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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북한산둘레길20 - 왕실묘역 길(연산군의 폭정)

 

북한산둘레길20 - 왕실묘역 길(연산군의 폭정)

 

 

 북한산우이역사에서 우이천변을 따라 걷다보면 왕실묘역길이란 현판을 단 아취형문이 이정표를 앞세우고 탐방객을 맞는다. 원당샘공원과 800여살 먹은 은행나무와 연산군묘역과 정의공주묘역을 순례하는 역사탐방 길이다. 9월이 문을 열기 무섭게 폭염은 꼬리를 감췄다.

왕실묘역길이란 현판을 단 아취 문을 들어서자 소나무들이 붉은 황톳길을 열었다. 파란하늘이 솜털구름을 띄우는 게 영락없는 가을이라.

 

 

아내와 나는 연산군의 묘역을 볼 참으로 오늘 왕실묘역길에 들었다. 소나무와 상수리, 갈참나무가 울창한 숲길은 산책하기 딱 좋다. 포장 안 된 황톳길이 밋밋한 능선을 이뤄 더 좋다. 한 달쯤 후엔 상수리가 우수수 떨어질 것만 같다. 송림 속에 어느 정경부인묘가 풍월에 닳은 만큼 허접 쓸쓸하다. 커다란 봉분은 잔디도 없이 허물어지고 있다. 사람이 죽음보다 더 슬픈 건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는 일이다.

 

 

봉분도 망부석도 차라리 없었으면 후손들 체면 구기진 않을 테니 역사에 남지 않을 위인이라면 봉분도 만들지 말아야 함이라. 폭군연산은 악행을 많이 해서 인구에 회자되고 그래 울 내외도 묘소를 찾아가니 세인들 관심끌기론 영민한 군주라 할까? 아닌 게 아니라 연산은 영리하고 배짱도 두둑한 카리스마 넘치는 왕이었다. 즉위 초 4년간의 선정은 조의제문과 폐비윤씨의 복수를 위한 무오`갑자사화를 야기하기 위한 미끼였던가!

 

우이천

 

왜 참고 구차하게 사는가? 음독자살 하세요.”승지 박원종이 누나이며 월산대군부인인 박 씨에게 애증의 힐난을 뱉자 한 달 뒤 박씨는 자살한다. 세간에선 왕의 총애를 받아 임신하자 음독자살했다(幸於王 有胎候 服藥死 1506720)고했다. 박씨 자살40일 뒤 박원종이 성희안과 주동하여 정변을 일으켜 연산군을 끌어내리니 '중종반정'이다.

 

 

연산군은 성종(成宗,1457~1494)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7살에 세자로 책봉, 19세에 제10대 임금이 되었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낸 죄로 폐비가 되어 대궐에서 쫓겨났다. 얕은 솔밭구릉을 내려서자 조그만 공원에 원당정이 연꽃도랑에 발 담구고 한가롭게 있다. 원당 샘에서 발원한 약수터는 도랑을 만들어 저만치 우람한 은행나무를 휘돈다.

 

 

800살을 넘긴 은행나무는 서울서 젤 나이 많은 거목이란다. 놈은 연산군이 이곳에 이장될 때부터 줄곧 수문장 역할을 했지 싶다.

성종은 생전에 폐비사건을 100년간 발설금지령을 내렸지만, 간신임사홍이 폐비윤씨의 친정어머니 신씨부인을 연산군과 만나게 했다. 신씨부인은 폐비윤씨가 사약을 마시며 토한 피 묻은 한삼을 연산군에게 보여주며 비참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복수의 화신이 된 연산군은 윤씨의 폐출에 관련된 성종의 두 후궁 정소용과 엄숙의를 이복동생 이봉과 이항을 시켜 때려죽이고 시신은 젓을 담가 산과 들에 뿌렸다. 봉과 항은 정소용의 아들이다(1504323'연산군일기').

 

 

정창손, 한명회, 심회, 윤필상, 이파 등 연류된 203명과 친족30여명이 살해되고, 비상을 추천한 내의(內醫) 송흠, 심부름한 당하관 권주, 사사(賜死)하란 어명을 받들어 윤씨집에 간 이세좌까지 오살육시하고 이미 죽은 자는 부관참시 하는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갑자사화,150692'연산군일기').

 

 

서울시지정보호수1호인 은행나무는 높이 24m,둘레9.6m인 신목(神木)이다. 우람한 자태에 넋을 앗게 하는데 이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변고가 발생했단다. 원당샘과 묘역사이에 연산군묘역관리 재실이 있는데 매년 42일 청명재향을 올리는 관리인 참봉이 거주하는 곳이라.

 

 

연산군묘는 관리사무소에서 야트막한 언덕빼기를 오르면 꽤 넓은 묘역을 이뤘다. 맨 앞에 연산군딸부부묘, 가운데는 의정궁주조씨묘, 맨 위에 연산군묘와 부인 거창신씨묘가 있다. 연산군부부의 묘 뒤로 곡장을 쌓았는데 구부정한 홍송 두 그루가 파란하늘을 가리며 묘소를 지킴이하고 있다.

 

 

푸른 하늘을 마주하긴 넘 부끄러울 연산군이라서 말이다.

한 술자리에서 예조판서가 실수로 연산군 소매에 술을 끼얹자 그를 무안으로 유배 보낸 뒤 반년 후에 사면시켰다. 복귀한 그에게 술을 따르며 연산군이 말했다. "네가 전에 내게 쏟은 술이다." 죽다 살아난 예조판서가 감읍하여 울었다(150433'연산군일기').

 

 

허나 7일 뒤 또 유배형을 당했다. 영월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지 따라 사타구니에 불붙게 쏘다니다 한성 성문 밖에서 장형을 당했다.

"내가 형장 때리는 것이 그른 줄 안다(予知決杖之爲非). 그러나 불공(不恭)한 자가 있는 것이 모두 네 탓이므로(皆由於汝) 죄를 주는 것이다." 연산군이 그를 놀리며 비아냥댔다. 그 예조판서는 어명을 받아 사약을 들고 윤씨에게 전했던 승지 이세좌였다.

 

연산군묘역

 

그는 곧 사약형을 선고받고(賜死) 44일 자살했다.

52, 의금부는 죽은 이세좌 머리를 잘라 거리에 내걸었고, 1124일엔 이세좌가 뽑은 과거합격생을 전원 탈락시켰다. 뿐이랴, 그가 살던 집은 물론 친족들 집까지 부수고 허물어 방죽을 만들고 모두 죽였다. 

 

 

묘역 앞 간이의자에 앉은 울 내외는 사람이 악독해지려면 어디까지 갈랑가? 라고 소름끼치는 연산일생을 상상해보고 있었다. 묘역을 찾는 탐방객이 심심찮았다. 그들이 연산묘를 찾는 소이는 뭘까? 역사는 성군과 폭군의 발자취일 것이다. 폭군이 있어야 반면교사삼아 역사발전은 이뤄진다고 억지 합리화해본다.

 

 

폭악한 군주의 발자취는 거칠고 음흉해서 어쩜 더 드라마틱하기도 해 강렬하게 각인되는지 모른다. ‘능상지풍(陵上之風)'이란 왕권강화를 위한 핑계로 살육을 자행한 연산의 행적은 조선왕조에 별다른 귀감이 되지 못해 외세의 침탈에 속수무책이었지 싶은 거다. 후손들의 안일함일 것이다.

 

 

"짐이 행한 위정을 누군가는 반드시 폭정(暴政)이라 할 것"이라고 연산군이 자문(?)하자 승지들이 대답했다.

"다들 자기 스스로 지은 죄인데 누가 감히요(誰敢以爲暴政乎)"라고(1504323'연산군일기'). 연산군이 또 말했다.

"억울함을 아직 다 풀지 못했다(雪寃猶未盡·설원유미진). 불충신하는 신하는 개돼지로 대우하리라."(421'연산군일기').

 

 

대궐근처는 물론 경기도 땅 절반에 금표(禁標)를 세우고 백성을 몰아내 사냥터로 삼았다. (1505529).

옥수동(두모포)에 있던 동빙고를 서빙고 옆으로 옮겨 사냥터로 삼아 행차할 때 궁녀1000여 명을 거느렸는데 연산은 대낮 길가에서 궁녀를 간음 방탕했다 (王淫于道傍 1506718). 또한 문묘(文廟)에 있던 금표도 밖으로 옮기고 그 안에서 기생들과 음희(淫戲)장소로 사용 주색에 빠졌다.

 

 

왕실묘역의 길가 울타리에 능소화가 만발했다. 옛 고관대작들은 바깥채담장 밑에 능소화를 즐겨 심고 완상했다.

월산대군 이정(月山大君 李婷)의 처 박씨의 집에도 능소화가 피었다. 능소화가 피기시작 한 음69(1506) 연산군은 박씨에게 은도장을 만들어줬다. 벼르고 벼르던 박씨를 품에 안고 간음한 포상(?)이었다. 박씨는 연산군의 큰어머니다. 막장으로 가는 미친짓이었다.

 

 

박씨가 과부가 되자 세자를 큰아버지 월산대군집(덕수궁)박씨에게 맡겨 보살피게 하면서 기회를 여수 던 참이었다. 은도장을 받은 나흘 뒤 박씨의 남동생 무관(武官)박원종이 정승급으로 승진한다(613). 바른 소릴 잘 하는 원종은 한직으로 쫓겨난 참이었다. 누님의 치욕을 접한 원종은 누나가 자살하자 동지 성희안과 모의 중종반정을 성공시킨다.

 

 

강등된 연산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된지 2개월 후 역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글고 강화도 새끼섬 교동도에 묻혔다. 교동에 묻힌 그의 시신은 6년 뒤 그의 부인 신씨의 청원에 중종이 허락하여 경기도 양주 지금 이 자리, 서울방학동에 이장됐다(중종71512).

 

 

연산군부인은 거창 신씨 영의정 신승선의 딸이다. 연산이 폐위되자 자연히 폐비신세가 됐다. 연산군묘 앞에 후궁 조씨의 묘는 태종의 후궁으로 태종이 곧 죽자 빈에 오르지 못한 비운의 여자다. 맨 아래에 딸과 사위 구문경의 묘가 함께 있어 가족묘역을 이뤘음은 포악한 연산의 이미지를 좀은 가부장화 될 것 같았다.

 

 

곡장너머의 소나무가 유난히 더 굽어 연산군부부를 감싸나 싶었다. 청명한 갈 하늘 보기가 느닺없다 싶어서리라.

문득 깊은 가을 이 길을 걷다가 읊은 시 한편이 떠오른다.

 

만추(晩秋)의 끝자락을 덮고/ 서른한 살의 원혼(冤魂) 연산군은/ 부인 신 씨와 나란히 누워 있다/ 낙엽 빛깔의 산비둘기 한 쌍 바스락바스락/ 봉분 옆을 서성거리며 적막을 뒤진다/

800여살의 은행나무

 

팔백서른 살의 수문장 은행나무는/ 하마 무성했던 잎 다 떨구고/ 맨몸으로 버티고 섰다/ 뿔이 아홉 개 난 거대한 괴물이다/ 코발트색 하늘이 가지 끝에 걸려 출렁거린다/ 후드득 얼굴에 떨어지는 푸른 빗방울.

<서울투어 연산군 묘>      2018. 09. 02

 

# 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참고함

 

앞이 부인 거창신씨, 뒤가 연산군묘

폐묘직전의 어느 정경부인묘

 

왕실묘역길에서 본 도봉산연봉

우이선은 인공지능(AI)전철이다. 노약자석 옆의 직원 한 분은 고장에 대비한 스페어기사(?)다. 세상에 젤 편한(?)공복이랄까? 거대한 열차도 이젠 AI시대로 진입함이라

무인인공지능자동차, 드론택배, 전쟁시 최일선엔 군인 대신 드론, 산업현장엔 로봇의 시대가 코 앞인데 정작 할 일이 없이 놀고먹을 시대의 사람들은 행복할까? 

무인전철을 타고 귀가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은 스스로 개발한 메카니즘에 자승자박할지 모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