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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만추의 비단길에서 - 소요산

만추의 비단길에서 - 소요산

 

 

 

소요산에 단풍비가 내릴 때 흠뻑 젖어본다는 게 어찌하다 금년에도 늦가을에 찾아나서 반신반의 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근디 주차장갓길은 단풍비로 쌓인 낙엽이 울긋불긋 꽃길을 만들었고 꽃비는 목하 내리는 중이라.

 

 

하늘을 본다. 화톳불길이 파란하늘로 번지고 있잖은가!

떡잎 같은 꽃비가 허공을 유영하다 내 머리에, 어깨에, 무릎에 내려앉다 꽃길에 쌓인다. 누가 이렇게 카드섹션을 흩날리며 황홀한 마중길을 텄음인가! 꽃길 걷는 마음이 꽃비를 타고 만추의 우듬지로 내달리는 거였다 

 

 

 

그 울긋불긋 꽃길은 요석공원엔 질펀한 꽃마당을 만들고 소요골짝물소리 따라 일주문을 통과 속리교까지 이어진다.

정말 멋지다. 꽃비에 젖어, 개울물속삭임에 빠져든 나는 폭포의 우례소리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원효폭포가 바위를 할퀴고 있었다.

 

 

 

그 우뇌소리에 패인 바위굴에 촛불을 피우고 치성 들이는 여인의 뒤태가 또 아름답다. 노도의 폭포수를 건넌다. 일상을 말끔히 털어내라는 속리교위에 섰다.

계단을 오른다. 백팔계단입구에서 통과의례를 치러야한다. 잡생각 버렸나 검문검색이라도 할 참인가.

 

 

 마음준비가 된 자만이 해탈문을 통과할 수가 있다. 일상의 찌꺼기가 남아있다면 저 아래 시커먼 소()로 곤두박질하는 물기둥에 냅다 버려야하는 시늉이라도 내야할까보다글고 잠시 하강하여 화장실에서 몸 다듬고 부도탑 앞에서 입정하면 원효스님이 길을 터주는 거였다.

 

원효폭포

 

자재암이다. 스님이 자재무애의 경지에 든 얘기를 하고 있다. 원효는 경주요석궁에서 남편을 여의고 독수공방하던 공주와 눈이 맞아 사흘간 육체의 향연을 즐기곤 소리 소문 없이 북쪽을 향해 내달렸다.

 

 

해탈문

 

그 발길이 여기 골짝에 닿아 움막을 짓고 수행정진을 한다. 폭풍우 몰아치던 어느 깊은 밤 원효가 좌선중이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스님, 문 좀 열어주세요.” 분명 여인의 소리였다.

 

일주문

 

문을 열자 웬 여인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서 있잖은가. 그녀가 다소곶이 다가서며 간청한다.

스님, 죄송합니다.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어찌 뿌리칠 수 있겠는가. 원효가 비켜서자 방안으로 여인이 들어섰다.

 

요석공주공원

 

여인의 젖은 속살이 희미한 불빛에서 고혹적인 자태가 됐다. 그녀가 또 말문을 연다.

스님, 몹시 춥네요. 어떻게 몸을 녹여주시면 안될까요?”라며 여인은 비실비실 꼬꾸라진다. 움막은 본시 비바람만 막는 거적일 뿐 이였다. 온기는 자신의 체온이 전부~.

 

부도탑

 

원효는 조심스레 여인을 눕힌다. 글곤 정성스럽게 언 몸을 주물러 온기가 돌게 했다. 정신이 든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원효를 빤히 쳐다보다 몸을 일으켜 다가온다. 원효는 솟구치는 욕정에 멍해진 머리를 붙잡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원효굴에서 본 자재암

 

움막 밑 차가운 옥류천둠벙에 몸뚱일 담궜다. 폭포우례소리에 정색한 원효는 아까의 일들이 명료해졌다. 어언 골짝 산릉에 여명이 깃들고 있었다. 그 순간 여인이 옥류천둠벙에 들어오고 있잖은가! 여인은 나신이었다.

 

 

 

실 빛 여명이 여인의 육체를 아름답게 애무한다. 미치도록 아름답다. 덥석 껴안고 싶은 욕정과 파계라는 갈등의 혼미속에서 순간 원효는 버럭 화를 냈다.

나를 유혹해서 어쩌려고~?”

스님, 저는 스님을 유혹을 한 적이 없습니다. 스님이 색안(色眼)으로 볼뿐이지요.”

 

청량폭포

 

순간 원효는 몽둥이로 이마팍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고, 여인의 색안소리가 귀전을 맴돌고 있음을 의식한 채 자신을 추스렸다. 원효는 둠벙에서 일어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역시 알몸인 여인 앞으로 다가섰다.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마음이 생겨 가지가지 법이 생겨나는 것이니, 마음을 멸하면 가지가지 법도 없어진다.' 라고 독송하며 자재무애의 경지를 설파하자 여인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원효는 여인을 다시 쳐다봤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색기(色氣)가 없는 오로지 맑고 밝은 웃음이었다. 여인이 갑자기 폭포를 거슬러오르며 사라지고 있었다. 순간 폭포위에 어른대는 실루엣은 관세음보살이 아니던가! 원효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무애(自在無碍)경지를 깨우쳤던 것이다.

 

 

글고 그 자리에 암자를 지으니 자재암(自在庵)이라. 폭포위 관세음보살이 사라진 곳에 산봉우리가 보이는 데 관음봉이라 부른 소연이다. 어제 밤까지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었다. 불어난 옥류천 물길소리도, 청량폭포우례소리도 그날 자재무애의 밤 못잖았을 것 같았다.

 

원효굴

 

나는 청량폭포 아래 검푸른 소를 보며 벌거벗은 원효와 여인의 나상을 그려봤다. 억겁을 씻어내도 중생일 나는 그냥 색기의 그림만 상상되는 거였다. 스님은 참으로 여인복도 많다. 원효굴에서 치성들이는 두 연인의 뒤태가 숙연하다.

 

 

원효굴 옆의 석간수 한 조롱박을 퍼 마신다. 원효가 암벽수행할 때 해갈의 선몽으로 발견한 약수다. 나중에 스님들이 원효굴에서 수행할 때 게으름피우면 솟구치지 않는다는 석간수다. 시인 이규보는 약수 한 모금 마시며 '원효샘'이라 읊었다. 

 

자재암지붕으로 번지는 화톳불길

 

이곳은 예전에 물이 없어 /승려들이 깃들지 못했는데 /원효가 살고부터 단물 방울이 /바위굴에서 솟아났다네.”

고려시인 이규보가 여기서 약수로 갈증을 달래고 쓴 시다.

다시 백팔계단을 오른다. 넘 빡세다

 

 

 

숨이 차올라 멈춰 뒤돌아보니 자재암이 불타고 있잖은가. 새빨간 단풍이 자재암지붕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관음봉을 쳐다본다. 여인은커녕 봉우리마저 분간할 수 없다. 다시 계단을 오른다.

 

 

하백운대에 올랐다. 바위는 낭떨어지로 넘어지는 소나무를 붙잡고 있다. 몇 백 년을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인연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려는가 싶다. 나도 천길 단애에 걸터앉아 목을 추겼다. 세상엔 인연 아닌 게 없다. 애착심을 갖고 포용하면 다 살가워진다.

 

하백운대의 암송

 

중백운대의 암송들은 인연의 녹녹함이 세월의 더께까지 더하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일깨워준다. 그들 옆에 서서 파란 하늘을 수놓는 구름의 정처를 헤아려본다. 흐르는 구름 아래 나한대와 의상대, 공주봉이 명료하게 다가선다. 오늘 저들을 조우하고 갈 테다.

 

 

상백운대의 괴송

 

칼바위능선을 긴다. 바람갈퀴가 매섭고 울부짖는 소리도 앙칼지다. 나무들은 죄다 깨 벗은 채다. 그들이 벗어놓은 옷들이 바람에 쫓기느라 소란스럽다. 나무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들은 곱디고운 단풍인 채로, 어떤 옷은 찢기고 멍든 모습으로 갈길 찾느라 수선떤다.

 

 

자연은 꾸밈이 없다. 이쁘고 미운 것, 귀하고 천한 것, 좋고 나쁜 건 순간적으로 짓는 마음의 행로다. 신라의 귀족불교가 관념에 빠져 구두선에 치우칠 때 원효는 처처불상 실사구시를 여는 민중불교운동을 부르짖는다. 원효가 대중에 사랑받는 까닭이었을 테다.

칼바위능선

 

칼바윌 밟다가 낙엽 쌓인 숲길을 걸으면서 자연의 섭리를 온전히 촉감 하는 거다. 그 촉감은 나를 살찌우는 자연의 신비일 것이다. 그렇게 산은 나의 몸과 마음을 튼실하게 담금질시키는 거다. 산을 오르는 소이가 바로 그 체감맛의 유혹 땜이기도 하다. 나한대를 밟고 의상대에 올랐다.

 

나한대의 단애

 

원효의 절친 의상이 여길 왔었을까? 의상대암봉엔 소나무 한 그루도 없다. 철 파이프는 어떤 경계선일까? 바람이 달려와 소릴 지르는데 멍청인 도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급살 맞은 바윗길을 하강한다. 말라 비튼 단풍이파리가 나무에 매달린 채 이별을 주저한다. 이젠 미련을 거둘 때다.

 

 

 

공주봉을 향하는데 누가 요석공주가 설총을 대리고 여길 왔노라고 허풍을 떨었을꼬? 보고 싶고 안고 싶어 뜬 밤을 새우길 수 없이 하면서도 원효발길에 걸림돌이 될까봐 요석궁을 떠나지 않았던 공주였다.

 

의상대의 암송

 

하긴 마음 움직이는 곳에 길이 있고 그 길 위의 간절함은 이루어지는 법이라 했다. 두 남녀의 고혼은 꿈속에서나마 이 산정에서 해후했을지 모른다. 급강하 너덜바윗길은 낙엽을 이고 있어 하산을 더디게 한다. 바위도 오랜만에 옷을 입은 거였다. 색동옷 입다 소복으로 갈아입는 바위의 호시절이 시작됨이다.

 

 

 

습기 젖은 샘터골짝은 스산한 만추기운이 멜랑꼴리 하게 한다. 구절터의 휑한 나무의자엔 만추의 절정이 내려앉고 있었다. 만추 쌓인 의자에 앉았다. 까마귀울음이 골짝을 일깨운다. 일주문이 1km남짓이다. 오랜만에 호젓한 홀로산행에 푹 빠진 행복한 4시간이었다.

 

속리교

 

 

내 지금 산가를 찾은 것은

술을 마시고자 한뜻은 아니온데

올 때마다 술자리를 베푸니

얼굴 두꺼운들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

스님의 인격이 높은 것은 오직

향기로운 차를 마시기 때문이리.

 

백운거사(白雲居士)이규보의 시 한 수를 보태본다.

2018. 11. 09

원효폭포와 기도터

 

해후소

 

칼바위능선의 암송들

나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