭍 시선을 훔치고 있다. 소나무분재 중에서도 육송을 최고로 치는데 여기의 아름드리 육송은 자연생이니 찬미하기엔 혀가 짧다. 그놈들이 파란 하늘 캔버스에 굵은 가지를 얽히고 뒤엉켜 기막힌 묵송화(墨松畵)를 그렸으니 거기에 어찌 아니 빠질 수가 있으랴.


그 굵은 나무를 훼절시킨 범인은 누굴꼬? 필시 해님일 테지만 죄를 물을 수 없음은 그들이 좋아서 벌인 수작이 아니던가. 그 빤히 속뵈는 수작이 수십 수백 년의 때를 입어 아름다움으로 빚어지니 자연의 오묘에 감탄할 뿐이다. 우리도 아니, 나도 나이 들며 추잡한 때는 안 쪄야 할 텐데 냄새가 솔솔 지피는 것 같아 부끄럽다. “늙어가며 아름다워진다.”는 소릴 듣는 인생은 성공한 삶이겠다.

pm 1시가 되니 성주봉(960m)이 소나무 정원을 이뤄 나를 맞고 있고, 산님들이 좋은 자린 선점하여 식도락에 빠졌다. 전망 좋은 자리를 물색타보니 협곡까지 내려왔다. 거대한 선바위가 나에게 소나무를 가리킨다. 천애바위 모퉁이에 거대한 육송 한그루가 외롭다. 조심 찾아드니 두서너 명 앉을자리가 죽여준다. 수직거암은 어디서 구해 심었는지 회양목을 키워 초록리본처럼 달았다. 그 초록리본을 거암배꼽에서부터 아래로 몇 개를 더 달았다. 배낭을 푼다.

김수연회장이 선바위에 나타나 초청을 했다. 달랑 김밥 두 줄 비닐에 말아 허리에 차고 있었다. 두 달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통원치료중인 그를 어제 난 전화로 인사를 했고, 오늘 산행에 낄 수 있는 영광을 줌인데, 왼편 어깨를 못 쓰면서도 산행을 하고 있음에 난 그의 오기(?)에 경악타 못해 탄복한다. 회장 옷을 입을만한 의지를 엿보게 됨이다. 그때 김선생님이 나타나셔 얼른 초대를 한다. 셋이서 가장 전망 좋은 장소에서 식탐에 빠진 게다.

앞엔 운달산이 눈앞에 서 있고 아랜 목반석골이 라지(裸枝) 숲에 숨어있다. 신선놀음이라.


두시가 가까워서야 하산한다. 바위너덜 급경사 길은 상록수 한그루 없는 나목들의 무성함에 더해 건조하고 단조롭다. 먼지투성인 된 이름모를 야생화 한 송이를 발견하여 디카에 가뒀지만 뒤집어쓴 먼지만큼 뿌옇다. 해찰을 하다 최기찬 사장(전 회장)일행과 합세했다. 3년 전쯤 ‘만수산악회’에 초청한, 그리곤 이제 찾아뵙는 한심한 나를 그는 반갑게 안아줬다. 담대하고 후덕한 넉넉함은 그가 조직을 꾸리는 카리스마로 작용하나 싶었다.

그가 일행 중에 현직인 황선생님(여)을 살짝 귀띔 소개해 줬는데, 산력도 꾀된 황선생을 몇 분간 엿보며 느낀 점은 산에 오르면서 아니, 집을 나서면서부터 모든 옷[짐]을 벗어놓는가 싶은 거였다. 일상의 허울(?)과 짐을 오롯이 벗고 드는 산행이기에 일희일비하는 순진 속으로 빠지게 되지 않나 싶었다. 황선생이 그렇게 보여 부러웠다.

성주봉 아랫마을에서 자연에 심취하여 체험문학에 정진했던 조선 후기의 선비 옥소 권섭(權攝,1671~1758)을 생각게 하는 팻말을 보았었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위고 백부(수암,권상하)의 집에서 살면서 수암의 고결한 선비정신과 인생관 및 세계관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인근의 도락산에 심취했던 우암의 수제자였던 수암은 그곳 상선암에 초가정자를 지어 후학양성과 학문에 전념했던바 옥소가 그의 자연사랑을 이음은 당연함이라. 옥소는 주자에서 율곡-우암-수암을 잇는 학풍을 실천하려 무던히 애썼다 할 것이다.

그가 빼어난 경치[황강구곡]를 읊은 서정적인 시작 한 수를 옮겨본다.

知是欺區有地靈 (이곳에 신령스런 땅 있음을 알겠으니)

溪流九曲此登淸 (계곡물 아홉 구비 맑고 깨끗하구나)

幽深洞裏昭明界 (그윽하고 깊은 골엔 뛰어난 경치 펼쳐지고)

到處名村自萏聲 (이르는 마을마다 옛 명성 그대롤세)

옥소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54세 때 부실(副室) 이씨가 살고 있던 이곳 화지동(花枝洞) 자연에 묻혀 자연을 예찬하는 시가학문에 전념하여 일가를 이뤘다.

수암이 경영하던 황강구곡원림(黃江九曲園林)에 대해 옥소는 아래와 같이 읊은 화양구곡가를 옮겨본다.

한벽 하늘에 닿고(一壁同擊天) 한 소 그 아래 열렸네(一泓其下開).

아래에 앉아 휘돌아보니(下坐一却顧) 봉우리들이 어찌 그리 높은가(數峯何嵬嵬)

자팡이 지포서 나아가니(携且進步) 걸음걸음 모두 배회함 일세 (步步皆徘徊)

나의 짝꿍 박인규님과 그의 걸출한 후배님이 화기애애케 하는 분위기로 해서 난 기분 좋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걸출한 후배님이 나더러 나이를 묻기에 답하니 아직 한창 젊은 때라고 격려(?)를 하는가 하면 뒤풀이가 아쉬웠던지 가게에 숨어들어 2차를 하는 네 분을 떼놓고 그냥 가고 21세기 기사에게 주문한다. 넷이서 택시를 타고 오면 딱 맞는다나. 그런 반면에 궂은일도 솔선한다. 위트와 패러독스가 넘치는 후배님은 조직에 필요한 활력소여서 그 또한 나를 들뜨게 했다. 행복한 하루 들뜬 귀로 - 창에 해님이 빨갛게 화장을 하고 서산너머로 숨바꼭질을 하며 나를 자족감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09. 04.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