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청련암,내원암,계명암에서 세심(洗心)을~!

peppuppy(깡쌤) 2025. 5. 3. 09:58

청련암,내원암,계명암에서 세심(洗心)을~!

범어사 입구 당간지주

연둣빛 세상, 싱그러운 5월이 빗장을 풀었습니다. 근디 마음이 영 편치를 않습니다. 대법원이 이재명의 선거법 위반(2심 무죄)을 원심파기 한 후폭풍 탓에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 세상’이라 흥얼대던 설렘이 느닷없는 폭풍우에 멈칫댈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오피스텔을 나섰습니다. 버스에 올라 금정산을 향했지요. 연둣빛 산록에서 뭉그적대면 다소 평정심을 찾을까 싶어서 였습니다. 신작로에 이팝나무가 하얀 면사포를 뒤집어 쓴 신부마냥 달려왔다가 지나칩니다. 내 소시 적 가난한 시절엔 하얀 쌀밥나무 - 이밥나무라고 불렀습니다.

일주문(조계문)은 고개를 숙여야 입장할 수 있게 층고가 낮다, 거만 떨지말고 겸손하게 들라는 방책(?)이었다
7층석탑과 종무소
조계문
청련암 강현루

가난한 촌부(村夫)들은 품삯 대신 슬하의 애들 대리고 와서 한 끼니를 때우려고 고심한 시절이었으니 이팝나무가 쌀밥나무였으면 싶었을 텝니다. 끼니걱정만 안하면 좋았던  그 시절이 행복했지 싶습니다. 큰길바닥에 나앉아 목 터져라 외치는 것도 모자라서, 비닐로 몸뚱이 감싸고 추운 밤을 지새우며 정의사회를 외치는 오늘 날의 우리들은 정녕 행복한가? 스스럼없이 자기 할 일 하면서 편안하게 잠자리 드는 가정이 행복한 삶일 겁니다. 잘난(?) 위정자들은 과연 그런 사회를 위해 임무를 다하고 있을까요? 세칭 일류대학 법학을 전공했다는 위인들이 지탄받는 이유는 뭘까요?

범어사 보제루에서 조망한 사찰 일부
범어사 굴뚝
범어사 대웅전 앞 연등

법은 시민들이 공감하는 보편타당한 규범으로 중의(衆意)에 순응하는 공공의 질서일 것입니다. 중의를 저버린 법집행은 국가의 불행을 자초합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의 판결은 사회의 안녕 보다는 혼란을 더 부추기는 졸속한 판단이란 힐난을 자처했습니다. 신록 무르익은 범어사 총림 산문에 들어섭니다. 일주문 향하는 갓길 왼편 바위에 말에서 내려 걸어들어오라는 下馬(하마)바위가 있습니다. 배불숭유(排佛崇儒)가 국시인 조선조에서 고관대작의 겸양을 요구한 경고판 이었습니다. 말(馬)에서 내린 고관들이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고개를 숙이라고 천정도 낮춰 인간평등의 만고진리를 되새기게 했습니다.

범어사 율학승가대학원 길 (설법전 뒷길)
범어사 해행당 돌담길
청련암 숲길

만인에게 평등한 법률집행이 애매할 경우엔 약자(피고)의 편에 서야합니다. 민심에 부합하는 판결을 위해 <이솝우화>의 해님과 바람의 이야기는 혜안(慧眼)을 상기케 합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건 바람이 아니라 계속 내려 쬔 햇빛이라는 사실을 대법관들이 숙고하고 상호 설득했어야 했습니다. 이번 판결을 주도한 조희대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판결에 앞서 범어사 일주문(조계문) - 천왕문 - 불의문 - 보제루를 통과하며 불법(佛法)의 의의를 체감했으면 싶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도 사회혼란을 조성하면 악법(?)이 됩니다. 그걸 심사숙고하여 나라가 평안과 희망에 안주하게 함이 법관의 책무이고 법의 개혁일 것입니다.

설법당의 600년된 은행나무
청련암 입구
청련암 강현루

범어사는 근대불교 개혁운동과 항일운동의 산실이었습니다. 오성월(1865~1943년) 스님이 봉건질서타파와 선불교 운동을 전개하여 선종사찰로 거듭났고, 경허스님(1849~1912년)을 조실로 초빙해 범어사가 ‘선찰대본산’으로써 많은 선승을 배출시켰으며, 민족대표 33인 백용성 선사,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3·1운동을 지원한 오성월 선사,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한 만해 한용운 선사, 만해 선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만세운동을 일으킨 김법린 스님이 머문 곳입니다. 1394년 간행본 권4와 권5를 한 권으로 묶은 국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범어사 성보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 소장하고 있답니다.

청련암 대웅전 마당의 연등
▲지장보살을 뫼신 지장원, 극락세계를 기원하는 행선장이다▼

또한 범어사는 6.25 전쟁이 끝나고 1956년 국군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임시 국가현충원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지요. 범어사 우측의 청련암(靑蓮庵)에 들어섭니다. 1709년(숙종35) 신주대사(信珠大師)가 중창하여, 3·1 운동 당시엔 부산 지역의 본거지였답니다. 불교 금강영관(佛敎金剛靈觀)[몸과 마음과 호흡의 조화를 이루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불가의 수행방법]의 본산이자 산실이며 수련도장입니다. 금강영관 청련암에는 지옥(地獄)중생(衆生)의 구제를 서원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지장원이 있습니다. 엄숙한 전당엔 신도들이 사후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염원하는 경건한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금낭화

내원암(內院庵)은 청련암 보다 빠른 1693년에 중창했던 법당과 요사, 후원의 전각 전체가 1982년 겨울에 누전으로 소실되었다네요. 회주(會主)인 승려 능가주지 스님이 중창불사 하고 있음을 경내 여기저기서 목도하게 됩니다. 계명암(鷄鳴庵)은 가파른 계단을 십 분쯤 올라서야 계명봉(鷄鳴峰) 비탈에서 조우합니다.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한밤중에 동쪽의 산정에서 들리는 닭울음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암자를 세워 계명암이라 했답니다. 일본 쪽에서 바라본 계명봉은 장군의 투구 같고, 대마도에서 보면 닭의 형상이며, 계명봉에서 바라보는 대마도는 지네의 형상이라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암탉바위를 없애 버리는 몽니를 부렸답니다.

금낭화(錦囊花); 옛 여인들이 치마 속에 넣고 다니던 주머니와 모양이 비슷하여 며느리주머니, 며늘치라고 부르기도 한데 '금낭'은 특히 귀한 물건이나 사랑의 편지를 담았던 주머니를 의미합니다. 꽃모양이 피를 흘리는 듯한 하트 모양이라서 영문은 Bleeding heart입니다.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정성을 다했으나 여인이 마음을 열지 않자 자결해 버립니다. 그 비련을 뒤늦게 알아챈 여인이 슬픔에 겨워 눈가에 ♥(하트)모양의 눈물이 맺혀 떨어지자 이를 분홍빛 금낭화라 불렀답니다. 하여 꽃말도 ‘수줍은 사랑’,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느아리 꽃
5층석탑

경허대사(鏡虛大師)가 계명암에서「범어사 계명암 창설선사기(梵魚寺鷄鳴庵創設禪社記)를 썼다는 기록으로 봐 선풍진작의 요람이었습니다. 계명암은 1900년대 초부터 선원(禪院)의 개설과 함께 선풍의 진작과 불법을 전파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답니다. 암탉과 수탉 형상의 계명봉 중턱에 자리 잡은 계명암에 오르면 범어사와 고담봉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게다기 신록에 파묻힌 시가지와 안무 낀 바다는 장대한 뷰`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경내엔 보덕굴[법당], 약사전, 요사채, 그리고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오늘 범어총림에서 우울한 마음을 달랬습니다. 산사는 치유의 유토피아입니다.                   2025. 05. 01

내원사입구의 이정표, 고당봉까지 2.9km
▲매발톱▼
▲내원암 경내와 대웅보전 단청▼
▲5월의 꽃 장미▲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실린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 「절화행 (切花行) 」은 젊은 부부의 사랑타령을 노래한다.

진주 같은 이슬 머금은 모란꽃  牡丹含露眞珠顆

꺾어든 신부 창밖을 지나다가  美人切得窓前過

방긋이 웃으며 신랑에게 묻기를  含笑問檀郞

꽃이 예쁘나요, 제가 예쁘나요?  花强妾貌强

신랑이 짐짓 장난스럽게  檀郞故相戱

꽃이 당신보다 예쁘구려强道花枝好

여인은 그 말 듣고 토라져  美人妬花勝

꽃을 밟아 뭉개며 말하기를  踏破花枝道

꽃이 저보다 더 예쁘거든  花若勝於妾

오늘 밤 꽃과 함께 주무세요  今宵花同宿 "

 

▲내원암 삼성각 계단의 꽃잔디▼
계명암 입구
가파른 계단을 10분쯤 올라서야 계명암 일주문이 다가선다
계명암에서 조망한 부산은 몽환적이다
불두화-수국
계명암에서 본 범어사전경
계명암 보덕굴
▲금정산 고당봉(좌)이 보인다▼
계명암오층석탑
계명암보덕굴 (普德窟) 은 기도발이 세기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