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기

민과 함께 별을 핸 수원화성행궁산책

민과 함께 별을 핸 수원화성행궁산책

 

 

시월이 빗장을 열자마자 태풍 콩레이가 요란을 떠는 통에 수원화성문화제는 절름발이행사가 됐다. 화창하게 갠 축제마지막 날 오후 벼르고 벼르던 수원화성을 찾았다. 처음길인데 차 없는 팔달로는 시민들의 해방구가 되어 팔달문이 아스라이 보이는 곳에서부터 행궁광장까지 걸어야했다.

 

 

야단법석 도떼기시장 같은 광장을 빠져나와 인적 뜸한 빼곡한 숲 오솔길을 더듬으니 정조대왕동상이 튀어나왔다. 22대 정조는 당파의 희생양인 아버지사도세자를 향한 효심과 국정혁신일환으로 신도시 수원화성을 축조하여 국태민안의 명천명월주인옹이 되고자 했다.

 

서장대와 서노루

 

수원 화성의 특징은 동서양 건축술의 만남으로 설계부터 건축 방법과 건설 장비, 동원된 사람과 장비, 공사 과정의 사소한 일까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기록되어있다. 1794(정조18) 정약용은 동서양 기술서를 참고해 성화주략을 저술기반삼아 해발 143m의 수원 팔달산에 성을 쌓았다.

 

 

화성은 29개월 만에 5.7, 112400평에 달하는 성곽을 완성하였는데 다산은 화성행궁축성의 본부장이었지 싶다. "화성은 동·서양의 축성 중 과학적이고 예술적 가치의 특징을 갖춘 근대초기 군사건축물의 모범이다라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서북각루

 

화성엔 4개의 성문[()청룡문,()화서문,()팔달문,()장안문]과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암문 5개를 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행하고 양식을 나르는 통로를 설치 했다. 나는 화서문부터 올랐다.

 

 

성벽의 높인 46m정도고 성벽위에는 1m정도높이의 여장에 총안을 뚫어 수성에 용이케 했다. 성벽 밖은 경사가 심한데 지금은 울창한 소나무숲이 수원시가지화를 막고 있다. 성벽을 따라 서장대를 향한다.

 

서징대에서 조망한 수원시가

 

야산과 평지의 구릉을 잇는 자연지세위에 축조된 성곽엔 적대나 누조, 공심돈, 포루 등의 독특한 시설이 있다. 당시엔 획기적인 거중기(擧重機)를 발명하여 25000근의 돌을 들어 올렸다니 다산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장대서 조망한 화성행궁

정조는 1789(정조13)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改名)하고 팔달산 아래로 수원부를 옮겨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이라 불렀다.

 

서남암문

 

화성의 매력은 성곽건축물의 실용성과 아름다움이고, 정조임금의 부모공경의 효심에 감탄하게 됨이며, 울창한 소나무 숲속 성곽트레킹의 힐링일 것이다. 수문 2, 적대 4, 노대 2, 공심돈 3, 봉돈 1, 치성 8, 포루 10, 장대 2, 각루 4, 포사3곳 등의 시설이 있다.

 

 

서장대에 오르면 녹색의 장원아래 펼쳐진 행궁의 기와집선이 멋들어진 궁궐의 미에 취하게 하며 행궁 밖의 현대도시 수원시가지와의 부자연스런 대칭이 수반하는 파격에 휘둥그레진다. 누대에 올라 관망하는 2층전각 서장대의 멋스러움도 일품이다.

 

 

파란가을하늘아래 고풍스런 서장대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추억 쌓는 트레커들이 그리 행복해 보일수가 없다. 정조임금과 정조가 엄청 사랑한 다산정약용의 후덕이라. 정조와 다산은 애인이상의 단짝이기도 했다.

 

  정조대왕 동상

 

마흔여덟 살에 승하한 정조임금이 생각날 땐 다산은 옷깃에 눈물을 훔치며 지금 곧장 따라죽고 싶으나 그러질 못한다고 한()의 연시를 쓰며 애달파 했다. 정조가 죽기 며칠 전, 지방에 나가있는 다산한테 왕은 뜬금없이 책 열권을 보내왔다. 5권은 선물한 거니 가지고 나머지 5권은 책제목을 써서 보내라고 했다.

 

 

얼굴을 못 보니 글씨라도 보고 싶었던 왕은 빨리 올라와서 글 쓰라고 재촉한 거였다. 글곤 다산이 오기도 전에 승하했던 것이다. 왕은 뭣이 그리 바빠 황급히 저세상으로 떠난 걸까! 다산의 가슴은 미어터졌다.

 

500살의 향나무

 

무예엔 등신이었던 다산은 술도 담배도 안 했다. 다산과 마주 앉은 정조가 담배를 피우며 시작(詩作)을 권했다. 다산이 얼른 시를 써서 올린다. 왕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시문 옆에 ‘백,백,백이라고 세 번씩 써서 치하했을 정도로 단짝연인이었다.

 

처마끝과 담장 너머로 신풍루가 보인다

 

어느 추운 겨울깊은 밤에 규장각에서 독서중인 신하들에게 정조가 술과 음식을 내려보냈다. 이 전갈을 딴 데서 접한 다산이  규장각으로 오다가 넘어져 광대뼈부분이 긁혀 상처가 났다. 담날, 정조가 다산의 얼굴상처를 보고 어찌하여 납지(상처)가 생겼는가. 간밤에 술을 많이 마셔 취해 넘어진 게 아닌가?’ 라고 물었다.

 

봉수당어전

 

다산이 술 때문이 아니라 어둠 땜에 그랬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대뜸 옛날부터 취학사(醉學士)와 전학사(顚學士)가 있다던데 취하지 안했으면 넘어진 학사로군이라며 놀리셨다. 다산이 술 일모금도 못한다는 걸 왕은 넘 잘 알고 있었다.

 

봉수당의 다례

 

애주가인 왕이 다산이 유생일 때부터 상()으로 술을 내리곤 했는데 다산은 헤아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면 왕은 상이니 꼭 받아야한다, 고 기어이 술을 내렸다. 평소에 수신청갈 흐트러짐 없는 다산이 술 한 잔으로 취해서도 멀쩡한 채 애쓰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던 왕이었던 것이다.

 

가피를 두른 600살의 느티나무

 

<다산일기>에 간주호최경흠(看酒戶催鯨欽, 주량대로 다 마시라,고 재촉하셨다)이라고 썼으니 정조가 내리는 술잔 앞에 곤욕스러운 때가 많았던 모양이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쓴 편지에 '세 번 일등 했는데 그때마다 소주를 가득 따라 하사하여 나는 오늘 죽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는데---’ 라는 구절이 있다.

 

 

정조는 다산과 술 마시며 담소하기를 즐겼다. 서암문을 지나 효원의 종과 서포루에 닿았다. 서남치에서 서남암문에 올라 화양루(서남각루)100m정도 빠지는 꾸꿈스런성벽에 용도서치와 용도동치가 있고 서남각루를 만들어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했다.

 

봉수당

 

다시 되돌아 나와 백성들의 도성 안 출입을 위한 비밀문인 서암문을 훑고 남포루를 향하는 성벽은 45도로 기울었다. 화성행궁을 가는 임도와 팔달문을 향하는 갈림길 남치에 서는데 나는 행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밖 팔달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

성신사를 일별하고 화성행궁에 들어선다. 태풍콩레이로 이틀간을 망친 수원화성문화제’피날래엔 인산인해 왁자지껄이다. 행궁은 정조가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능을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쳐 부르고 그곳으로 행차할 때 임시별궁으로 건축하였다.

 

 

봉수당, 장락당을 비롯한 총 576칸의 거대한 궁궐로 정조는 여기서 모친`경의왕후(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경로잔치를 열어 백성들에게 효행을 보여주었다. 장수를 빈다는 뜻인 봉수당엔 정조와 왕비가 경의왕후에게 회갑연을 베푸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성신사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17(1793)에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금위조직인 장용영(壯勇營) 수위식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복내당과 유여택을 훑었다. 신풍루우측의 600년 묵은 귀목은 가피(痂皮)를 두르고 새순 하나를 살려내느라 영험을 쏟고 있다.

 

 

행궁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느티나무위로 파란하늘이 양떼구름을 몰아 팔달산능을 넘고 있다. 궁궐 맞배지붕들의 유려한 선의 이어짐이 한 없이 아름답다. 어쩜 정조도 양떼들의 가을소풍을 친람했을 테다. 

 

 

내가 노상 머물거나 사는 곳에서 내 자신을 반조하긴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탈출에서의 여행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 반추속의 자각을 곧 잊게 되더라도 여행은 편한일상 보단 훨씬 값어치 있는 투자다. 집 떠나 낯선 길에서 나를 발견하는 잠깐의 멈춤! 화성행궁에서 정조와 다산을 마주치며 그 사이에 나를 끼어본다.

 

서남각루로 가는 성벽길

 

엄청 술을 좋아한 고독한 정조와 말 타기와 활쏘기엔 늘 꼴찌였던 다산을 그려보면서 팔달문을 나섰다. 상대의 단점까지 싸안으며 사랑한 왕과 신하의 경지를 상상해 봤다. 어떤 추억이던지 간에 기억할 게 많은 사람은 행복한 순간에 자주 접하게 된다. 왕은 외롭다. 정조는 다산을 만나 행복한 왕 노릇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다산도 그랬고!

2018. 10. 07

 

정조대왕능행차

서남각루

서남암문

효원의 종

화성행궁광장

팔달문

해방구 된 팔달로

미로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