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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독립공원의 8월

peppuppy(깡쌤) 2023. 8. 29. 11:58

서대문 독립공원의 8월

순국선열추념탑, 태극기를 음양각한 높이 22.3m의 조각상 좌우에는 길이 40m로 독립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부조했다. 좌측에는 항일의병 무장상, 윤봉길과 이봉창 열사 상징상, 독립군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유관순 열사 운동상이, 우측에는 3.1독립만세상,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상, 순국선열 의병 체포 처형상, 청산리 전투상이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옛 서대문형무소

“나는 귀하가 친우가 한 조언에 의하여 귀하에게 다음과 같은 정보를 보내니 용기있는 정치가가 이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폭로할 것을 호소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에 맡긴다는 비밀협정에 관하여 보고를 받았다는 것은 얄타협정에 관한 정보의 근거로 보아 확실합니다. 이 비밀협정은 미·영·소에 의하여 서명되고 대일전쟁이 종결할 때까지 한국을 소련에게 맡기고 미·영 양국은 한국독립에 대한 공약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에 자유를 약속한 카이로선언과 대조될 수 있는 이 협정의 중요성에 대하여 귀하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바입니다. 이 비밀협정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국제연합의 일원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위에 폭로한 사실은 소련이 극동에 있어서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승만이 미 상`하원의원들에게 보낸 전문, 센프란시코강화회담장에서도!- 

3.1독립운동기념탑, 종로 탑골공원서 옮겼다

1945년 5월 14일, 이승만은 미국 상`하원의원들에게 위의 전문(電文)을 보내 ‘대한민국독립’ 외교전을 펼치고,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기자회견을 열어 얄타회담비밀을 폭로하여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카이로선언’이 유효하단 확인을 받아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탄생한 막후엔 이승만이란 탁월한 인물의 지대한 외교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 6.25전쟁에 대처한 지혜의 산물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가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라고 지칭해 마땅하리라.

이화학당에 재학 중 3.1운동을 맞은 유관순은 조선총독부의 강제명령에 학당이 휴교되자 귀향하여 4월1일 병천장터(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오후 1시경 동지들과 대한독립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유관순(柳寬順 1902~1920)열사의 생가,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작금엔 때 아닌 편향된 이념대립을 부추겨 편가르는 일부 정치인들의 작태는 힐난받아야 하고, 미`일`중 `소 4대국의 각축 속에 우리가 살 길을 이승만 대통령의 지혜와 용기를 금과옥조로 삼아야 함이다. 서대문독립공원을 산책하며 오늘의 평안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통감해 봤다. 평화는 군비경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더구나 지정학적으로 대한민국은 혜안과 불굴의 용기만이 평화를 담보한다. 2023. 8월에 맞는 광복절이 왠지 마음 편하지 않는 게 비단 나만일까?

독립문의 편액 글씨는 매국노 이완용 또는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이 썼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독립문안에 꼭대기에 오르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있는데 콘크리트바닥이다. 평소에는 문이 잠겨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인들을 청나라의 지배에서 독립시켜 주었다.'라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이용하려고 일제강점기에 철거하지 않았던 기구한 암흑사를 가진 독립문이기도 하다.
1896년 서재필이 파리 개선문을 토대로 독일 공사관에게 설계를, 한국인 건축가 심의석이 시공을 담당하여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모금운동과 왕실의 기부금으로 착공하여 1897년 11월에 완공되어 '대한제국의 문'이 되었다. 뒤 민둥산은 인왕산

"조선이 몇 해를 청나라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어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지금은 세계의 제일 높은 임금들과 동등이 되시고, 조선 인민이 세계에서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으니, 이런 경사를 그저 보고 지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요, 조선 독립된 것을 세계에 광고도 하며, 또 조선 후생들에게도 이때에 조선이 분명하게 독립된 것을 전하자는 표적이 있어야 할 터이요. 또 조선 인민이 양생을 하려면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할 터이요, 경치 좋고 맑은 데서 운동도 하여야 할지라."   1896년 7월 4일, 《독립신문》
 

14세에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한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김옥균의 주선으로 1883년 4월에 일본의 도야마육군학교에 유학,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참여 3일만에 실패하자 1885년 4월경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조지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에 귀화한다.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박영효(朴泳孝)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하고, 1896년 4월에 『독립신문』을, 7월에는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민중의 개화 개혁추구와 자주 민권 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관 (獨立館)은 1890년 서재필이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독립협회사무실로 사용한다. 한글현판은 황태자 순종이 쓰고, 일요일 오후 3시엔 독립협회 회원들이 강연회를 열었다. 한일합병 이후 독립문상업학교 등 학교건물로 이용되다 철거되었다. 1996~1996년에 서울특별시에서 재건하여 현재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 및 전시실로 사용중이다▼
1908년 일제가 세운 '경성감옥'은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와 군사독재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를 수감한 악명 높았던 감옥으로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특히 일제강점36년간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당하고, 국가발전이 중단되는 고통의 역사이다.
안산봉수대에서 조망한 서대문 독립공원, 멀리 남산이 보인다
수경조형물
매헌 윤봉길의사 유허비, 1930년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換)' 글을 남기고 상하이로 망명,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일제의 전승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시라카와대장등을 즉사시켰다. 선생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19일  총살 순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