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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사도세자의 부활 - 화산 용주사

 

사도세자의 부활 - 화산 용주사 

 

 

석탄일 하루 앞둔 오늘은 내 귀빠진 날이기도 하다. 음력사월 초이레인데도 기억하기 좋은 건 석가탄생일 전 날이어서다. 해서 고교시절부터 알고 있는 혜시미는 석가모니형님이라며 꼭 축하메시질 띄어주고 있다. 시쳇말로 (아내가 끓여준)미역국에 아침을 먹고 화성용주사를 향했다.

 

 

용주사(龍珠寺)는 사도세자의 슬픈 혼백이 숨쉬는 곳이고, 세자의 아들 정조의 효심이 뭉클 묻어나는 효찰대본산이다. 하여 나는 오래전부터 용주사행 꿈을 꿨던 것이다.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용주사는 지하철1호선병점역에서 버스로 10여분 걸렸다.

 

불음각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송림사이 갓길에 선돌이 박혀있고 뜬금없는 홍살문이 서있다. 사당이나 왕릉 입구에 있을 홍살문이 사찰 안에 있단 건 예삿일이 아닌 것이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위패를 모신 능침원찰(願刹)이어서다. 배불숭유의 조선조에서 원찰이 갖는 위세와 의미는 대단하다.

 

5층석탑

 

신라때 지은 갈양사가 소실 된 절터에 1790년 용주사가 세워졌다. 낙성식 전날 밤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곤 절 이름을 용주사라 했단다. 정조는 보경스님한테 '부모은중경'설법을 듣고 감동하여 아버지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려 스님을 전국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임명하고 여기에 절을 지으라 했었다.

 

대웅전삼존불과 단원의 삼세여래후불탱화가 있다

 

왼편에 있는 박물관도 여느 사찰과는 다른 건물이다. 정조의 부모은중경과 친필인 봉불기복게, 단원의 사곡병풍, 봉림사 아미타불복장유물 등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었다. 내일이 초파일이라 경내는 연등으로 허공을 매웠고 참배객도 많아 행사준비하는 사람들로 야단법석이라.

 

 

홍살문

 

 양쪽에 맞배지붕 기와집을 거느린 삼문(三門)을 통과한다. 고관대작 행랑채 비슷한 건 중앙대문은 정조대왕의 행차를 의식한 궁궐과 사찰의 혼용건물일 터다. 잠겨있는 중앙문 양편의 문을 나서면 세월에 닳아 정감이 드는 부처님사리를 봉안한 5층석탑과 마주한다.

 

삼문

 

 

석탑을 끼고 돌면 높은 석조기둥들이 정면5, 측면3칸짜리 목조건물 천보루(天保樓)를 떠받치고 있는데 용주사창건시(1790)2층 그대로란다. 범종과 법고각을 양켠에 앞 세운대웅보전에 들어섰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돌을 깔아 길을 닦아 놓았는데 필시 궁궐의 어도(御道)를 염두에 뒀을 터다.

 

경기문화재 제36호 천보루와 5층석탑

 

창건당시의 대웅전건물 법당 안엔 단원의 '삼세여래후불탱화'가 있었는데 많은 신도들이 법당에서 참배중이라 후딱 일별하는 아쉬움으로 남아야 했다.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정조와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護聖殿)과 부모은중경탑을 돌아 천불전과 시방칠등각 등을 훑곤 경내 뜰 안에 자릴 펴 한가로운 오후를 즐겼다.

 

 

고목 회양목이 평지사찰에 우뚝 솟아 사도세자의 호성전 능참지기 하나 싶었다. 27살에 요절한 사도세자의 비운은 생각할수록 미스터리한 권력욕의 참극이겠다.

 노론의 세력을 업고 집권한 영조는 사색당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린 채 총명한 아들을 불신하여 박해하는 악독한 부왕의 길을 간다.

 

천불전

 

영조는 끝내 아들(세자)을 쌀뒤주 속에 가둬 8일만에 아사시키곤 뒤늦은 후회 속에 사도(思悼)’란 시호를 내렸다(1762). 누구의 통곡도 쉬쉬했던 사도세자의 시신은 양주군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에 안장했다. 영조는 손자 정조에게 '세자가 당신을 위해 스스로 죽었다'금등(金縢)’이라는 친필 비밀문서를 주었다.

 

회양목과 고목

 

정조를 사도의 아들이 아닌 걸로 하라고 유언까지 하면서였다. 허나 1776년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했다. 아울러 영우원의 묘를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조성했다.

 

전강대종사 사리탑

 

정조가 남긴 애끓는 사부곡과 유적들이 있는 화성은 오늘날 효의 도시로 인구에 회자된다. 정조의 유명한 사부(思夫)에피소드가 전해온다. 비오는 어느 날, 융능(현륭원)을 지키던 능참봉의 꿈속에 아버지가 나타나 지금당장 능에 가서 엎드려있으라고 했다.

 

 

잠에서 깬 능참봉은 억수로 퍼붓는 빗속을 달려 능앞에 서있었다. 이때 궁에서 무관이 와서 너는 누구냐?”고 묻자 능참봉이라고 대답했다. 무뚝뚝한 무관이 당신은 선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지금 목숨을 구했다라며 사라졌는데 그 무관은 정조의 밀사였다.

 

천불전 앞 뜰

 

천둥번개가 치고 빗발치는 밤중에 정조는 아버지 생각에 잠 못 이뤄 뒤척이다가 내 아버지는 비 내리는 찬 무덤 속에 계시는데 능참봉이란 놈은 아마 따신방 아랫목에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무관을 보냈던 거였다.

만약 능참봉이 방안에서 자고 있으면 목을 베어 오라고 시켰던 것이다. 그런 정조가 아버지 사후32년 만에 어머니혜경궁홍씨를 모시고 현릉원을 찾는다.

 

 

한 많은 혜경궁홍씨는 아들정조 보다 15년을 더 살다 1815.12 15일 운명한다. 애절한 사연의 효찰용주사는 일제 강점기 전까지 일 년에 6회 제사를 지냈단다. 용주사는 낮고 펑퍼짐한 야산 들자락에 있어 정조어가행렬도 용이했으리라.

 

 

아내와 나는 다시 한 번 경내를 거닐며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와 정조를 그려봤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추잡하고 부패하기 쉽다. 시쳇말로 '사람이 먼저다'라는 화두를 삶의 지표로 삼아야하는 이유다. 사람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불타는 몇 걸음 때자마자 갈파하지 않았던가!

2018. 05. 21

 

대웅전연등

  석탄재등행사 리어설

지장전

호성전

박물관

굴뚝이 있는 후원

사천왕문

효행문화원(탬플스테이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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