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호수 찾아가는 타임머신
선암호수 찾아가는 타임머신(time machine)
1주여 일 전 울산대공원 장미축제장을 한 바퀴 산책하고 정문 쪽의 숲속오솔길을 걷다가 ‘솔마루길’ 이정표를 발견했다. 선암호수공원까지 4.5km이던가? 울창한 소나무숲속의 흙길은 나를 단박에 사로잡았다. 게다가 도심(都心)의 야산이지 싶어 늦은 시각이긴 했지만 본격 트레킹에 들었다. 트레킹하기 딱 좋은 자연 산길이었다. 게다가 마주친 선암호수공원은 나를 미치게 만드는 매력적인 풍경이었다. 시간이 없어 경보경주 하듯 2km남짓의 호수 둘레길을 일주했다. 문제는 태화강역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을 찾기가 난망이었다는 점.
오후6시를 넘겼다. 묻고 또 묻고 버스환승을 하여 태화강역 닿았을 땐 어둠이 베어들고 있었다. 열차 속에서 다시 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던거다. 오늘은 태화강역 직전의 개운포역을 들`날머리로 정했다. 인터넷서핑을 열심히 해봤지만 개운포역과 선암호수공원의 지도상의 공인된 통로는 없었다. 거리상으론 동해선역들 중 젤 가까운 유명관광지인데 설마 멧돼지통로라도 있겠지 싶어 용단을 냈다. 정오에 개운포역에 내렸는데 딱 두 사람이었다. 화장실 보고오니 역사는 휑했다. 사무실에서 남녀직원 두 분에게 선암호수공원길을 물었다.
고개를 갸우뚱대다 역사 뒤 주차장에서 비포장도로을 따라 가면 될(?) 거라면서 자기들도 한 번도 가 보질 안 해서 미안하다고 미소작전을 폈다. 꽤 넓은 비포장신작로엔 우측은 수풀우거진 하천이고 좌측은 공장부지 아님 (빈)창고건물이 비포장도로만큼 누추하다. 사람 기침소리도 그림자도 없다. 5월의 따뜻한 햇살이 여과 없이 침입한다. 글다가 우측 수풀 속에서 매실나무가 아직 털보송한 푸른 열매를 내 보였다. 반가워 들여다보니 떼거리다. 양지쪽 놈은 누런빛도 감돈다. 한땐 돈벌이 과실로 신주 모시듯 한 매실나무다. 한 개를 따서 베어 맛본다.
시큼하고 떨떠름한 수액이 입안을 소독(?)했다. 어릴 적 울`집 텃밭에 매실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갓 결혼한 형수님이 “도련님, 나 매실 하나 따다주면 안돼요?”라며 웃었다. 냅다 달려가 간짓대로 세 개를 따다드렸던 기억이 새롭다. 형수는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입덧하던 참이었던가? 저 세상에 계셔서 아련한 기억일 뿐이다. 한 발짝 떨어져 오디나무가 까맣게 익은 놈을 앞세워 인살 한다. 팔을 내밀어 손에 닿자마자 내 입안으로 들어간다. 달달 떠름한 기묘한 맛의 즙이 초등시절로 타임머신열차에 승차시켰다.
달짝지근한 오디의 감칠맛은 까맣게 잊은 추억을 소환했다. 한 알씩이 성에 안차 손안에 모아서 입볼 터지게 밀어 넣었다. 선혈 같은 오디즙이 손가락을 아픈 상처(?)로 물든다. 오디나무가 여기저기 띄엄띄엄 산재했는데 숲속의 하천 둑 가장자리 벼랑이라 발 내디딜 곳이 없다. 모처럼 횡재가 빛 좋은 개살구가 된 판이다. 더구나 동면에서 깨어났을 뱀 생각에 오싹해졌다. 암튼 뽕나무 가질 잡아당겨 오디서리에 망중한인데 자동차가 굉음을 내며 나타났다. 집채만 한 덤프트럭이 거북이처럼 다가와 내 곁에 바짝 달라붙었다.
“뭐 하시오?” 고갤 들어 쳐다보니 운전석의 기사님이 웃고 있다. “오디 따먹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손바닥의 오디를 보여줬다. “보약 자시는구먼. 거기에 뽕나무가 있었네요.” 그러고는 거북이는 먼지를 뽀얗게 일구며 싱겁게 기어갔다. 앗차, 처음 마주친 사람이었는데 ‘선암저수지 길’을 묻지 안했다. 먼지 속으로 쫓아갈까 하다가 오디에 더 미련이 남았다. 입술도 빨간 루즈칠 범벅이 됐을까? 거울이 없다. 매실나무가 이따금 나타나 시샘시늉을 하고 있다. 매실은 어느 날 갑자기 매력을 잃었다. 우수수 땅에 떨어진 매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현실이다.
하긴 아내도 매실주 담는 것조차 잊었지 싶다. 십여 분을 그렇게 오디에 빠졌을 테다. 수풀 속에 빨갛고 노랗고 파란 알맹이를 무수히 달린 관목이 이파리를 흔든다. 초록보자기에 섬섬옥수 자수(刺繡)를 놓았다. 곰곰이 생각하니 보리똥(보리수열매)이라. 가까스로 팔을 넣어 몇 알을 따 입에 넣어 씹는다. 씹는 게 아니라 이빨로 씨를 발라낸다. 한주먹을 입에 넣어도 씨 뱉어버리면 과육은 간에 기별도 안 간다. 게다가 맛도 달`떠름해 뒷맛도 개운 찮다. 내 어릴 적의 보리똥은 최상의 입가심거리였다. 놈은 대게 무주공산(?)인 산야에 있어 편하게 따먹는 열매였다. 오디나 매실은 따먹다 들키면 치도곤을 당하지만 보리똥은 감시(監視) 밖이었지 싶다.
근디 보리똥나무가 장난이 아니다 싶게 수풀 속에 군락을 이뤘다. 아직 완숙하진 안했어도 비닐봉지 하나 채우긴 일도 아니지 싶었다. 맛이 별로여서 너는 행복하겠다? 무지막지한 사람의 횡포는 안 해도 될터라. 하천은 상개저수지로 웹상 지도에 표기 됐는데 실상은 늪지대다. 인적 끊긴 늪에서 강태공 한 분이 세월 낚느라 삼매경이다. 내 딴엔 반가워 인사말을 하며 길을 묻는데 마이동풍이다. 입질하는 물고기가 말소리에 달아나는가? 햇살이 늪을 덮은 수초 잎에서 빛깔놀이를 한다. 야생꽃송이들이 여름기운에 풀죽어가고, 짙어지는 녹음 속에 열매도 변태를 거듭한다. 제법 큰 감나무가 무성한 잎 속에 새끼 감을 숨기고 있다. 새끼감이 떨어뜨린 감꽃(감똑)도 내 어릴 적엔 입가심거리였다.
새끼감이 덩치를 키우다 제풀에 떨어지자마자 주어다가 따뜻한 물동이에 이틀쯤 우려먹던 정황이 겹쳐졌다. 우린감은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열매 굵은 감나무가 있는 집이 부러웠던 그때 울`집은 접시감나무 네댓 그루가 집안에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감 줍느라 선잠을 깼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허름한 슬레이트집 갓길에 씨알이 굵은 복숭아나무가 있어 사진`포인트 찾느라 기웃대는데 할머니가 불쑥 나타나 “뭣 찍소?”하는 통에 기겁을 했다. “예 복숭아가 탐스러워서요.” “익을라먼 멀었는디 찍어서 뭐하게?” 내가 웃자 할머니도 웃었다.
복숭아가 익으면 엄청 크고 맛있겠다고 부러워하자 할머니 왈,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부산서 왔는데 참 선암호수공원 가는 길 아세요?”라고 묻자 “저 다리 밑 지나면 선암저수진디 거기가요?”라는 대답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할머니 얘긴 즉 쬠 공갈 보태자면 누우면 코 닿을 위치였다. “6월중순경엔 다 익어요?”라고 내가 묻는다. “글지, 그때 와서 따먹으면 될턴디~”라고 할머니가 안됐단 듯싶어 내가 또 참견했다. “그냥 따먹고 가면 도둑놈 되게요?”라며 웃자 “괜찮어, 이 집에 사니께 날 찾아~”라며 뒤쪽의 낡은 스레트집을 가리킨다.
고맙다고, 6월에 오면 꼭 그러겠다고 인사를 하고 고가다리를 향했다. 옛날 내 엄니 같은 구부정한 할머니를 되돌아보며 타임머신여행에 한껏 빠져들었다. 허물어져가는 블록담장을 월담하는 빨간 장미가 5월의 정열을 불사른다. 하얀 접시꽃 당신 옆에 진홍의 접시꽃이 결혼식 하는 냥 환하게 웃고 있다. 색색의 꽃이 수줍게 고개를 들고 푸른 잎 사이로 햇살이 번지는 풍경을 그렸다. 언젠가, 그 햇살 아래 기억이 피어나길 바라고픈 순간이었다. 변덕 심한 봄을 새 생명들은 용케도 잘 버텨내며 꿈을 실현한다. 그런 조용한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게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으로의 여행인 타임머신 넘나들기다.
오래전 내가 초등학교 오가던 시골의 신작로가 오버랩 됐다. 철마다 풍경색이 변하던 그 흙길엔 오직 햇살과 바람과 먼지가 신작로를 차지했다. 길가의 모든 돌멩이와 나무들을 기억하고, 논밭두렁의 풀냄새와 도랑물의 치어들이 지금도 내 기억 한 귀퉁이를 자리 잡고 있다. 함께 걷던 깨복쟁이 친구들의 수다소리, 시원한 5월의 부드러운 바람결, 따스한 봄볕이 깨우는 감각의 촉수가 선암호수로 가는 신작로에서 겹쳐진다. 관광여행의 행복은 멋지고 예쁜 곳에서 얻는 황홀한 감동이겠지만, 허접한 시골 신작로 흙길에서의 타임머신 감격도 뭉클하다.
그 길이 내 안으로 이어지면 그리워지는 것들이 하 많다. 고가도로 아래를 통과하니까 바로 앙증맞게 작은 쉼터가 선암호수와 손잡고 있다. 워낙 해찰을 많이 해서 뭣하지만 반시간쯤이면 호수에 닿아 떡을 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근디 이 신작로를 외면(?)한다? 자가용이 웬수여서다. 요즘 젊은이들은 100m길도 걷기를 꺼린다. 길 위에 역사가 존재함을 망각한다. 드뎌 선암호수둘레길 소요에 들었다. 두 번째라 낯익은 놈들이 아는 챌 한다. 삶은 기억이고, 그 기억은 여행이 주는 선물로 채워진다. 오늘 선암호수공원에서 기억 한 귀퉁일 채울 거다. 걷는 건 그런 귀퉁이 평수를 넓히는 탐험이기도 하다. 아기자기하고 멋들어진 선암호수공원은 베일 한 자락을 더 풀어 헤치고 있다. 2025. 0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