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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눈발 흩날리는 을씨년스런 경희궁

눈발 흩날리는 을씨년스런 경희궁

 

흥화문

눈발이 흩날린다. 겨울나비의 군무가 아름다운 경희궁에 들어서자 하얀 설국이다. 이신(李紳)이 썼다는 흥화문(興化門)현판이 겨울나비들의 어지러운 춤사위 속에 형언하다. 캄캄한 밤에도 고개에 서면 현판글씨가 빛이 나 언덕을 비친다 해서 야조현(夜照峴)이라고 하였다 했다. 언제 캄캄한 오밤중에 와봐야 한다.

숭정문 앞마당

흥화문을 통과 숭정문을 향하는 대궐은 하얀 눈 세상이다. 그 많은 상처의 얼룩을 지우기라도 해야 할 것처럼 경희궁은 고즈넉하게 눈 치장을 하고 있었다. 1620년 광해에 의해 창건 된 경희궁은 정작 그는 편히 누워보지도 못하고 인조반정으로 쫓겨난다. 글고 인조는 이괄의 난으로 불탄 창덕`창경궁을 재건하기 위해 인경궁을 비롯한 경희궁전각들을 헐어 창덕궁재건에 이용한다.

 

선대가 세운 궁궐이 채 단청도 마르지 않은 3년만에 헐려나갔다. 타의에 의해 보위에 오른 인조는 재위동안 쪼잔한왕노릇 적잖게 했었다. 암튼 경희궁궐은 초장부터 형편없이 망가져 수난의 역사를 지속한 끝에 궁궐의 위엄은 사라져버렸다. 광해지우기에 혈안이었던 인조는 차마 아버지 정원군의 잠저였던 경희궁은 훼손할 수가 없었다.

숭정전회랑 뒷뜰

발자국 하나 없는 순백의 대전을 향해 숭정문에 들어서자 곱디고운 안내아주머니가 부스 안에서 인사를 한다. 발자국하나 없었는데 어떻게 왔을까? 고궁의 적막과 휑한 역사의 뒤안길을 지키느라 여인은 얼마나 심심할까? 인왕산자락길로 드는 샛길까지 묻고 감히 어도(御道)에 발자국 남길 수 없어 회랑으로 숭정전에 올라섰다.

 

200여 년 동안 여기서 경종과 정조가 즉위하였고, 숙종과 헌종이 가례를 치렀었다, 영조는 재위기간 8번에 19년간 경희궁에 머무르며 '창덕궁엔 금까마귀가 빛나고 경희궁에선 옥토끼가 밝다'는 어필을 남겼을 만큼 경희궁을 사랑했다. 그런 영조가 사도세자의 비밀을 금언(禁言)시켰는데 정조가 1770년에 즉위하면서 그것을 비아냥대듯이 포효한다.

 

역사박물관 후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친 곳이 바로 경희궁의 숭정전이었다.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란 존재할 수가 없는 법이고, 진실은 곧 밝혀지기 마련인 것이다. 정조도 경희궁궐 가장 높은 곳에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송단'이라 부르며 거기서 시를 읊고 경치를 감상하곤 했었다. 또한 세손 때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책 한권을 읽을 때마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었다고 술회한 곳이 바로 동궁의 경현당이다.

 

금천

경현당에선 소현세자가 관례를 치룬 곳이기도 한데 어디쯤인지 모르겠다. 경희궁에서의 마지막 행사는 1844년 숭정전에서 치러진 헌종의 가례였다. 인적 없는 태령전에 발자국과 숨소릴 남기며 뒤 뜨락을 거닌다. 하얀 뜨락 저편에 물기 젖어 반들거리는 검은 바위가 있고 아래에 쬐그만 약수터가 있다. 바위에 암각된 영열천이란 서체가 보일 듯 말듯한데 숙종이 서암이라고 명명했단 약수터다.

경희궁의 수난은 인조반정에 앞장선 이괄(李适)이 논공행상에서의 홀대에 불만을 품고 1624311일 조선최정예반란군12천을 이끌고 남하 329일 한양에 입성하면서다. 인조는 도망가고 이괄은 텅 비다시피 한 경복궁과 창덕궁을 접수 불태우며 경희궁에 아지트를 두고 정부군인 도원수 장만과 대치하면서 수난의 질곡에 든다.

 

안산에 진을 친 장만과 일전을 벌린 이괄은 패하여 죽고 난은 진압됐다. 허나 경희궁은 헐려 불타버린 궁궐보수에 전용되는 불행의 불소시게가 돼야했다. 수난의 극치는 1907년 일본통감부중학이 들어서면서 1910년에 국유로 편입되고, 1915년 경성중학교가 문 열고 대한민국정부수립 후엔 서울중고등학교로 다시 역사박물관으로 전용되면서 궁궐은 풍비박산 신세가 됐다.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논한 자정전을 훑고 서울역사박물관 뒤뜰로 내려선다. 눈발 흩날리는 적막한 야주개궁궐의 풍정이 을씨년스러웠다. 서글픈역사의 트라우마를 궐내 구석구석에 간직하고 있는 경희궁은 언제쯤 숙명같은 을씨년함에서 벗어날까? 입시에서 해방된 학생들이 역사탐방에 들었는지 경내는 모쪼록 떠들썩하다.

눈 덮인 박물관앞마당에서 신이 나 뛰노는 꼬마유치원생들의 정경이 한 폭의 동화로 남는다. 금천교 앞의 전차는 눈 쌓인 궤도에 잠시 정차하여 배웅 나온 모녀의 간절함을 보듬고 있다. 도시락을 깜박 잊은 남편을 부르는 여인의 안타까움이 차창의 눈을 녹이고 있다.

자나 깨나 우리 서민은 먹거리걱정이 앞선다. 살기위해 먹어야하고 먹기 위해 일터를 찾는 원초적인 일상은 고스란히 추억으로 켜켜이 쌓여지고, 그 고단한 추억을 소중히 되새김질하며 희로애락 함이 일생일 테다. 행복이란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저 전차 앞에서 누군가를 배웅하는 촌부로 영원히 서있고 싶다.

찬 겨울에 얼마나 훈훈한 정경인가! 떠나보낼 수 있는 정인이 있다는 삶은 행복하다. 그건 기다림일 수도 있어서다. 그 모습이 박제화 돼 있어 누군가에게 위안을 준다면 더더욱 행복할 것 같다. 겨울나비가 죄다 사라졌다. 파란하늘이 빼꼼 구름을 젖힌다.        2018. 12. 13

역사박물관

# 을사조늑약을 맺던 날 겨울 추위와 날씨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했는데, 일본군은 시내에 곳곳에서 훈련을 하고 궁궐을 포위한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어 을사년의 거리 풍경을 빗댄 말을사년스럽다에서 '을씨년스럽다'란 말이 생겼다. 날씨나 분위기가 쓸쓸하고 차가운 것을 을사년스럽다고 했는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을씨년스럽다로 바뀌었다.

 

서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