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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111년만의 폭서나기

111년만의 폭서나기

 

 

35~39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보름째 이어지고 있다. 여름은 내 세상이란 듯 앵앵대며 호시절을 즐기던 모기도 뜸하고, 새벽이면 창밖 메타세콰이어에서 여름잠을 설치게 하던 매미들의 짓궂은 합창이 가냘픈 아리아로 바꿨다. 111년만에 첨 맞딱드린 서울풍정이다.

 

 

금욜(3)밤에 울 집은 때 아닌 물 소동에 난리가 났다. 응접실바닥을 밀물처럼 점령해오는 물길에 놀란 식구들이 한바탕 전쟁을 벌였는데 놀랍게도 적의 아지트는 에어컨이었다. 초저녁에 에어컨위치를 살짝 옮긴다는 게 냉각수호스가 빠져 실외로 빠져야 할 물이 고스란히 실내로 쏟아진 탓이었다.

 

 

대충 정리를 하고 에어컨을 살폈지만 호스를 연결할 방법은 에어컨외피를 벗겨내는 수밖엔 없었다. 뒷면에 2, 상단에 있는 볼트4개를 빼내고 외피를 때내려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평소에 식구들 앞에서 어설픈 멕가이버흉낼 곧잘 냈던 난 알량한 그 체면마저 꼬불처넣어야 했다.

 

 

아니 찢어진 자존심(?)보단 진짜 전쟁은 지금부터란 게 울 집식구들의 절망감 극복이었다. 30도를 웃도는 열섬의 열대야를 깨 홀라당 벗고도 감당할 의지빈약으로 풀죽은 꼴은 영락없는 패잔병몸꼴 이였다. 여름방학을 보내려 베이징서 온 꼬맹이 은이는 사뭇 울상이다.

 

 

두 대의 선풍기로 네 식구가 열대야를 지새운다는 것도 에어컨 맛에 길들여진 피서체질엔 낭패일 뿐이었다. 선풍기만으로 여름을 나는 집도 무지 많으리라. 그것도 쪽방이나 다락방에서 이 폭염여름을 이겨내는 사람들을 상상해 봤다. 아니 한 땐 울 식구들도 그랬었다.

 

 

돈 싸 짊어지고도 선풍기를 못 사 애간장 태우던 시절도 있었다. 1978726일 세운상가 가전매장에서 500여명이 뒤엉켜 육탄전이 벌어졌다. 밀쳐 넘어지고 걸려 자빠지다 유리창이 박살나고 점원은 손가락이 부러졌다.

 

 

금년처럼 32년만에 찾아 온 폭서에 선풍기가 품절 됐는데 마침 이 매장에 200대의 선풍기가 새로 들어왔단 소문 땜이었다. 새벽부터 밀려드는 인파로 자리다툼 난투극을 벌렸다고 동아일보는 729일자에 기사화했다.

 

 

그해 선풍기 대란에 선풍기구매 예약티켓 한 장이 1만원(지금시세로 11만원에 선풍기값은 대당 75만원을 호가했다)이였다니  지금 에어컨냉방타령 하는 울 식구들은 달나라 세상에서 호강에 초친 품새라.

 

 

(토욜)이 샜다. 새벽바람도 후텁지근하다. 매미 두 마리가 간드러지고 짧게 목청을 틔다 자지러진다. 아마 이슬이 없어 목을 축이지 않은 탓일 게다. 아내의 등살에 사무실문도 안 열었을 8시에 AS센터에 전활 넣었다.

 

 

용케도 전할 받는 아가씨 왈, ‘월욜 오후 7시반 예약가능하다는 게다. 성에 안 차 인터넷서핑에 들어 중고가전 기사님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글다가 작년에 구매했던 가전매장을 찾아가 10시반에 문 열기를 기다렸다. 역시나 인력부족으로 도울방법이 없단다.

 

 

'월욜7시반이라면 엄청 빠른 거라'고 자못 불쌍한(?) 나를 달래는 투였다. 아침부터 왔다 갔다 하느라 애꿎게 땀으로 목욕만 한 셈이다. 다시 연장통을 들고 에어컨분해에 골몰했다. 볼트를 다 빼고 외피를 벗기려는 시도는 또 실패했다.

 

 

쇠톱으로 절단하여 호스구멍을 넓혀 호스를 연결하려다 식구들의 맹렬한 반대에 접었다. 할 수 없이 월욜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출장 갔다 일욜에 귀가하는 둘째가 이틀 밤을 호텔에서 나자고, 예약하겠다고 전화에 대고 알랑방귀를 뀐다.

 

 

참 편리한 세상이고 발상도 기발 난 세태다. 난관을 헤처가는 방법도 기똥차다. 하긴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기에, 풍요의 세상을 질주하는 젊은이들 상상의 날갯짓에 울 내외 같은 꼰대들은 멍해질 때가 가끔 있다.

 

 

박원순서울시장이 서민들의 여름나기를 공감해보겠다는 취지에선지 삼양동 옥탑방에 한 달간 셋방살이 입주를 했단다. 글고 문재인대통령은 그 옥탑방의 박시장한테 선풍기 한 대를 선물했다나? 어째 공감이 안가는 권세가들의 세태 비틀기 허세란 선입견을 지울 수가 없다.

 

 

울 둘째의 상상의 날갯짓보다 더 유치하여 비아냥대고 싶어진다. 그럴 상상의 여력과 고생할 시간에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고민하실 일이지? 선풍기 살 돈 없어 다락방살이 할 가난뱅이 아닌데 그걸 선물하시는 건 혹여 김영란법 테두리 안일 테고-.

 

 

선풍기를 보듬고 폭염과 씨름하다 울 내왼 해질녘에 안산자락길 트레킹에 나섰다. 태양이 아무리 지구를 볶아대도 특별한 일이 없음 울 내왼 자락길산책 두 시간여를 빼먹지 않기로 했다. 푸나무도 지쳤던지 초록 숲도 늘어졌다. 아니 누렇게 변색된 아까시아 이파리가 수북이 떨어져 갓길에 쌓여있다.

 

 

설마 가을리허설? 생명 있는 만물이 이 폭염을 이겨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음이라. 상수리나무 사이로 파란 하늘이 지나가고 뭉게구름도 흘러간다. 바람 한 결도 정적을 더듬는다. 낼 모래 아님 글피라도 소나기 한 줌이 쏟아져 푸나무의 기운을 북돋을 것이다.

2018. 08.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