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바위 - 제4망루 - 의상봉 - 무명암 - 원효봉 - 북문 - 범어사
부채바위 - 제4망루 - 의상봉 - 무명암 - 원효봉 - 북문 - 범어사
온 산야는 연둣빛세상이다. 눈 몇 번 감았다 떴다헝게 시야를 하얗게 도배질하던 벚꽃이 비바람 훅 부니까 사라졌다. 허허했다. 그 허허로움 자리를 복사꽃이 유혹하더니 누군가의 입김에 연두이파리를 산고(産苦)한다. 밤새운 새싹이 기지개 펴는 아침은 파릇파릇 싱그러운 5월의 봉창을 열었다. 잔인한 4월은 산통(産痛)을 5월에 안겼나 싶고. 봄은 태어남과 죽음이 만나 다투는 계절이다. 복사꽃 진자리에 완두콩만한 복숭아가 달렸다. 봄은 소멸과 동시에 생성을 준비하여 처음과 끝이 영원하게 한다. 꽃이 피고 지고, 또 피 듯 우리네 사랑도 그렇게 영원을 기한다.
부산외대 우측골짝 물길 산길을 들머리 삼아 걷다가 철망울타리를 월담하는 복숭아나무를 조우한다. 언제 피었던지 복사꽃이 진 자리에 복숭아 지 씨알보다 작은 새끼복숭아를 산고(産苦)하다가 나한테 들통났다. 자연의 신비~! 생과 사가 끝없이 윤회하는 봄의 경외(敬畏)였다. 그래 최재하의 시(詩) <복사꽃>이 생각났는데 전문을 못 외어 집에 와서 찾았다.
---< 복사꽃 >--- 최 재 하
“따로 할 말 없는 / 나의 연모를
그대가 알았으면 좋으련만 / 그대 복사꽃 위에
내 가슴 살포시 붙이고 / 따뜻한 꿈 지피며
서편에 달 다 질 때까지 / 남은 여정 그대와 더불어
영원한 혼불 태우려니 / 행여
바람 한 자락에 지는 / 복사꽃 되려 하지 아니하겠지.”
그때가 언젠데? 내가 연연했던 애모의 연정을 지금 그대도 알고 있으면 좋으련만, 복사꽃 그대 가슴에 내 연심(戀心)을 포개어 꿈으로 지폈으면, 서편에 달 다 질 때까지. 그대는 지금 어디서 복사꽃을 마주하고 있을까? 만날 수 없어도 남은 생 마음의 여로를 공유하고 싶어라. 젊은 날 복사꽃연정에 노심초사 안 해본 사람 없을 테다. 아니다 복사꽃 당신과 꽃피우고 지기를 얼마인가! 달도 다 질 때가지 열매 맺으며 영원한 혼불 태우고 있잖은가! 나는 오늘도 금정산을 찾는다. 마르지 않는 금샘[金井]의 물빛 속을 파고들수록 신비경이 나를 포옹해서다.
까마득한 먼 옛날 금빛 나는 물고기가 범천(梵天)이라 불리는 하늘 은하수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한 산마루의 바위웅덩이 우물에 내려앉았다. 둘레가 10여 자, 깊이는 7치가량 되는 바위우물은 날이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물빛이 황금과 같았다고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됐다. 하여 ‘금샘’을 품은 산을 ‘금정(金井)’이라고 명명했다. 금샘은 빗물과 안개이슬이 바위 홈에 고여 잘 마르지 않아 저장된 바위 홀이다. 금샘의 물은 산바람이 불 땐 금빛파장이 일어 신비경을 자아내는데 금샘의 물이 마르면 큰 재앙이 온다고 전해진다.
금정산엔 기암동굴이 71곳, 산지습지가 13곳이나 있단다. 아마 산바람과 바닷바람이 맞받아치는 특이한 환경이라 다양한 식물들의 보고가 됐을 테다. 다양한 수목들이 빼곡하게 자생하는 울창한 산림은 기암괴석과 바위너덜바다까지 발달하여 식생의 윤회가 원활한 태곳적 산림을 이뤘다. 아름다운 금정산은 망망대해를 품에 안으며 부산이란 유토피아를 낳았나 싶고. 부산시민들을 행운아라고 나는 감히 나불대곤 한다. 나도 그 행운아의 멋과 맛을 감지하느라 처갓집 드나들 듯 금정산과 장산자락을 찾는다. 그래 알량한 나도 부산시민이고 싶어지는 게다.
오늘은 남산역에서 부산외대 우측산자락을 들머리 삼아 금정산성 제4망루를 정점으로 무명암과 부채바위, 의상봉을 알현(?)하고 북문을 통과 범어사로 빠지는 산행을 할 참이다. 금정산성은 애초에 동래읍의 동래산성이라 불렸으나 1971년에 금정산성으로 개칭되었단다. 1703년(숙종29)에 축성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다시 증축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다. 성곽둘레 1만 7336m, 높이 1.5∼6m인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으로 동·서·남 3문과 성곽 및 4개의 망루가 있다. 내친김에 금정산성 17,336m를 완주하고 싶다. 언제까지가 될 진 모르지만-
금샘 부근에서 시작하여 범어사에 이르는 바위천지 골짝 2.5km의 바위틈새 사이 터널엔 사시사철 물이 흐른다. 그 물길이 물리적 화학작용에 의해 바위를 쪼개 가르고 부수면서 물이 스며들어 얼었다가 녹으면서 암석 밑으로 물이 흘러 암석바다를 이뤘다. 그 물소리는 선의 경지에서 불심을 듣게 해 대성은수(大聖隱水)라 한다고 금정8경에 기록됐다. 그 바위천지 물길이 동래온천수의 시원이 됐을 테다. 내 어릴 적에 동래온천장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었다. 신혼여행과 관광지로 회자됐었고 나도 중학교 때 경주수학여행 갔다오면서 동래온천서 일박했던 기억이 아삼삼하다. 길엔 나의 삶의 발자국이 찍힌다. 2025. 0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